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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맑음 Oct 19. 2024

깡통 아빠

유맑음 동화#11

 “교무실은 이쪽, 급식실은 저쪽. 더 물어볼 건?”


 반장 김은지가 제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지는 다행이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반장이란 이유로 전학생에게 교내 이곳저곳을 알려주는 게 귀찮을 만도 하다. 더군다나 소중한 점심시간까지 뺏기고 있으니 말이 곱게 나올 리 없었다.


 “당연히 수저는 챙겨 왔겠지?”

 은지가 톡 쏘아 말했다.

 “아니, 안 가져왔는데.”

 “뜨악!”


 사실 내 가방 뒷주머니에는 일회용 플라스틱 숟가락과 나무젓가락이 있다. 없다고 대강 둘러대는 게 속 편했다. 전에 있던 학교에서는 내 일회용 수저에 말들이 많았다. 설거지 줄여주는 효녀라는 둥, 환경은 생각 안 하냐는 둥. 나는 여기서까지 그런 잔소리를 듣고 있을 여유가 없다.

 살짝 신경질이 난 은지는 나를 데리고 교무실로 향했다.


 “선생님, 유정이 수저 안 가져왔대요.”


 은지가 실실 눈웃음을 지으며 선생님께 말했다. 배에서 우렁찬 뱃고동 소리가 울렸지만, 억지스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생님 앞에선 전학생을 잘 챙기는 반장이고 싶나 보다.


 “어머, 수저를? 아이고, 이런. 내일부턴 꼭 챙겨 오렴. 우리 5학년 3반은 수저 안 가져오면 벌점 스티커야.”

 “네.”


 수저 안 들고 온 게 벌점 스티커까지 받을 일인가 싶었다. 선생님은 교무실에만 있는 새파란 불빛의 자외선 소독기를 열어 비상용 쇠 수저를 꺼냈다. 순간 선생님이 아차, 하며 머뭇거렸다. 엄마가 내 사정을 얘기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은지 눈치를 살피다 수저를 새까만 비닐에 넣어 내게 전해주었다. 시계를 힐끔힐끔 보던 은지는 다급하게 배꼽인사를 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강유정, 얼른 급식실 가자.”

 은지는 내 팔을 낚아채 서둘러 급식실로 향했다.

 

 우리는 급식실 앞에 줄을 섰다. 줄 앞 쪽에는 같은 반 아이들이 재잘대고 있었다.

 “김은지! 왜 이제와. 너 기다리다가 우리도 늦게 왔잖아.”

 “미안, 미안. 전학생이 수저를 안 가져왔대서 교무실 갔다 왔어.”

 아이들이 힐끗 나를 살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유정, 저기 아무 데나 앉아서 먹으면 돼.”

 은지는 급식실 안쪽 빈자리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곧장 제 무리 속으로 들어가 수다를 떨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난 지금 김은지가 아니라, 겹겹이 쌓인 저 양철 식판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서 맨밥만 두어 숟갈 퍼다 자리에 앉았다.


 아, 또 시작이다. 양철 식판이 눈앞에서 소리 없이 우그러졌다. 자동차 바퀴에 깔린 깡통처럼 처참히 구겨진 모양새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났다. 주변 애들은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벌벌 떠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만 검은 안갯속에 갇힌 것 같았다.      

 

 철 따위가 찌그러져 보이기 시작한 건 작년 이맘때였다. 그날은 체육 수행평가 날이었다.


 “오늘 평가 항목은 턱걸이 20초다. 다들 연습 많이 해왔겠지?”


 출석번호대로 첫 번째 차례는 나였다. 턱걸이 20초쯤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친구들과 연습할 때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 햇볕에 달구어진 철봉을 잡고 발을 떼는 그 순간이었다. 철봉 기둥이 길쭉한 홍보용 바람 풍선처럼 사방으로 휘어지더니, 이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는 무너지는 철봉에 그대로 깔렸다. 으스러진 철봉이 내 가슴팍을 억세게 짓눌렀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걱정 섞인 비명이 귓가에 엉겼다.

