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삼십 년 동안 그 도시의 재래시장 옆에서 옷 가게를 하고 있는 현미는 오십 대 중반이다. 현미는 작고 아담한 몸매에 예쁘장한 얼굴로 옷가게와 잘 어울리는 외모를 가졌다. 두 살 연하인 현미의 남편은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린다. 한 삼십 년 전 현미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현미의 언니들은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 후 현미가 옷가게 일에 매진할 때도 현미의 두 언니는 경제적으로 자신들보다 나은 생활을 하는 동생이 마땅치 않았다. 현미가 둘째를 낳았을 때도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언니들은 미역국을 끓여 주기는 커녕 병원에 조차 오지 않았다. 현미에게는 두 언니들 말고도 한 참 나이 어린 남동생이 하나 있다. 현미의 남동생은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 몇 번의 연애 실패와 장기간의 솔로 생활 끝에 현미의 남동생은 팔 년 전 드디어 결혼했고 외동아들을 두었다.
현미는 여느 때처럼 일찍 가게 문을 열고 밖에 진열할 옷들을 준비하느라 아침 내내 바빴다. 가게 청소를 마치고 최근 새로 들여온 옷 가지들을 정리하고 있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좀 지난 오후였다. 매해 마지막 날이 늘 그렇듯 인생의 무상함이 밀려들고 있었다. 밖에서 몇 번 옷을 보거나 가게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가게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손님은 오늘따라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젯밤 내린 비 때문에 날씨가 더 추워진 탓도 있었다. 현미는 오늘 같은 날 그냥 집에서 쉬고 싶다가도 경제력 없는 장애인 남편과 아직 대학을 다니고 있는 두 아이들을 생각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늘도 가게에 나왔다.
현미가 실내 난방기 옆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을 때 두 손에 두루마리 휴지 한 박스와 커피 한 박스를 든 나이를 쉽게 짐작할 수 없는 한 여자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여자는 현미에게로 성큼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내려놓으며 "안녕하세요!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라고 물었다. 가끔 이상한 손님들이 오곤 하지만 이번에는 통 알 수가 없었다. 현미는 여자를 알아보기 위해 그녀가 털모자를 벗었을 때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본 후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며 "아니요.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그 낯선 여자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와 상기된 얼굴로 " 저어~ 예전에 현구 오빠와 알고 지냈던..."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현미는 너무 당황했다. 늦게 결혼한 동생 현구와 현구 가족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쳤다. 현미는 "아~ 네에..."라고 대답한 후에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를 잠시 망설였고 곧이어, "커피라도 한 잔 할래요?"라고 물었다. 미애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하지만 괜찮으시면 녹차 한 잔 할게요."라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미애의 방문에 아직도 어리둥절한 현미는 말을 높일지 놓을지 망설이고 있을 때 미애는 거리낌 없이 실내 난방기 옆 등받이 없는 의자를 빼고 앉았다. 현미는 종이컵에 담긴 녹차를 건네주며 미애에게 어렵게 한 마디 꺼냈다: "어리고 가난한 시절의 첫사랑이라~" 그러자 애써 태연한 척하던 미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현구 오빠 어떻게 지내요?" 미애는 더 조심스럽게 대기업에서 일하던 현구가 미국에서 파견 근무를 마치고 최근에 귀국해서 지방에 내려가 있고, 늦게 결혼해서 아직 학교에 안 들어간 아들이 하나 있다고 전했다. 현미는 대학 졸업 후에 일찍 결혼해서 외국에 가서 산다고 들어 알고 있는 미애가 '이십 년 후에 불쑥 나타난 저의가 무엇일까' 혼자 궁금해하면서 미애에게 남편의 직업과 아이들의 나이 등을 물었다. 현미가 미애 가족이 지금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을 때 미애는 잠시 한국에 나와 있다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그때 마침 손님이 들어와서 만 원짜리 목티를 하나 산다길래 현미가 계산대에서 돈을 받고 다시 실내 난방기 쪽으로 돌아봤더니 눈치 빠른 미애는 마시던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감사합니다"라는 어색한 인사를 남기고 황급히 나갔다.
미애의 뒷모습이 가게에서 사라진 후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현미의 남편이 늦은 점심을 들고 절뚝거리며 가게 안에 들어섰다. 현미의 남편은 아내의 안색을 살피더니 "사장님 오늘 컨티션이 별로네. 무슨 일 있어?"라고 물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현미는 옆에 놓인 두루마리 휴지와 커피 상자를 가리키며 방금 남동생 현구의 첫사랑이 왔다 갔다고 말했다. 남편이 나름 힘들게 차려온 점심을 먹으면서도 현미는 줄곧 내일 가족들을 데리고 지방에서 올라 올 '남동생에게 이걸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느라 밥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마침내 현미는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동생한테 말해, 말어?" 그러자 현미의 남편이 말했다: "벌써 이십 년 전에 헤어진 사람이고 둘 다 가정이 있는데 무슨 큰 일이야 있겠어?" 현미의 남편은 빈그릇을 모아 들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내일 찾아올 현구 가족들을 맞이 하기 위해 집 청소도 하고 장도 보기 위해서였다.
남편이 가게를 나선 후 현미는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기 너머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누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현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 내일 가족들 데리고 올라 올 거지?" 그러자 동생이 대답했다. "응... 늦어도 점심 전에는 도착할 것 같아." 현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방금 미애가 와서 네 소식 묻고 갔어." 동생이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진짜?" 현미는 말을 계속했다: "응. 결혼해서 자식 낳고 잘 살고 있나 보더라." 현미의 남동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내가 이따 다시 전화할 테니까 빠뜨리지 말고 자세히 말해줘." 현미는 "그래~"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사실은 "미안해~"라고 말하고 싶었다. 동생의 오랜 방황을 줄곧 지켜보았고 이십 년이 지난 후에 찾아온 동생의 첫사랑을 보며 '누나들이 그리 반대만 안 했어도 둘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라는 죄책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리고 현미는 남편을 만나기 전 서울에서 잠시 알고 지냈던 혁이 오빠가 떠올랐다. 혁이가 군 복무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현미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못 기다린다고 했었다. 현미는 '어차피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새로 들어온 옷 가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