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갚을 수 없는 마음의 빚

by 별똥꽃

누군가와 처음으로 서로를 사랑했던 추억은 소중하기 때문에 첫사랑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특별 것이다. 미애에게도 현구와 함께 했던 시절이 특별하고 소중했다. 미애가 현구와 이별한 지는 벌써 스무 해도 더 지났고, 지난번 미애가 현구의 누나네 옷가게로 찾아간 지도 이미 몇 해가 지났다. 미애는 현미를 만나고 난 이후 현구를 찾으려고 나름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결국 현구를 찾지는 못했다.


미애와 현구가 이별한 후 사실 먼저 미애를 찾아온 쪽은 현구였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미애가 결혼을 하고 난 후였다. 꽃을 안고 찾아온 현구에게 미애의 엄마는 미애가 이미 결혼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고 이제 미애를 그만 잊어버리라고 했었다. 나중에 그 소식을 자신의 엄마에게 전해 들은 미애의 마음 또한 편하지는 않았다.


매애는 몇 해 후 어느 봄날 다시 현구의 누나가 살고 있는 도시로 갔다. 현구의 누나는 그 도시의 시장에서 미애와 현구가 사귀기 이전부터 옷가게를 하고 있었다. 미애는 토요일 늦은 오후에 친구와 함께 현미의 옷가게에 들렀다. 가게 종업원이 미애에게 말을 걸었다. 옷에 딱히 관심이 없었던 미애는 가게 종업원이 권하는 정장 재킷을 입어 보고 그 옷을 사기로 했다. 하필 그날 친구 집에 배터리 충전한다고 지갑 대신 갖고 다니는 전화기마저 두고 온 상황이라 결국 옷값은 미애의 친구가 대신 내줘야 했다. 미애는 산 옷과 가게 주인의 명함을 받아 들고 옷가게를 나섰다. 늦은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애는 옷가게 명함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현구와 아직 끝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지만 이미 둘 다 결혼을 한 지금 이 시점에서 현구의 안부를 현미에게 다시 묻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애는 열차 밖으로 나와 문 옆에 기대어 서서 현구의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한 대로 너무도 어색한 대화였다. 그다음 날 미애는 현구의 누나에게 자신의 심정을 적은 문자를 보냈다. 왜 자신이 현구를 찾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일주일 후에 미애는 현구의 누나를 만나기로 했다. 현미는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와서 기차역 근처의 주유소 앞에 차를 세우고 멀리서 오는 미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애가 기차역을 나와 약속 장소로 향하던 길에 건널목 신호등 앞에서 예전에 현구가 즐겨 입었던 남색 야구 잠바를 입은 키 작은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를 길러 묶은 것이 예전의 현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순간 미애는 '현구의 누나가 몰래 둘의 만남을 준비했나'라고 생각했지만 건널목 신호등이 바뀌자 그 남자는 황급히 길을 건너가 버렸다. 미애는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애가 현미의 차에 탄 후 둘은 어색한 악수를 나누고 도시 외곽에 있는 식당으로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었다. 미애와 현미는 마주 보고 앉아서 아까 식당으로 오기 전 차 안에서의 오랜 침묵보다도 더 불편한 식사를 마쳤다. 그다음에 미애와 현미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으로 장소를 옮겨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곳에서 현미는 예전에 현구가 어떻게 수학 천재가 되었으며 그녀의 아버지가 당신의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현구도 아버지처럼 아내를 참 사랑한다고 했다. 미애가 어렵게 예전의 일을 꺼내자 현미는 미애에게 잊을 수 없는 일을 상기시켰다. 부모님을 모두 잃은 지 얼마 안 된 현구가 부모님이 남기신 그의 전재산 오백만 원을 그 해 자신의 국립대 입학금과 미애의 사립대 입학금을 낸다고 다 쓴 것이었다. 그 일을 미애가 어찌 잊겠는가? 그것을 상기시키는 현미의 어투에서 미애는 약간의 경멸과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현구의 누나와 헤어지기 전에 미애는 말했다. 현구에게 갑자기 나타나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예전에 너무 고마웠고, 살면서 때때로 현구의 안부가 궁금했다고, 그냥 잊어버리라고 전해 달라고 했다. 현구의 누나는 남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고 특히 첫사랑은 위험할 수 있어서 조심스럽다고 대답했다.


다음날 미애는 현구의 누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예전에 그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고 했다. 그날 밤 미애는 현구의 누나에게서 은행 계좌 번호를 문자로 받았고 즉시 현구의 누나에게 송금을 했다. 그랬더니 현구의 누나를 만난 이후 미애에게 계속 있었던 명치끝의 통증은 조금 약해졌다. 다음날 미애는 현구의 누나가 보낸 문자 한 통을 읽었다. 현구가 돈을 돌려보내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육백만 원은 하루도 채 못 되어 되돌아왔다. 현구가 나중에 미애에게 연락한다고 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현구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부인을 사랑하는 현구가 부인의 허락 없이 연락을 해 오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꼭꼭 숨겨 왔던 첫사랑 이야기를 부인에게 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반면 미애는 송금하기 전에 자신의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고 이해심이 많은 미애의 남편은 그걸 문제 삼지 않았다. 아마도 앞으로 십 년 후에는 미애의 연락처가 바뀔 수도 있다고 미애는 생각했다. 또한 앞으로 이십 년 후에는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미애는 죽기 전에 현구를 한번 만나서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때 왜 그들이 헤어졌으며 이별 후 오 년 동안이나 그는 왜 한 번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는가를.


현구를 찾겠다는 미애의 무모한 도전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미애는 마음의 빚을 갚지도 못했고 현구를 만나 속 시원한 대답도 듣지 못했다.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미애의 첫사랑 찾기는 아주 오래전 그녀와 현구가 버스 안에 싣고 가던 수박의 최후와도 같았다. 그때 둘은 현구의 둘째 누나를 문병 가는 길이었다. 버스 바닥에 놓여 있던 수박이 버스가 정차하면서 운전석 가까이에 있던 버스 앞문으로 데굴데굴 굴러가서 버스 문이 열리자 바닥에 떨어져 "퍽" 하고 터져 버렸다. 그때 그 수박을 보고 황당하고 허무했던 심정을 생각하면 미애는 어쩐지 웃음이 났다. 미애는 훗날 자신의 무모한 첫사랑 찾기를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웃을 수 있길 바랬다.


이전 03화제3화 첫사랑의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