 그 이후는 기억나지 않는다. 겨우 눈을 떴을 때 나는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같이 온 보건 선생님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내게 말했다.

 “좀 괜찮니? 철봉에서 정신을 잃고 갑자기 떨어졌단다. 팔꿈치가 조금 쓸린 거 말고는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그제야 팔꿈치가 쓰라린 걸 느꼈다. 분명 무거운 철봉이 내 숨통을 틀어막았는데, 나는 고작 팔꿈치만 아릴 뿐이었다.


 서울로 전학을 온 것도 내 증상 때문이었다. 환경이 바뀌면 나아질 거라는 엄마만의 민간요법에 따라 이사를 왔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아,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아빠가 고물상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올라왔다는 거였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고물상을.


 “유정이 학교 잘 다녀왔니? 첫날인데 어땠어? 애들은 다 잘해주고?”

 엄마는 얼굴이 환했다. 점심을 입에도 못 대고 온 나는 대답할 힘도 없었다.

 “네, 뭐…….”

 “다행이다. 오늘은 뭐 이상해 보이거나 그러지 않고?”

 “네, 그것도 뭐…….”

 엄마는 새로운 집터를 퍽 마음에 들어 했다. 괜한 말로 굳이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맞다, 유정아. 아빠가 혹시 말했니? 이번에 새로운 사업에 들어가신단다.”

 “네? 또 무슨 사업이요……?”

 갑자기 가슴이 조이듯 아파왔다.

 “왜, 너희 학교에서 오는 길에 청과물 가게 쭉 늘어선 데 있지? 거기가 간판이 죄다 낡았잖니. 나라에서 노후간판 지원 사업을 한다는데, 아빠가 책임자로 들어가게 됐어. 새로운 곳에 오니까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지 않니?”


 나는 구겨진 얼굴을 도저히 펼 수 없었다.

 악덕 고물상 주인이 지원 사업이라고? 말도 안 돼.


 전에 아빠가 두고 간 점심 도시락을 전해주러 간 적이 있었다. 우리 아빠는 동네 고물상 주인이었다. 아빠를 깜짝 놀라게 해 줄 생각에 발걸음이 들떴다. 고물상이 가까워오자, 오 미터 밖에까지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녀! 분명 15키로란 말이여!”

 “아니, 할머니. 저울이 12키로라 하잖아요. 제가 거짓말합니까?”

 “여기만 오면 키로 수가 적게 나와 옆 동네 고물상에서 재보고 오던 참이다! 이 사기꾼 같은 놈!”

 “참내, 그럼 옆 동네 가서 파시면 되겠네! 대체 여기까지 와서 귀찮게 구는 이유가 뭐예요?”

 “그렇게 없는 사람들 등쳐먹고 살만 허냐? 으휴!”

 난 고물상 철문 앞에서 아빠의 도시락을 등 뒤로 얼른 숨겼다. 잔뜩 화가 난 할머니는 몸집보다 큰 낡은 리어카를 끌고 나왔다. 그 뒤에선 아빠가 날 선 눈빛을 쏘아붙이고 있었다. 아빠는 할머니가 가져온 고철 덩어리를 발로 쾅 차버렸다. 고막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아, 저 눈치 빠른 할망구한테 된통 당했네. 젠장!”

 아빠가 내뱉은 거친 혼잣말이 내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아빠가 걷어찬 고철 덩어리는 옆구리가 찌그러진 채 고꾸라져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다음날 내가 매달릴 철봉이 저런 모습으로 무너져 내릴 줄이야.    

 

 난 아빠의 새 사업을 말리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딱히 내세울 대책도 없었다. 난 아직 어리고 약했다. 전학 둘째 날은 유독 발걸음이 무거웠다. 낡은 청과물 거리를 지날 땐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녹이 슨 고철 간판들이 꼭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때였다. 청과물 거리와 약간 떨어진 건너편 구멍가게에서 익숙한 얼굴이 문을 열고 나왔다. 반장 김은지였다. 주변을 몰래 살피던 은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은지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 황급히 달아났다.

