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첫사랑의 그림자

by 별똥꽃

현구가 연말 보고서 작성을 마치고 부사장님께 보고서를 제출한 다음 누나에게 다시 전화를 했을 때는 오후 다섯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전화기에서 누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현구는 "누나, 미애가 진짜 왔다 갔어? 언제쯤?" 현구의 누나는 약간 성가시다는 듯 대답했다: "아까 점심 먹기 전이었으니까 아마 두 시 못 돼서였을 거야. 너 어떻게 지내냐고 묻길래 그냥 대기업 다니고 늦게 결혼해서 아들 하나 두었다고 했어. 자기는 애 둘이고 남편 따라 한국에 잠시 나왔다고 하더라." 현구는 다시 물었다: "그리고 다른 말은 없었어?" 이번에도 현구의 누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응... 그러고 그냥 가던데... 걔는 왜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한대니?" 현구는 다시 누나에게 말했다. "미애 생김새는 여전해? 아님 많이 변했어?" 현구의 누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 야~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처음엔 전혀 못 알아보겠더라. 자세히 보니까 옛 모습이 조금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도 긴 생머리에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더라. 살이 약간 찐 것 같기도 하고. 걔도 이제 나이가 있잖아." 현구는 "그래, 누나! 알려줘서 고마워. 내일 올라 갈게"라며 전화를 끊었다.


연말이라 다른 직원들은 모두 서둘러 퇴근을 했지만 현구는 텅 빈 사무실에 혼자 앉아 떨리는 마음으로 추억에 잠겼다. 미애와 손잡고 거닐던 거리와 함께 떠났던 동해 바다와 같이 했던 시간들이 마치 어제 인양 떠올랐다. 그 시절 예쁘고 날씬했던 미애는 현구에게 마치 인형처럼 느껴졌었다. 그 당시 미애는 단순하고 엉뚱해서 지나치게 논리적인 현구에게는 항상 흥미로운 존재였다. 현구는 대학 시절 과외로 번 돈으로 미애에게 선물도 사주고 용돈도 주곤 했었다. 미애가 너무 가난하지만 않았어도 누나들이 그토록 반대하지 않았을 텐데. 그 당시 양부모 모두 여위고 자립해서 일류대를 다니고 있던 현구도 미애까지 도와줄 형편은 못 되었다. 그러다 결국 둘은 헤어졌고 미애가 대학 졸업을 했을 무렵 현구가 그녀의 안부를 물으러 용기를 내어 그녀의 엄마 집으로 갔을 때 미애는 이미 결혼하고 난 후였다. 맨 처음 미애가 누나의 가게로 찾아왔었다는 소식을 듣고 설레었던 현구의 마음은 어느새 미애의 결혼 소식을 들은 후 가슴 아팠던 그때의 심정으로 바뀌었다.


연말이라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자신을 꼭 빼닮은 아들을 생각하며 현구는 사무실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텅 빈 주차장에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있었다. 미애를 생각하고 있는 동안 현구는 아내와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도착하면 더 밝게 웃고 더 반갑게 가족에게 인사하리라 생각했다. 어느덧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한 현구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했다. 현재와 과거가 뒤엉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현구는 아직 과거에 머물고 있는 자신의 등을 누군가에게 떠밀리 듯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황급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는 7층에서 현구를 토해낸 후 기다렸다는 듯 문을 닫았다. 현구는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현구의 아내가 나와서, "자기야, 왜 그러고 서 있어? 키는 어쩌고?"라고 물었다. 현구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자신이 카드키로 문을 열 수 있다는 걸 깜빡 잊어버렸다. "어, 자기 일 분이라도 더 빨리 보려고 그랬지."라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아파트에 들어서자 아들이 달려와 "아빠!" 하며 안겼다. 눈이 부리부리한 아들을 볼 때마다 현구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현재의 자신이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음씨 착한 아내가 정성스레 차려준 저녁을 먹고 현구는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운전해서 누나네 가족들 만나러 가려면 일찍 자 둬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타월로 물기를 다 닦은 후 잠옷으로 갈아 입고 현구는 아내에게 물었다. "내일 떠날 채비 다 했어?" 아내가 대답했다. "응... 낮에 아들 유치원에 보내 놓고 간단히 했어." 현구는 아내에게 말했다: "연말이라 그런지 더 피곤하다. 일찍 자야겠어!"


현구는 다음날 일찍 일어났다. 사실 오늘 같은 연휴에는 조금 늦잠을 자도 점심시간 전에는 누나가 살고 있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을 터이지만 현구는 여느 때처럼 여섯 시에 일어나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지난밤 꿈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꿈에서 미애를 본 것 같은데 예전에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모습은 아니었고 미애를 처음 만났던 도시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지나친 것 같았다. 현구는 아내가 차려준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누나네 집으로 향하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하는 내내 '어쩌면 미애가 한 번 더 누나 옷가게에 찾아와 주지 않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해 보았다. '누나에게 내 연락처를 주라고 할까?'와 '아내한테 들키면 큰 일 날 텐데?'라는 생각이 쉴 새 없이 교차했다. 현구의 차는 어느새 군데군데 새 건물들이 들어 선 예전 미애와 다녔던 익숙한 거리를 지나서 누나의 집에 도착했다.


누나의 가족들과 함께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점심을 먹고 현구는 누나와 단 둘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았다. 아내가 설거지하고 조카들이 아들과 놀아주는 틈을 타서 현구는 누나에게 밖으로 나오라는 눈짓을 했다. "누나, 진짜 그냥 그러고 보냈어? 내 연락처라도 주지 그랬어?" 그러자 누나는 현구의 등짝을 후려치며 말했다. "정신 차려 이 놈아! 네 나이 마흔이 넘었어. 그러다 괜히 이혼당할라. 아들 생각하면서 마음을 잘 다스려." 그러고 현구의 누나는 휑하니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현구는 그런 누나가 너무 야속해서 괜스레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하루만 더 빨리 왔어도 미애를 만나지 않았을까라는 자책도 해 보고 새해 첫날부터 이런 망상에 빠진 자신이 너무 한심하기도 했다. 현구는 결혼 전에 끊은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바람이 너무 차서 다시 집안으로 들어 서니 설거지를 마친 아내가 현구를 쳐다보며 물었다: "추운데 밖에서 뭐 했어? 고민거리라도 생겼어?" 현구는 아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바람 좀 쐬려고..." 매형이랑 조카랑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이윽고 겨울 해가 하늘에 검붉게 흩어질 때에 현구의 가족들은 다시 집으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가족들이 차에 타려고 하는 순간 현구의 누나가 커피 한 박스를 들고 와서 말했다: "어제 아는 사람이 가게에 찾아와서 연말 선물이라며 주더라. 우리 집에는 커피 많으니까 가져다가 마셔." 그제야 현구는 그게 미애가 가져온 커피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누나에게 말했다: "고마워, 누나! 사무실에 가져가서 직원들하고 나눠 마시면 되겠다." 하지만 사실 현구는 그 커피를 누구하고 나눠 마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첫사랑 미애의 향기와 그리움이 담긴 그 커피를 혼자서 오래오래 마시고 싶었다. 커피 박스를 받아 들고 현구는 다시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유난히 밝은 현구의 표정에 그의 아내는 '이 사람이 커피를 이렇게 좋아했나?'라고 생각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현구의 누나와 가족들은 점점 멀어져 가는 현구의 차를 향해 손을 저으며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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