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똥꽃 Dec 25. 2019

2019년 크리스마스

12월 23일 저녁 9시 15분 현관에서 짐 가방 끄는 소가 났다. 문을 열었더니 종일 기다리던 남편과 아들의 얼굴이 보였다. 피곤에 지친 모습이지만 그래도 반가움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짐가방은 거실 구석에 던져 놓고 두 사람이 샤워를 마친 후에 가족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새벽 다섯 시남편과 나는 일찍 일어났다. 나는 평소대로 아침 운동을 했다. 훌라후프를 마치고 유튜브를 보며 다리 운동을 따라 하는데 남편에게 같이 자고 했더니 정말 따라 하는 것이다. 남편의 이런 다정함이 좋다. 빨래와 설거지를 마친 후 우리 가족은 우체국에서 소포를 찾고 장을 보러 밖에 나갔다. 아들이 아직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유일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짧 인사를 나눈 후 오후에 있는 로비 음악회에 가기 위해 우리 가족은 다시 집으로 왔다.


사실 로비 음악회에 대한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 예상외로 보컬리스트와 재즈 연주가들은 모두 실력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 나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은 피아니스트였다. 콧대가 오뚝한 옆모습과 화려한 손놀림이 하루 종일 같은 자리에 앉아 보고 있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옆에 앉아서 관람하던 남편이 넋 나간 듯 피아니스트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위해 피아니스트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나를 이해하는 남편은 좀처럼 질를 내지 않는다. 전에 내가 <EXO>에 빠져 있을 때는 EXO의 티셔츠, 재킷, 팔찌 등을 사서 부쳐주기도 했었다. 남편의 이런 자상함과 이해심도 참 좋다.


로비 음악회가 끝나고 동네 식당에 들러서 저녁을 먹었다. 온 가족이 식당에 마지막으로 같이 간 것은 일 년 반 정도 전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남편과 나는 또 골목 연극제의 마지막 연극을 보러 나갔다. <뿔>이라는 연극으로 다른 도시에서 연극제에 초대연극팀의 공연이었다. 불효하는 자식을 저주한 할머니와 알코올 중독 엄마를 미워한 딸이 우연히 같은 곳을 향해 가다가 서로의 사연을 듣고 위로하고 위로받는 내용인데, 두 여인은 <뿔이 세 개 달린 소가 절 짓는데 큰 공헌을 하고 죽어서 가지 세 개가 은 소나무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들의 독특한 인생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서로를 응원한다. 두 사람의 아린 인생사가 조금씩 전개되는 동안 시차 때문에 피곤에 지친 남편이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의 마지막 연극 관람 파트너가  주기 위해 극도의 고단함에도 내 옆에 있어주는 남편이 참 사랑스럽다.


연극 관람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우리는 곧 씻고 잠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도 나는 일찍 일어나 운동부터 했다. 가족이 모두 다 일어나기까지는 두 시간 정도가 걸렸다. 아들이 시금치가 들어간 비빔면을 아침로 다 먹고 난 후에 가족들은 크리스마스트리 옆에 앉아 선물 박스를 하나씩 열었다. 선물에 별로 민감하지 않 나 탓에 올해도 남편의 선물은 가장 적다. 남편은 산타 할아버지 마냥 나와 아이들에게 계속 선물을 나눠 줬다.  나의 무관심으로 해마다 반복되는 우리 가족의 크리스마스 아침 풍경이다. 그나마 남편의 크리스마스 카드에 현금을 두둑이 넣어 둬남편은 덜 서운했을 것이다. 항상 주기만 하는 남편이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거실 코너에 상자들과 찢어진 포장지가 가득 차고 나서야 선물 여는 의식은 끝이 났다. 남편과 아이들 보더 게임을 같이 하는 동안 나는 김치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김치전을 만들었다. 남편은 아침부터 막걸리를 한 병 열어서 김치전을 제대로 즐겼다. 그리고 남편과 나는 낮잠을 잤는데 선물 개봉 때  놓은 보일러 때문에 너무 더워서 몇 시간 후에 깨고 말았다. 나와 아들은 가벼운 점심을 먹었지만 늦게 아침을 먹은 남편과 딸은 점심을 거르고 우리 가족은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노란색과 검은색으로만 된 퍼즐을 다 맞추는 데는 온 가족이 두 사람씩 교대로 대략 두 시간이 걸렸다. 다 맞춰 놓고 보니 겨우 손바닥 크기만 했다.


크리스마스 저녁에는 온 가족이 외식을 하고 송년 음악회에 갈 것이다. 아이들은 음악회를 그다지 즐기지 않을 수도 있고, 피곤한 남편은 또 잠이 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고, 외출을 하고,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뭔 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참 감사하다. 나에게 크리스마스의 가장 큰 선물은 함께 하는 가족 그 자체인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러기 부부 상봉 하루 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