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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Feb 08. 2021

불편한 시민의식

산책하는 나를 멈춰 세운 낯선 차

아침부터 분주하게 보내고, 기온이 비교적 올라가 산책을 하러 나간 어느 주말 오후였다. 아파트 후문을 나와 언덕을 내려가고 있는데, 낯선 차가 내 옆에 갑자기 멈춰 섰다. 운전석 창문이 스윽 미끄러져 내렸고 이내 6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마스크까지 스윽 내렸다. 코가 유난히 빨개 보였다.


아저씨: 뭐 좀 물어볼게요.

나: (의아한 얼굴로) 네?

아저씨: 혹시 학생이세요?

나: 아니요.

아저씨: 학생이면 안 물어보려고 했어요.

나: (누가 봐도 학생일 수 없는 나에게 왜 저런 질문을 할까 의아했다.)

아저씨: 다름이 아니고, 나는 S백화점 직원인데, 납품하러 가는 길에 밍크코트 하나 삥땅 쳐서 용돈 하려고요.

(그리고 운전석 뒷좌석 창문을 스윽 내렸다. 뒷좌석에 털 코트와 가죽 재킷 등 몇 개가 걸려 있었다.)

나: (손사래를 치며) 저는 옷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아저씨: 사셨다가 다시 팔아도 상관없어요.

나: 아니요!


돌아서며 차번호를 보았다. 속으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인과 통화를 하면서도 계속 낯선 차 번호를 외고 있었다. 지인과 통화를 마친 후, 112에 전화를 했다.


112:.... 상황 접수실입니다.

나: 제가 산책하러 밖에 나갔다가 낯선 사람한테서 이상한 제의를 받았는데, 일단 차 번호를 먼저 적어 주시겠어요?

112: 네 말씀하세요.

나: (차번호를 대고 상황 설명을 했다.)

112: 그 사람은 S 백화점 직원이 아니고 그냥 자기 차 가지고 다니며 물건 파는 사람이에요. 일단 접수하고 지구대에 연락하겠습니다.


그리고 곧 지역번호로 시작하는 곳에서 전화가 왔다.

지구대: 신고하신 분이시죠?

나: 네.

지구대: 혹시 피해를 보셨나요?

나: 아니요.

지구대: 피해 사항은 없으신데 그럼 왜 신고를 하셨나요?

나: 합법적인 유통과정이 아니라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볼까 봐 예방 차원에서 신고했어요.

지구대: 혹시 아까 그곳에 계신가요?

나: 아니요. 산책 나왔다가 계속 산책 중이에요.

지구대: 그럼 그곳을 순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12에서도 관할 경찰서에서도 신고를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찰을 하지만, 별 거 아닌 일로 왜 신고를 했냐는 듯한 태도였다.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았다면 신고하지 말라는 것인가? 만약 그 사람이 S 백화점 직원이라면, 그 사람은 회사의 물품을 빼돌리는 도둑이다. 만약 그 사람이 S 백화점 직원이 아니라면, S 백화점 직원을 사칭하고 S 백화점 물건으로 허위 광고해서 물건을 파는 사기꾼이다. 내가 생각할 때, 그게 도둑질이든 사기든 확연한 불법 행위인데, 사회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왜 신고를 했냐?"라고 되물으니 황당했다. 나는 책임감 있는 시민에서, 공권력을 낭비하는 불편한 오지라퍼가 되었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아이에게 밖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내 얘기를 다 고 아이가 말했다: "나 같으면 신고 안 했을 거예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어려도 나보다 낫구나. 그래, 신고하지 말고 편한 인생을 살도록 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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