 학교에 가려면 은지가 나온 구멍가게 앞을 지나야 했다. 청과물 거리보다도 허름한 과일가게였다. 안에는 할머니 한분이 과일 바구니를 옮기고 계셨다. 할머니의 동그란 눈매와 얇은 콧대에서 단번에 은지 얼굴이 떠올랐다.

 “학생, 잠깐 이리 와 봐.”

 “네?”

 “오늘 들어온 사과인데 하나 들고 가. 보아하니 아침도 안 먹고 나온 모양이네.”

 “아……. 감사합니다, 할머니.”

 가게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배고파서라고 생각하신 듯했다. 할머니가 주신 사과는 탐스럽고 윤이 났다. 세월이 갈기갈기 찢어 놓은 가게 간판과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가게는 낡았어도 과일은 싱싱하니 안심하고 먹어라. 조만간 이 동네 간판들을 예쁘게 바꿔준다더구나. 살다 보니 이렇게 감사한 날이 다 오네. 그땐 돈 걱정 말고 과일 먹으러 자주 놀러 오너라.”

 할머니는 잔뜩 기대를 하셨다. 이런 가게를 돕는 사업이라면 마음이 그나마 덜 무거울 것 같았다. 처음으로 아빠에게 작은 기대를 걸었다. 한때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다정했던 우리 아빠니까.


 어느새 전학을 온 지도 한 달이 다 되었다. 소식이 없던 간판교체 작업은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청과물 거리에 대들보가 들어섰다. 기다란 쇠 봉이 곳곳마다 서있는 탓에 뒷길로 돌아서 다녀야 했다. 뒷길에선 종종 얼굴을 가리고 달려가는 은지를 볼 수 있었다.

 “김은지.”

 “앗, 깜짝이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나도 이 길로 다닌 지 일주일은 됐어.”

 “날 어디서부터 따라온 거야?”

 “따라오다니? 그냥 가던 길을 가는 중…….”

 “이럴 줄 알았어. 그 낡아빠진 가게 보고 나니까 너도 내가 불쌍하니?”

 “무슨 말이야. 난 그런 생각한 적 없어.”

 “뻔하지. 저 가게가 우리 가게인 거 알아챈 애들은 다 그랬어. 날 안타깝게 보는 그 눈빛, 정말 지겹다니까. 안 들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은지 얼굴이 바싹 달아올랐다.

 “너희 가게가 뭐 어때서. 과일도 얼마나 싱싱한데. 그리고 이제 간판도 예쁘게 바뀔 거고, 그러면…….”

 “뭐, 간판이 바뀌어? 그놈의 간판 때문에 우리가 무슨 일을 당했는데.”

 “무슨 일이라니?”

 “번듯해질 청과물 거리에 우리 가게가 거치적거린대. 그러니까 가게 문 닫으라고 어떤 아저씨가 와서 과일 상자에 발길질을 하고…….”

 은지가 울먹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행패 부렸다는 그 아저씨가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자꾸만 불안했다. 울먹이는 은지를 차마 위로할 수 없었다. 나는 그만 뒷걸음질을 쳤다. 그대로 은지 앞에서 달아나버렸다. 나는 공사가 한창인 청과물 거리를 향해 무작정 달렸다.

 

 피-잉-


 고철이 잘려나가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현기증이 나려는 걸 애써 참았다. 은지네 가게 앞 횡단보도에 섰을 때였다. 익숙한 뒷모습이 내 걸음을 가로막았다. 옹졸한 어깨가 사납게 솟아있는 우리 아빠였다.

 “아빠.”

 “엇, 유정이 아니냐? 이 시간에 학교를 안 가고.”

 “어디 가요?”

