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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Sep 26. 2020

2003 vs. 2020

불행 배틀

반평생을 돌이켜 보니 참 많은 고비를 넘겼다. 1975년에 시작된 불행은 1981년, 1988년, 1993년, 2003년, 2008년, 2017년 그리고 2020년 이렇게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 간격으로 찾아왔다. 불행은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생로병사가 모든 인간이 겪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한 나에게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불행하게 느껴진다. 내가 어느 나라 어느 마을 아무개의 아들이나 딸로 태어나 누구라고 불리고 싶다는 것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애초 선택할 수 없었던 국적, 인종, 성별, 가문 등으로 차별을 받는다. 사는 곳이 보수적일수록 더 그렇다. 나도 살면서 차별이라는 종류의 차별은 거의 다 겪어 보았고 지금도 겪고 있다.


2003년은 참 불행한 해였다. 이민을 간지 몇 해 되지 않았고, 아이가 겨우 한 살 반이었을 때, 나는 사람대접받으며 살아 보려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되도록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해서. 공부 시작하고 한 달도 채 안 돼서 남편이 속한 예비군은 전쟁에 투입이 되었다. 남편은 휴학을 하고 참전하기 위해 훈련소로 불려 갔다. 남편이 가고 얼마 안 돼서 이번에는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친정 엄마가 쓰러지셔서 급하게 뇌수술을 받으신다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나는 장기 결석을 하고 한국을 열흘 일정으로 다녀왔다.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엄마는 뇌수술을 두 번 받으셨고 그 이후로는 거동을 못 하셨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서 구멍이 나 버린 학업에 매진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어찌 됐건 그때 공부를 한 덕으로 지금 좋은 직업을 갖고 있지만, 시작한 공부는 결국 끝을 내지 못했고 전공도 살리지 못했다. 그때 어려운 공부를 하느라 매달리느니 차라리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 후회가 종종 든다.


그 이후로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고, 나는 2011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돈을 벌기 위해서. 올해 초에 한국에 다니러 왔던 아들과 남편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17년 동안 병석에 계셨던 친정 엄마가 결국 불행한 생을 마감하셨다. 그리고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국을 휩쓸었고 곧 세계 전역으로 번졌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최근까지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고, 이사 온 아파트에서 그간 겪고 있던 층간 소음은 최고조에 달했다.여름 휴가 때는 회사에서 사원 복지로 나오는 연일회의 미국행 왕복 티켓도 거절해야 됐고, 일 년에  겨우 두 번 만날 수 있는 미국에 있는 가족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현재 계속되는 층간 소음으로 심리적 뿐만이 아니라 신체적 이상 증후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2020년이 2003년의 불행 기록을 신하는 걸까? 나는 혹시 지금도 너무 미련하게 단지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태풍의 눈에서 태풍을 느끼지 못하듯, 나는 지금 생존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나를 둘러싼 태풍의 위력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미래의 나는 또 이렇게 버티고 있는 나를 질책할 것인가? 아니면 대견하다고, 최선을 다한 모습이 아름답다고 칭찬할 것인가?


인생의 불행에 주기가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기분 탓일까? 만약 불행의 주기가 있다면 나는 큰 불행은 17년 주기로 온다는 가설을 세우고 싶다. 2037년에도 내가 세상에 존재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일지도 모른다. 모든 불행이 끝나는 시점이니까. 사랑도 미움도 모두 내려놓은 채 더 이상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더 이상 책임감으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생존을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니까. 생도 사도 이렇게 허무한 것을 나는 왜 이토록 힘겹게 붙들고 있을까? 10억의 경제적 가치가 허비해 버린 십 년 인생을 보상할 수 있을까? 이런 쓸 데 없는 생각으로 무거워진 머리 때문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글을 쓰고 있다. 이제 다시 가벼워진 머리로 가던 길을 마저 가야겠다. 토요일 아침 하늘이 유난히 눈부시다.


여기부터는 사족:

가끔씩 나의 글들을 스스로 분석해 본다. 나의 글도 나처럼 존재감이 부족하다. 이유는 너무 직설적인 표현법과 짧은 호흡인 듯하다. 표현법은 쉽게 고쳐질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특히 최근처럼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개인적으로 층간소음 피해자의 심리적 정신적 상태는 PTSD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짧은 호흡법은 고쳐보자는 심산으로 이렇게 사족을 달고 있다.


이어서 걷다가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또 강가에 앉고 말았다. 걷기보다는 휴식에 더 초점을 맞춘 산책이었다. 물소리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앉았던 강 옆에는 꽤 알려진 전통시장이 있다. 걸어서 집까지 한 시간 가량 떨어진 거리라서 뭘 사들고 가고 싶지 않았지만, 곧 추석이 다가오니 전 생각이 났다. 특히 맛살과 파 등을 색색이 꽃은 꼬치전 말이다. 전에 한 번 들렀던 반찬 가게에 가서 꼬치전과 각종 모둠전과 겉절이 김치도 샀다. 계산을 하고 다시 강가 쪽 문으로 나가려는 찰나 전을 부치고 계신 할머니의 가게를 보니 은박지에 쌓인 김밥이 두 있었다. 입 짧은 딸내미가 가끔 김밥을 먹기 때문에 혹시 먹을지도 몰라 두 개나 산 것이다. 시장을 나와 산책로로 다시 진입해서 다리 밑으로 걸어갔다. 강에는 무슨 공사를 하고 있는데, 다리 밑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왜소한 할아버지가 보였다. 앞에는 여느 때처럼 마시다 만 소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나는 다리 기둥 뒤편에 앉은 할아버지 앞으로 성큼 다가가 인사를 하고 김밥 한 줄을 건넸다. 밥 사 드시라고 돈을 건네면 대부분은 그 돈으로 술은 사서 마신다는 얘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김밥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검은 봉지에서 빠져나간 김밥 한 줄의 무게만큼 내 마음도 가벼웠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한 끼 허기를 때우는데 기여했다고 착각하며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그리고 노숙자들과 같은 최빈곤층에 대한 나의 사회적 책임에는 쉽게 눈감아 버렸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행복과 불행이 있다. 불행에 너무 익숙해지면 행복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씩 나의 행복에게 미안할 때가 있다.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행복의 존재를 나는 모르고 지낼 때가 많다. 이제는 나의 행복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보여야겠다. 내가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고 나의 행복의 주기는 어떻게 되나 골똘히 생각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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