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2015년 12월 31일

by 별똥꽃

미애는 직장에서 이 주간의 휴가를 받았지만 대학원 과제를 하느라 하루 종일 바쁘게 보냈다. 마침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미애의 남편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받고 집에 와 있는 중이었다. 미애의 남편은 일, 대학원 공부, 자녀 교육, 그리고 살림에 지친 미애를 달래기 위해 아이들과 잘 놀아 주고 집안일도 하고 미애가 공부하는 동안 어디를 가자거나 뭘 먹고 싶다거나 따위로 미애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휴가가 다 끝나 갈 무렵 미애는 휴가 기간마저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삶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날 아침 미애는 남편에게 예전에 그녀가 살던 곳으로 가 보고 싶다고 했고 그렇게 미애와 남편은 가족 여행을 나섰다. 미애는 이제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그녀의 예전 집과 교복 입고 다녔던 자그마한 중고등학교에 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몇 해 전 미망인이 된 새언니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조카들도 만나 보고 싶었다. 어쩌면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어설펐던 첫사랑의 소식이 궁금했을지도 모르겠다.


KTX 기차표를 끊고 미애의 가족은 어느새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도시에 도착했다. 그 도시는 지금 미애가 살고 있는 도시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곳이다. 밖에서 본 미애의 옛날 집은 새 주인이 손 본 탓에 더 아담하고 깔끔하게 변해 있었다. 굳게 닫힌 대문을 지나 담 너머로 까치발을 하고 집안을 들여다보니 마당이 너무 좁아 보였다. 미애는 생각했다: '마당이 거의 없네. 이렇게 좁았어?!' 예전에 살던 집을 구경하고 죽은 오빠의 가족과의 저녁식사 시간보다 약간 일찍 도착한 미애의 가족은 호텔에 가서 먼저 짐을 풀었다. 그리고 미애의 가족은 저녁식사에 같이 오기로 한 남동생을 만나러 갈빗집으로 갔다.


갈빗집 앞에서 남동생과 죽은 오빠네 가족이 모두 도착한 후 일행은 식당으로 들어섰다. 미애의 가족이 네 명, 이제 죽은 오빠의 유가족이 세 명 그리고 남동생 한 명 그래서 모두 여덟 명인데 미애는 식당에 들어올 때도 아홉 명이라고 하고 밥도 아홉 그릇을 주문했다. 미애는 무의식 중에 착각을 일으켰나 보다. 미애는 소고기를 싫어하는 남편을 위해 닭고기와 돼지갈비를 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소갈비를 시켰다. 미애는 오랜만에 조카들을 실컷 먹이기 위해 고깃집을 오긴 했지만 무조건 고기를 더 많이 팔려고만 하는 식당의 분위기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식비 이십삼만 원을 미애의 남편이 계산하고 나올 때 식당 주인은 "감사합니다" 또는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식당에서 겨우 한 시간을 같이 보내고 헤어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미애의 남편이 다 같이 커피숍에 가자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미애의 일행은 갈빗집에서 가까운 커피숍으로 향했다. 커피를 안 마시는 미애는 혼자 유자차를 주문했다. 일행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도 종종 어색한 침묵에 휩싸이곤 했다. 오랜만에 본 조카들에게 미애는 용돈을 쥐어 주었고 일행은 커피숍에서 나와 작별을 했다. 미애와 남편은 호텔비, 남동생 기름값, 갈빗집 식비, 커피값, 조카들 용돈으로 두 시간 만에 무려 육십오만 원을 썼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사치하지 않는 미애는 순식간에 써 버린 큰 액수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미애의 가족은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 호텔에는 더블 침대 하나와 싱글 침대 하나가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미애의 네 식구가 모두 자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성별이 다른 아이들을 한 침대에 재우려면 부부는 큰 침대를 포기해야 됐다. 그렇다고 부부가 떨어져 잘 수도 없으니 미애의 남편은 미애에게 싱글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 우겼다. 그날 밤 부부는 싱글 침대에서 꼭 부둥켜안고 잤다. 그래야만 싱글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밥 먹고 나올 때부터 오던 비가 밤새 내렸다. 하지만 오랜만에 일찍 잔 탓에 미애는 이른 새벽에 잠이 깨고 말았다. 미애는 좁은 침대에 누워 한참 동안 스마트폰을 하다가 결국 가족들을 깨웠다. 샤워를 마치고 딸을 데리고 먼저 나온 미애는 그 도시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쇼핑센터에 갔다. 좌우로 길게 마주 보고 있는 상가들 사이에 큰 길이 나 있었고 그 길 중간중간에 털모자를 파는 간이 상점이 보였다. 미애는 감기 때문에 콜록거리는 딸에게 모자를 사 주러 갔다가 자기 것도 하나 골랐다. 조금이라도 깎아 보려고 했더니 모자 상점 주인은 두 모자의 가격이 다른 척했다. 살림꾼이 못 되는 미애는 점심을 먹고 난 후 딸이 고른 신발을 살 때도 한 푼 깎기는커녕 두 배를 치렀다. 장사꾼들의 눈에는 미애가 어수룩하게 보일 뿐이었다.


