두 친구의 엄마를 보내며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음을 잘 안다.
고등학교 친구 정이가 엄마를 잃었다.
그때도 지금도 마냥 해맑기만 한 아이. 짧은 연애를 하고 고등학교 친구 다섯 명 중 가장 먼저 시집을 간다고 폭탄선언을 하더니, 결혼식을 올린 지 채 몇 달 되지 않아 비밀리에 예쁜 딸을 낳아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던 친구.
이른 아침, 정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의 부고 소식을 전해왔다.
"어머니 위해서 기도할게."
나이를 먹어도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괜찮냐'라고 묻기엔 너무 가벼워 보이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은 사무적으로 느껴지고.
'힘내라'는 말을 하기엔 잔인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난 고르고 고른 '기도할게'라는 짧은 인사말을 자주 쓰는 편이다.
그리고 난 상주에게 절대 묻지 않는 말이 있다. 궁금해서라기보다 인사처럼 묻는 말이었지만, 재작년 상가에 다녀온 이후로 묻지 않는다.
'어떻게 돌아가셨냐는 말'
육십이 넘어 엄마를 보낸 선배의 말 때문이었다.
"장례를 치르다 보니 왜 돌아가셨냐는 말을 듣는 게 힘들더라. 가장 많이 듣는 말인데 똑같은 말을 계속하면 무뎌져야 하는데 무너지더라고. 불효한 것만 같고."
묻지 않았다.
얼마나 아프셨는지, 가실 때 가족들은 있었는지 -
그저 엄마의 영정 사진만 보고 있는 정이를 안아주기만 했을 뿐.
"사실은 우리 엄마도 오늘 내일하셔.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데, 나 너무 두려워.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상숙이의 그 표정과 그 낮은 목소리가 밤새도록 귓가에 맴돌았다.
마음의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음 날, 상숙이도 정이처럼 엄마를 보냈다.
나의 절친 둘은 하루를 사이에 두고 엄마를 잃었고, 지금은 엄마의 빈자리를 감당하면서 또 다른 엄마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수다로 가득했던 우리의 카톡방은 잠시 휴면기로 접어들었다. 지금은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두 친구의 마음을 조심스레 살피는 시간이다.
'마음의 준비'라는 건 완성이 불가능한 말이라서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 받아들여져 있을 일이란 표현이 맞지 않을까?
딸에게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두 친구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내마음도 기운다.
부디, 종녀씨와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면 좋겠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다정하게 들어주기'
'설령 귀찮고 피곤해도 공부 가르쳐주기'
'예쁜 카페에 찾아가서 커피 한잔 마시기'
'함께 목욕 가기'
어쩌면 이런 지극히 평범한 순간들이 먼 훗날 '내가 엄마와 할 수 있었던 마음의 준비'였다고 말할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