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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Sep 07. 2020

2030년 9월 7일 날씨 태풍

태풍이 온다고 남편은 하루 유급 휴가를 받았다. 하와이에서 처음 맞는 태풍이라 여간 걱정스럽지 않다. 먼저 차고에 차를 넣은 후에 밖에 있는 그릴, 피크닉 테이블과 의자 등을 실외 창고로 옮겼다. 집 주위에 큰 나무들이 없어서 다행이다. 다음 주말에는 과수들을 심을 계획이다. 혼자서 한다면 굳이 다음 주말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지만 아무래도 나무를 심으려면 땅을 파야 하기 때문에 남자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집을 구할 때 가장 고심했던 부분이 대지였다. 과수와 야채 그리고 화초를 맘껏 심을 수 있는 땅. 남편 직장과 비교적 가까운 도시에 집을 구하다 보니 에이커 당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 생각한 10 에이커의 절반도 안 되는 3 에이커에 만족해야 했다.) 남편은 앞으로 최소 10년은 더 일해야 하기 때문에 집을 살 때 남편의 통근 시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수는 대지의 경계 표시와 가까운 곳에 심을 것이다.

아보카도, 애플 바바나, 산사과, 노니, 감귤, 빵나무, 야자수, 스타 푸루트, 망고, 파파야, 파인애플 등을 심을 계획이다. 대지 경계와 가까운 곳에 심어야 하루에 한 번씩 주욱 돌아보며 운동도 되고, 혹시 우리 집 주위를 배외하는 배고픈 사람에게 요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무 옆에 <배고프신 분은 드시길 바랍니다>라고 적어 둘까? 망설여진다. 나무가 다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 어차피 그때 가서 결정하면 될 일이다. 예전부터 꼭 키우고 싶은 나무들이 있는데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그리고 모과나무다. 하와이에서 이런 나무들이 자랄 수 있는지 모르겠고, 모종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건 앞으로 더 연구해 봐야 할 것 같다.


태풍은 온다는데 나는 주말에 과수를 심을 생각으로 들떠있다. 이참에 이 집이 얼마나 견고하게 지어진 집인지 확인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창을 다 닫았더니 실내가 약간 답답하다. 나는 그래도 견딜 수 있는데, 다혈질 남편이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오늘 저녁은 간단하게 피자와 라면을 먹기로 했다. 남편이 오븐에 피자를 굽는 동안 나는 스토브 탑에 라면을 삶을 물을 끓였다. 둘이서 먹기에 라면 하나와 피자 하나면  많은 양이다. 남은 피자를 다 먹으려면 식사 후에 영화를 보면서 간식으로 야금야금 먹어야 할 것이다. 무슨 영화를 볼까?


집 안에서 요리를 하고 밥을 먹는 것은 왠지 갑갑하다. 태풍도 견딜 수 있는 야외 주방을 만들고 싶다. 그릴, 피크닉 테이블과 의자를 옮길 필요도 없이 항상 두고 쓸 수 있는 공간을 말이다. 일단 설계도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건물을 지으려면 아마 시에서 허가부터 받아야 될지도 모른다. 직사각형 정자처럼 생긴 구조에 중앙에 아들과 딸의 가족까지 다 앉을 수 있도록 상당히 긴 아일랜드를 두고, 음식을 손질할 수 있는 주방이 안쪽에 있고, 개폐 가능한 강력 유리문을 사방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건 남편과 아직 상의해 본 건 아니다. 혼자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다.


야외 주방과 가까운 곳에 채소밭도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드라이버 웨이에 야생화도 심어야 하고 집 앞에 꽃 밭도 가꿔야 하는데, 일단은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 놓고 하나씩 만들어 가는 것이 좋겠다. 집 뒤에는 저쿠지와 수영장 중에 뭘 놓을지 고민 중이다. 출가한 아이들 가족이 찾아왔을 때는 아무래도 수영장이 더 유용할 것 같은데, 평소에 그다지 사용할 일도 없을뿐더러 관리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낭비다. 저쿠지 또한 그다지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다. 현실성을 따져서 이건 일단 보류.

우리 부부는 50대에 빚 한 푼 없이 집과 땅을 산 걸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빚 한 푼 없이 정원, 채소밭, 과수밭을 만들 계획이라 일이 얼마나 빨리 진행될지 모르겠다. 이제 남편의 수입에만 의존해야 하므로, 꼬박꼬박 들어오던 나의 월급이 아쉬울 때도 있지만,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일상의 행복과는 바꿀 수 없다. 돈 자체에서 행복이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이나 돼야 태풍이 완전히 소멸할 것 같다. 본토에 있는 아이들이 걱정이다. 둘 다 직장 때문에 본토에 남았는데, 딸린 가족이 있는 아들이 하와이로 오기는 더 힘들어질 것 같다. 그래도 휴가나 명절 때라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내 머릿속에는 이미 태풍이 스치고 지나간다. 때마침 라면과 피자로 차려진 저녁을 먹으며 남편과 나는 무슨 영화를 볼지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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