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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Dec 18. 2019

평일 저녁 야한 연극

총 여섯 편의 연극을 패키지로 구매하고 같이 갈 사람을 찾고 있던 중에 특히 네 번째 연극 때문에 애를 먹었다. 직장 동료 중에 한국 부인을 둔 사람이 있어서, 혹시 부인이 연극을 좋아하는지 동료에게 물어봤었다. 그런데 그 동료는 부인에게 물어봤는지 안 봤는지 냉큼 한다는 말이 부인은 그런데 관심이 없고 대신 본인이 가고 싶단다. 나야 남편이 바다 건너 있고, 게다가 남편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는 편이라 별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유부남이 아내 허락도 없이 다른 유부녀와 같이 연극을 보러 간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래서 이 난국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결국 지난번 같이 연극을 봤던 다른 동료에게 티켓을 주고 유부남 동료와 같이 보러 가라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유부남 동료가 부인이 아프다며 못 간다고 했단다. 그래서 지난번 같이 연극을 봤던 동료와 나는 평일 저녁에 같이 제목이 야한 연극을 보러 갔다. 연극을 보기 전에 커피숍에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나와서 지난번처럼 소극장 안 맨 뒤에 자리를 잡았다.


연극 시작 전에 인사말 하는 사람이 나와서  먼저 <스트립티즈>라는 제목 때문에 스트립 쇼를 기대하시는 분께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낯선 곳에 납치를 당한 여자 두 명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아니면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하는지 열띤 논쟁을 하는 중에, 어떤 <손>이 나타나서 처음에는 그녀들의 신발과 벨트 그리고 나중에는 그녀들이 입고 있던 블라우스와 바지를 빼앗아 간다. 결국 그녀들의 얼굴은 봉지로 가려지고 어딘가로 불려 가면서 연극은 막을 내린다.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 후 봉지를 뒤집어쓴 채로 춤을 추는 것이 그녀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연극은 일찍 끝났고 동료와 소극장을 나오면서 그가 연극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물어보았다. 외국인이 배우들의 동작과 감정 표현 그리고 알고 있는 단어들만으로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을 되짚어 주었다. 그리고 전에 같이 본 연극과 이번 연극을 비교도 해 보았다. 나는  연극을 보면서 갇혀 있던 그녀들의 모습이 꼭 내 모습 같다고 느꼈다고 동료에게 말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시공 속에 갇혀 어떤 힘 (또는 손)에 의해 지배당하는 약한 개개인의 모습. 때론 그 힘에 대항을 하기도 하고, 순종하기도 하고, 용서를 빌기도 하고 아첨도 해 보지만 결국 그 힘의 변덕에 이끌려다니는 나약한 존재.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은 맨 마지막주인공들이 얼굴에 봉지를 뒤집어쓴 채, 내복 바람으로 춤을 추던 모습이다. 마치 나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춤을 추라는 신의 계시 같았다.


연극 여섯 편 중에한 편을 못 보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운명은 나의 편이 되어 주었다. 제목 때문에 너무 야할 거라 생각했는데, 비교적 건전해서 더 좋았다. 그리고 연극을 보며 <>를 성찰할 수 있어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불혹의 나이가 되고도 나는 아직 내가 있는 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은지 아니면 가만히 있고 싶은지 모르겠다. 내가 있는 곳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 조차도 분별할 수 없다. 하지만 나를 지배하는 <>이 돈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돈으로 세금을 내고, 돈으로 아이들 공부를 시키고, 돈으로 은행 융자를 갚고, 돈으로 나이 들어 연명을 할 것이기 때문에 지배당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다시 자급자족이나 물물교환에 의존하는 시대로 돌아가지 않는 한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돈의 지배를 당할 것이다. 다른 동시대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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