미애는 가족을 데리고 쇼핑센터를 지나 지하도를 건너서 재래시장 근처 한 옷가게에서 걸음을 멈추고 옷가게 상호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 옷가게 상호에는 가게 주인의 이름 석자가 자랑스럽게 적혀 있었다. 그곳에서 약속이나 한 듯 남편에게 길 건너 빵집에서 아이들과 같이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삼십 분 후에 만나자고 했다. 항상 아무런 불평 없이 미애를 응원해 주는 남편이지만 이번에는 삼십 분이 지나도록 미애가 돌아오지 않으면 걱정스러울 거라고 못을 박았다. 남편을 보내고 미애는 큰 숨을 내쉬고 뭔가 계획이라도 생겼다는 듯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미애는 길 건너편 슈퍼에 들어가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미애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다지 싱싱해 보이지 않는 한라봉과 귤 박스들뿐이었다. 뒤쪽으로 가 보니 <술술 잘 풀리세요>라는 문구가 포장지에 적힌 두루마리 휴지가 미애의 눈에 띄었다. 미애가 그 옷가게에 마지막으로 간 것은 아마 이십 년 전쯤이었으므로 그 사이 업그레이드된 옷가게 방문에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애는 두툼한 두루 마리 휴지와 계산대 옆에 진열된 커피 한 상자를 사 들고 다시 길을 건너 옷가게로 향했다.


미애는 옷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대뜸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라고 물었다. 옷가게 주인은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하며 기억을 해내려는 표정을 역력히 지었다. 미애는 털모자를 벗어 얼굴을 더 자세히 보여 주며 "예전에 현구 오빠랑 알고 지냈던..."이라며 말 끝을 흐렸다. 그제야 가게 주인은 뭔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아아..." 옅은 감탄사를 내뱉더니 "잠시 커피라도 한 잔 할래요?"라고 물었다. 미애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괜찮으시면 커피 대신 녹차 한 잔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미애나 현구의 소식에 대해 너무 자세하게 묻거나 대답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며 얘기를 나눴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나눈 짧은 대화로 미애는 현구의 근황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것만 알게 되었다. 현구의 누나가 자신에 대해 물어보는 질문에도 미애는 기본적인 것만 대답했다. 일찍 결혼해서 아이가 둘 있으며 남편과 같이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고 있다고. 때마침 옷을 사러 온 손님이 있어 짧은 대화를 마치고 마시던 녹차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감사하다고 말한 후에 미애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미애는 서둘러 길을 건너면서 '달려오는 차에 몸을 부딪히는 그런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을 당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빵집에 들어섰다.


미애는 서둘러 남편에게 달려가 옷가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고 난 후에도 정말 자신이 그곳에 갔다 왔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상한 남편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심하게 고동쳤다. 그리고 현구 누나의 한 마디가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어리고 가난했던 시절의 첫사랑>이라는 그 말. 현구 누나의 옷가게를 방문한 후 전철에서 일반 기차로 갈아타고 마지막으로 KTX 입석표를 겨우 구한 후 미애의 가족은 집으로 돌아왔다. 2015년의 마지막 날이라 입석표까지 거의 매진이었다. 미애의 가족은 기차 속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텨낸 후 택시 정류장에서 또 한참을 기다렸다가 겨우 택시를 잡아 타고 집에 도착했다. 미애와 남편은 안방 침실의 확 트인 창 밖으로 도시의 야경을 보았다. 미애가 사는 도시는 크고 화려했다. 긴 여정을 마친 후 성벽을 바라보며 만족해하는 길가메시처럼 넓은 도시를 보며 흐뭇해하는 자신의 모습에 미애는 피식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