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똥꽃 Dec 29. 2019

기생충과 기방 도령

기생에 관하여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나는 항상 한 박자 느리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 며칠 전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플롯은 단순했지만 아주 기발한 발상이었다. 부잣집에서 기생하는 가난한 가족들의 이해관계로 결국  파국에 이르는 영화. 지금쯤은 아마 이 영화를 못 본 사람은 없을 것이어서 영화에 대해 새삼 얘기한들 아무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받은 충격은 예상외로 컸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느 정도 신분 상승에 성공한 나로서는 가난한 집과 부유한 집의 입장에 다 공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에게 기생한다"는 가설에 무조건 동조할 수는 없다. 나는 사실 항상 그 반대라고 생각해 왔다.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자신의 부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이다. 흔히 말하는 흑수저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 금수저를 얻기까지는 숱한 노력과 운 또한 따라줘야 한다는 것을 직간접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기생충이라는 영화에서 그려진 모습은 가난한 가족이 한 부잣집을 터전으로 부와 안락을 얻고 그것을 잃었을 때 절망하는 모습 또한 그려진다.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보고 며칠 후에 <기방 도령>이라는 코미디 사극을 보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기생 엄마에게 태어나 아빠도 알지 못한 채 기방에서 자란 남자인데, 성인이 된 후에 자신이 자란 기방이 파산의 위험에 봉착하자 기방이 문을 닫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남자 기생이 되어 위기를 극복한다. 때는 바야흐로 정조가 강요되던 조선시대였기 때문에 성춘향이처럼 기다릴 낭군도 없는 지아비 잃은 과부들이 주로 그의 고객이었다.


여기서 <기생충>과 <기방 도령>이 어떻게 기생에 관한 이야기인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밝혀 보겠다. 기생충의 기 자와 기생의 기 자는 한자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생들이야 말로 그 시절 양반들에게 기생하던 존재들이다. 요즘이야 노래와 춤, 글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엔터테이너나 작가로 인정받고 존경 받고 있지만, 그 시절 기생들은 그 모든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민으로서 자신들의 생존을 상류층 고객들에게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기생충>이라는 영화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에게 기생하는 형태를 제대로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다시 <기방 도령>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영화를 보는 동안 현대 일상어와 상황을 사극에 담아서 배꼽을 잡고 웃다가도 조선시대 여자들의 "한 남자만 바라보고 살아야 했던" 가혹한 인생에 반항하는 남자 기생의 용기와 그의 이루지 못한 사랑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 아마 그런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허구의 인물이라 해도 왠지 모르게 약간의 위로가 된다. 그리고 아직 이 영화를 못 본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다.


이 두 영화를 보기 전에 나에게 기생충은 단지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벌레에 불과했다. 생각만 해도 불쾌한 존재다. 시내에 나갔다가 지하상가에서 기생충 약을 팔고 있는 약국을 보았다. 기생충 약을 예방 차원에서 먹는 건지 아니면 치료를 위해 먹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번 먹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네 통을 사다가 온 가족이 같이 먹었다. 기생에 관한 나의 의견은 박멸이다. 기생은 하지도 당하지도 말자!

매거진의 이전글 2019년 크리스마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