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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Oct 31. 2020

아이들의 댄스파티 엄마들의 담소 파티

고등학교 신입생인 딸이 학교 축제 댄스에 참여하는 날이었다. 직장에서 일 년에 한 번 있는 종일 상담 업무를 해서 가뜩이나 피곤했지만 일 마치자마자 서둘러서 집으로 와서 아이를 학교 축제가 시작하기 전에 아이 친구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난생처음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아슬아슬하게 걷는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와 택시를 탔다. 아이의 친구는 단독 주택에 살고 있는데, 나는 그날 새벽 두 시에 일어났고 종일 상담 업무로 무척 지쳐있었기 때문에 날이 어둑해지는 시간에 운전해서 낯선 곳을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단독주택에는 보나 마나 주차할 곳이 없을 거라고 단정 지었다.

 

유난히 친절하신 택시 기사님이 스페인어 공부에 관심이 있다고 말씀하시길래, 택시에서 내릴 때 듀오링고 앱을 소개해 드렸다. 우리는 아이 친구의 집 앞에 별 어려움 없이 도착했다. 아이 친구의 엄마는 나와 안면이 있었어서 처음 간 곳이지만 거리낌 없이 아이는 친구를 따라 이층에서 눈 화장을 한다고 올라가고, 나는 아래층에서 친구의 엄마와 그녀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녀의 친구는 모녀지간으로 그녀가 단독주택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아파트 위층 이웃인데, 서로 가까워져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었다고 했다. 그 모녀는 미국에서 살다가 왔는데, 남편이자 아버지인 사람은 지방 대학의 교수직을 고 있고, 딸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내년에 다시 미국에서 대학원을 시작할 거라고 한다. 육십이 넘은 엄마에 비해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닌 이십 대 중반 딸의 영어는 상대적으로 유창했다.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왔고, 그중에는 고등학생 딸을 데리고 온 사람도 있었다.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나는 건네주는 와인을 거절하지 않았다. 한 잔만 하려고 했던 와인은 어느새 두 잔이 되었고, 나는 점점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담한 거실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아이 엄마 중에 한 명이 예쁘게 차려입고 치장한 딸아이들을 축제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물론 집을 나서기 전에 의례적인 사진 촬영을 했다. 독사진, 그룹 사진, 모녀 사진 등등.


아이들이 떠나고 다시 아이 친구의 엄마, 그녀의 친구 모녀, 그리고 나만 남았다.  우리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다. 성선설과 성악설, 주변인으로서의 삶, 부모 자식의 관계 등등. 네 명 중 두 사람은 인간의 본성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데, 그 선악이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고 했다. 그중 한 명은 최근 젊은 지인이 질투 때문에 여자 친구와 여자 친구의 엄마를 목졸라 살해한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지를 거라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단다. 살인본능이라는 게 괴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흔히 아이들은 선하다고 하는데, 만약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왜 옳고 그름에 대해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친구의 엄마는 게이다. 그녀가 열여덟 되던 해에 커밍아웃을 했고, 그녀의 엄마는 "게이는 아이도 가질 수 없고, 너는 내 딸이 아니다."라고 반응을 한 것이다. 그 이후 그녀는 정자은행을 통해 임신을 했고, 아이의 친구를 낳았다.  아이의 친구가 어렸을 때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자신의 엄마가 아주 잘해줬다고 한다. 아이가 많이 자란 지금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린 듯하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자신의 아픔을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세상에 슬픈 이야기 하나 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에게도 지난 십 년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아픔이 있다. 어딘가에 속하기 위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아무 곳에 속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함께 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다면, 그 관계를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무 곳에 속하지 않더라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에 스스로 만족하는 성숙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런 심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미처 전화를 받기 전에 신호음은 중단되었고, 아이와 아이의 친구는 각각 자신들의 엄마에게, 우리 딸의 부츠의 굽이 부러졌음을 문자로 알렸다. 새로 산 부츠의 수명이 신은 지, 정확하게는 댄스파티에 도착한 지 한 시간 만에 다한 것이다. 택시로 이동한 나에게는 차도 없고, 초강력 접착제도 없고, 친구 엄마의 발은 너무 커서 마땅히 빌릴만한 신발도 없었다. 그래서 고작 생각해 낸 것이, 부츠를 벗고 맨발로 춤을 추든지, 아니면 다른 부츠의 굽을 빼서 굽 높이를 맞추라고 했다. 친구 엄마도 친구 엄마의 모녀 친구도 나를 댄스장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다른 사람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게다가 이참에 아이가 스스로 문제 해결하는 방법을 찾도록 가르치고 싶었다. 한 시간 가량을 더 철학적인 토론으로 즐겁게 보낸 후에, 나는 열 시 전에  파티장에 도착하기 위해, 친구 엄마의 큰 신발을 빌려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로 파티장 근처에서 내린 후, 몇 분간 걸어야 했다. 크게 들이는 음악 소리를 따라 식당 건물을 빙 둘러 식당 뒤뜰에 갔더니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춤추고 있었다. 섞여 있는 무리들 중에 아이를 찾고 있었는데, 채 몇 분 되지도 않아서 아이가 다가왔다. 아이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어떤 선배가 슬리퍼를 빌려주었다고 했다. 아이는 슬리퍼를 돌려주고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파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집으로 오면서, 아이에게 내 운동화를 주고, 나는 친구 엄마의 큰 구두를 신고 손에는 굽이 떨어져 나간 아이의 새 부츠를 들고 걸었다. 걸으며 아이는 그날 밤 신입생 대표 후보로 지목이 되었지만 다른 후보자 친구들의 몰표로 댄스파티에 스웨트를 입고 나타난 다른 후보가 신입생 대표로 선발되었다고 했다. (2020년을 살아내고 있는 그들만의 유머다.) 같이 간 다른 친구들은 다 남자아이들과 시시덕거리기에 바빠서 자신은 외로웠다고 했다. 그래서 약간 일찍 도착한 나를 보고 아이는 반가웠던 것이다. 아이는 인생의 통과의례를 거치고 있었다. 이성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는 시기에 걷기에 불편한 신발을 신고 움직이기에 불편한 옷을 입고 어른 흉내를 내어 보려 했던 밤은 아이에게 문득 <군중 속의 고독>을 깨닫게 했다. 금요일 밤늦은 시간이라 집에 거의 반쯤 도착한 이후에 겨우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어쩌면 손꼽아 기다리던 댄스파티에 잔뜩 치장을 하고 간 아이보다, 출근할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아이를 친구 집에 데려다주고 인사만 하고 나오려고 했던 계획과 달리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와인을 마시고 몇 시간 동안 깊이 있는 대화를 가볍게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내가 오히려 더 재미있는 밤을 보낸 듯했다. 아이는 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 기쁘다고 했다. 택시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편의점에 가고 싶다고 했다. 댄스가 끝나고 시내에서 삼겹살을 먹거나 슬립 오버할 다른 친구들을 생각하며, 우리 아이는 편의점에서 산 사탕을 먹으며 영화를 한 편 보고 자는 걸로 아쉬움을 달래려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부모들처럼 밤늦게 시내에 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고, 내가 반대할 거라 생각하고 아이는 슬립오버에 대한 건 나에게 아예 묻지도 않았다고 했다. 아이는 나를 보수적이고 자신을 구속하는 엄마로 기억할 것이다. 나 자신도 모르게 나는 아이이게 세대차이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엄마의 사명감으로 무장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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