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잘못 아니야. 그 누구도 너를 만질 자격은 없어(1)
12시가 조금 넘은 캄캄한 밤이었어요. 공원 옆으로 난 2차선 도로는 늘 다니던 길인 대도 더 어둡게 느껴졌어요. 그 어둠이 오싹해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걸음을 서둘렀어요.
그 날은 오랜만에 팀원들과 맛있는 식사를 한 날이었어요. 늦은 시간까지 일 하느라 지쳤던 우리는,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인 곱창을 배부르게 먹었어요. 그리고는 막차 시간을 넘기지 않게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어요. 나는 소화나 시킬 겸 지하철 한 정거장 전에서 내려 집까지 걷기로 했어요. 아직 불빛이 남아있는 상가를 지나 이제 저 언덕 위의 막다른 담을 두고 코너를 돌면 공원 옆으로 난 내리막길로 접어들어요. 왼쪽으로는 불 꺼진 건물, 오른쪽으로는 공원이라 더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어요. 내가 그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갈 때였어요.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타 다다다 다다다닥.
다급한 발걸음 소리.
<범인>
나는 지금도 그 날, 당신의 발걸음 소리를 잊지 못해.
타 다다다 다다다닥.
너무 빨라 놀랄 새도 없었어.
당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 와 내 등 뒤에 붙었고
오른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지.
그리고 남은 왼 손으로 내 다리 사이를 만졌어.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을 했었어.
나. 는. 지. 금. 죽. 고. 있. 다.
성급한 왼손 탓이었을까. 당신의 오른손은 내 입을 완전히 틀어막지 못했고
입이 살짝 벌어진 틈을 타 나는 있는 힘껏 소리쳤어. 온 힘을 다했어.
그때였어.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어.
역시 다급하고 빨랐지만 그건 위협의 소리가 아니었어.
내리막길의 끝에서 나를 향해 뛰어오는 두 남자와 한 여자.
당신은 언덕 위를 향해 도망쳤어.
나를 향해 돌진할 때만큼 빠른 걸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공포의 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했어.
<나를 향해 뛰어 온 두 남자와 한 여자>
고맙습니다.
그 날 이후로 다시 본 적도 없고 다시 봐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공원을 산책하고 나오시던 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시간에 거기 있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자 혼자도 남자 혼자도 아닌 세분이 함께 계셔서 고맙습니다.
제 비명에 지나치지 않고 달려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범인을 잡으려고 뛰어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대신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갑은 있냐고 흉기는 없었냐고 다치진 않았냐고 물어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사람, 저 사람이 나를...”
다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지갑도 잘 있고 흉기도 들고 있지 않았고 몸이 다치지도 않았으니
내가 겪은 일이 별일 아닌 건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입니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저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범인을 따라간 남편 걱정에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든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있어 저도 살아있습니다.
제게 가까이 다가와 저를 위로하신 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저 언덕 위에서 이 번잡한 상황을 바라보며 리어카를 끌고 오는 할아버지요.
<종이 줍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을 놓고 있는 나를 다짜고짜 안으셨죠.
그래요, 분명 위로의 몸짓이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몸을 피하며 나를 끌어안는 당신을 밀어냈어요.
그 순간은 어떤 남자도 안전하지 않게 느껴졌거든요.
그리고 평소에도 생판 처음 보는 낯선 어른과 포옹하지는 않으니까요.
내가 당신을 밀어냈을 때, 그때 멈춰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당신은 울지 말라며 다시 한번 나를 더 꽉 끌어안았어요.
나는 울고 있지도 않았고, 당신 팔에서는 완력이 느껴졌고 불쾌했습니다.
억지로 나를 안으려 드는 당신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건 경찰이 도착했을 때였어요.
당신은 그들에게 말했죠.
“웬 남자가 아가씨를 따라 가는데 느낌이 영 이상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뒤따라 와 본거야. “
이렇게 따라와 주시고 살펴주시니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디서부터 보고 계셨어요?
이 긴 거리에서.
<경찰>
“술 냄새가 나던가요? 아닌가요?
음주 여부에 따라 도망칠 때 행동반경 범위가 달라지거든요.”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술을 마신 것 같아요.
“인상착의는요? 머리가 짧았나요? 체격은요? 키는요?”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어두운 색 티에 청바지, 짧은 머리, 보통 체격, 175-6cm쯤이요.
“찾아보실 건가요? 아니면 귀가하시겠어요?”
찾아야죠. 잡아야죠. 당연히.
아저씨.
누가 달려와 뒤에서 입을 틀어막고 몸을 만지면요.
술 냄새도 인상착의도 아무것도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아요.
내가 어리석고 경황이 없어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 구요,
나한테는 죽어가는 시간이 었다고요.
찾아볼 거냐 구요? 당연하죠.
도대체 왜 이 일이 아무 일도 아닌 거죠?
그래도 다행히 이예요.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냐고, 왜 이런 옷을 입었느냐고,
설마 술도 안 마신 남자가 여자를 뒤따라와 만지고 달아나겠냐고 하지 않아 주어서.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사건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나보다
더 바보 같지만.
그리고 물론 그런 질문은 곧 다른 사람이 해주었지요.
범인을 찾겠다는 내 고집을 못 이겨 억지로 경찰차를 같이 타 준 내 동생.
<동생>
내 전화받고 많이 놀랐지?
걸어도 십 분인 거리를 택시 타고 달려오는 너를 보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어.
너는 놀란 것 같았고, 화도 난 것 같았고, 나를 보고는 안심한 것 같기도 했어.
길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집어 들고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나를 보고 말했지.
“아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있어? 왜 이런 옷을 입고 있어? 도대체 왜?”
화났다면 미안해. 나는 그냥...
배가 너무 불렀어. 소화시킬 겸 좀 걷고 싶었어. 그러니까 그냥 산책 같은 거였어.
그걸 지금 하고 싶었고 이 거리를 택했어. 나 원피스 좋아해서 원래 자주 입잖아.
또 무얼 더 말해야 하나.
보다시피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라고?
초가을 밤도 나한테는 한기가 있어 카디건도 걸쳤다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밤길을 걷진 않았다고?
나는 보통 일이 열 시 넘어 끝나니까 막차 타고 오는 게 흔한 일이라고?
또 무얼 더 말해야 하나.
아랫도리를 만지긴 했지만 옷 위로 더듬었을 뿐이라고?
3초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고?
그래도. 성폭행은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범인을 찾겠다고 경찰차를 탈 때 마지막 한마디를 했지.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마. 창피한 일이니까.”
<평범한 남자>
경찰차를 타고 공원 근처 골목길을 구석구석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당신을 본 겁니다.
당신은 어느 집 앞 계단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경찰차가 당신 앞에 섰습니다.
창문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고개를 들었습니다.
짧은 머리, 보통 체격, 어두운 색 반팔 티.
너무 흔한 인상착의.
그때 깨달았습니다.
절대로 범인을 잡을 수 없다는 걸.
범인의 인상착의는 평범했고, 나는 범인의 얼굴을 정확히 보지 못했고,
범인은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았고,
나는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글/그림 : 두시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