 “저 건너편 구멍가게 말이다. 다 늙은 할머니가 어찌나 고집 있으신지. 사람들이 청과물 거리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데, 저 낡아빠진 가게가 분위기를 흐리지 뭐냐.”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아빠는 여전했다.

 “저 가게도 간판을 고쳐주면 되잖아요. 책임자라면서 그 정도도 못해줘요?”

 “예산은 어디 무한정 나오냐? 저런 가게는 지원해 봐야 별 소득도 없어. 폐업하는 게 피차 편하다.”

 “그렇다고 가게를 다 뒤엎어도 되냐고요!”

 아빠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양이가 생선을 훔치다 들키기라도 한 듯이.

 “뒤, 뒤엎다니! 아니, 근데 이 녀석이 아빠한테 눈을 똑바로 뜨고 버릇없이!”

 “아빤 정말…….”


 아빠 어깨너머로 은지네 할머니가 보였다. 뜨겁게 녹아내릴 것 같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다. 신호등에 초록불이 켜졌다. 우리 셋 중 누구도 길을 건너지 못했다. 아빠는 눈썹을 씰룩이며 나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때, 아빠 얼굴이 어딘가 이상했다. 아빠의 미간이 지저분하게 일그러졌다. 식판이 구겨졌을 때처럼 징그러웠다. 그러더니 눈과 코가 흘러내리듯 뒤틀렸다. 이번엔 입이, 그다음엔 이마와 턱까지 한 데 우그러졌다. 이내 아빠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무너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팔다리에 힘이 쭉 빠지며 땅 밑으로 푹 꺼져버릴 것 같았다.  


 ‘아빠는 고철이 아닌데……, 아닌데…….’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철봉에 깔렸을 때만큼이나 그날 일은 아주 희미했다. 찌그러진 마음을 되돌리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아빠는 여전히 간판교체 사업에 매진했고, 엄마는 나만 보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학교에 안 가는 대신 매일 아침 등굣길을 걸었다. 아빠를 대신해 은지네 할머니께 사과를 하고 싶어서였다. 용기가 안 나 번번이 실패했지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리로 향했다.


 “오늘은 이만 들어오지 그러냐.”

 할머니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보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게 안을 몰래 엿보던 나를 부르셨다.

 “알고 계셨어요……?”

 “쥐콩만 한 여자애가 매일 와서 쳐다보고 가는데 모를 리가 있어?”

 “죄송해요, 할머니.”

 “죄송은 무슨. 그러잖아도 저번에 길 건너에서 쓰러져서 걱정이 됐는데, 알아서 생존신고를 톡톡히 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지.”

 “그게 아니고요. 전에 저희 아빠가 할머니 가게에 찾아와서…….”

 할머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됐다. 네 아빠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지. 여길 꾸며 놔 봐야 사람들은 건너편 청과물 거리로만 갈 테니까. 나도 나이가 들어 괜한 고집을 부린 것 같다.”

 “아녜요, 할머니…….”

 “할머니 가게는 곧 정리할 거란다. 네 아빠 때문이 아니라 이 할미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그래. 작년만 해도 사과 한 박스는 가뿐히 들었는데, 이젠 안 쑤시는 곳이 없어.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결국 아빠 뜻대로 되어버린 걸까. 신이 있다면 왜 세상은 나쁜 사람 편만 들어주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할머니.”

 우리 아빠를 용서하지 마세요. 그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응?”

 “……사과 하나 먹어도 돼요?”

 할머니가 맑게 웃었다. 할머니는 검은 비닐봉지가 가득 걸린 철사고리에서 한 장을 툭 끊었다. 그러고는 튼실한 사과를 하나, 두울, 세엣……, 일곱 개쯤 가득 담았다.

 “할머니! 저 돈 없어요. 그렇게 많이 주시면 안 되는데…….”

 “너만 입이냐? 집에 가서 엄마아빠도 좀 드리고 해라. 얼른 가져가거라.”

 할머니가 내 손에 사과봉투를 억지로 들려주셨다. 우리 아빠가 밉지도 않으신 걸까. 어른들은 참 어렵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오냐.”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우리 집 식탁 위에 놓였다. 아빠는 얄팍한 포크로 제일 큰 조각을 콱 찍어 와작 베어 물었다.

 “이야, 이 사과 진짜 아삭하다. 아주 맛있네.”

 나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많이 드세요. 그 사과 오늘이 마지막이니까요.”

 “무슨 소리냐?”

 “할머니 가게요. 그거 할머니가 주신 사과예요.”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포크에 간신히 꽂혀있는 사과 조각만 우적우적 씹었다. 쇠로 된 포크가 눈에 띄었다. 금방이라도 포크가 찌그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포크는 말짱했다. 할머니 사과가 포크를 지켜주기라도 하는 듯이 외려 꼿꼿해 보였다.


 사과 속살처럼 하얀 해가 밝았다. 은지네 가게를 찾는 게 오늘은 조금 망설여졌다. 가게가 사라져 있을까 봐 두려워서였다.

 딩동.

 때마침 초인종이 울리며 인터폰 화면이 켜졌다. 화면에 동그란 두 눈이 끔뻑였다. 은지였다. 나는 은지를 볼 낯이 없어 현관문을 아주 조금만 열었다. 은지가 좁게 열린 문틈으로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강유정, 학교 가자.”

 “응?”

 “학교 가자고.”

 “난 안 가는데…….”

 “학교 안 가는 학생이 어디 있어? 반장으로서 교실에 빈자리 나는 건 용납 못해. 얼른 가방만 챙겨서 나와.”

 은지는 똑 부러지게 말해놓고, 손바닥에 땀이 났는지 두 손을 연신 쥐락펴락했다. 초인종 앞에서 꽤나 망설인 것 같았다. 어쩐지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나는 빈 가방에 나무젓가락 하나를 달랑 챙겨 문을 나섰다. 은지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사과를 챙겨주던 할머니처럼.


 “강유정. 나 사실 너한테 사과하려고 데리러 온 거야.”

 “나한테? 네가 왜?”

 “저번에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군 것 같아서. 미안해.”

 은지는 역시 할머니를 닮았다. 할머니는 사과를 주고, 은지는 사과를 하고.

 “아니야. 나야말로 미안.”

 “네가 왜? 혹시, 너희 아빠 때문에?”

 “…….”

 은지도 우리 아빠를 알고 있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은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아빠랑 다르잖아. 넌 우리 할머니가 아끼는 단골손님이었을 뿐이야. 나보다 백배 낫지. 난 우리 가게를 숨기기 바빴는데. 그러니까 넌 아무 잘못 없어.”

 고철은 뜨거운 용광로에 녹여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은지가 건넨 말이 내 찌그러진 심장을 용광로에 밀어 넣었다. 마음이 한없이 녹아내렸다.


 우리는 어느새 청과물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낡고 허름했던 거리가 탈바꿈을 했다. 깔끔한 간판들이 길게 늘어서있으니 꽤나 번지르르했다. 길 건너에 은지네 가게가 보였다. 빨강, 파랑 페인트가 얼룩덜룩하게 벗겨진 철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먼지가 내려앉은 철문은 여느 가게보다도 굳세고 단단해 보였다. 더 이상 찌그러지지 않을 것 같았다.

 “너 오늘은 수저 챙겼어?”

 “나무젓가락.”

 “에이, 웬 나무젓가락? 자, 선물.”

 은지가 가방 앞주머니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냈다. 펭귄 캐릭터가 박힌 어린이용 스텐 수저세트였다.

 “그거 너 써. 내가 쓰던 거긴 한데 깨끗해.”

 은지의 선물은 꼬부라지지도 않고 반짝 윤이 났다. 오늘 점심시간은 왠지 기대가 되었다. 학교로 가는 우리의 발걸음이 자꾸만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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