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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May 17. 2021

동네 생활에 글을 올렸다

미친 짓이었다

요즘 하루 종일 당근을 한다. 지난 주말은 장롱 처분하느라 무척 바빴다. 금요일에 아껴둔 장롱 하나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와서 가지고 갔다. 그리고 남아 있는 장롱 두 개를 중고 거래 앱에서 끌어올렸더니 일요일 오후에 누가 와서 가져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토요일은 옷장에 있는 물건을 치우느라 바빴다. 옷장에 있는 옷을 다 빼내어 헹어에 걸고, 걸 수 없는 옷은 탁자 위에 임시로 쌓아 올렸다.


일요일은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하루였는데 다행히 장롱 픽업 시간에는 오지 않았다. 약속 시간이 한 십 분쯤 지났을 때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그런데 장롱이 아무래도 가지고 온 차에 안 실릴 것 같다더니 그냥 가 버렸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그럼 두 개 중 하나라도 가지고 가든지 아님 다른 차를 구해 오겠다고 하든지... 둘은 옷장에서 옷 빼느라 전날 내가 진 뺀 것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그날 오후를 다시 옷장에 옷 집어넣는 걸로 허비했다.


그 일 있고 속도 없이 나는 또 당근에 올라온 물건들과 광고를 보았다. 동네 생활이라는 코너에 올라온 게시글을 보니, <같이 어디 가자!>라는 류의 글이 많이 있었다. 심지어 <친구를 구한다!>라는 글도 있었다. 주로 자신의 나이와 성별을 밝혔는데, 나는 '한국 문화상 나이 공개를 필수적으로 하나 보다!'라고 약간 의아해하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한번 따라 해 보았다. 일 마치고 같이 산책할 여성분을 찾는다는 글이었는데, 내용을 입력하기 전에 본인의 나이와 성별을 밝히라는 당근의 안내문이 있었다. 그래서 내 나이대와 성별을 밝히고, 산책 동무는 이십 대 이후의 여성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사람에게서 문자가 왔는데 내 판매글에 같이 운동하자는 챗을 보낸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동네 생활이 아니라 개인 판매 채팅에 문자를 했을까? 그곳에 계속 문자가 왔는데, 자신이 삼십 대라고 밝힌 그녀는 내 나이를 물었다. 또 이상했다. 분명히 내가 사십대라고 밝혔는데, 그리고 내 나이가 왜 그리 중요할까 싶었다. 그다음 질문은 "결혼했어요?"였다.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나는 또 고지 곧대로 "네, 결혼했고 애도 둘이나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가 오가고 아무래도 수상해서 상대에 대해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당근 가입한 지 겨우 한 달 되었고, 구직 광고를 하고 있었다. 투잡이 필요할 수도 있고 (아니 어쩌면 무직일 수도 있겠다.), 또 당근을 오래 했든 최근에 했든 무슨 상관이겠냐 싶었다. 어차피 그냥 산책이나 같이 하자는 것이니까. 그런데 다음 문자에 갑자기 자신이 "남자"라는 거다. 그래서 <저는 유부녀라  외간 남자와는 산책이 어렵습니다>라고 잘랐다. 이번에는 그 남자가 자신의 근육 사진을 보냈다. 그래서 계속 열심히 운동하시라고 하고 채팅방을 나왔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에 "누나, 심심할 때 문자 주세요!"란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서 결국 그를 앱에서 차단시켰다.


내가 정말 심심해서 정신이 나갔나 보다. 차라리 드라마를 20편 이상 볼 때는 이런 황당한 일은 없었다. 얼마나 사정이 딱하면 나이나 기혼 여부 등 아무것도 안 가리고 들이밀까 싶었다. 그렇잖아도 아침에 출근하면서 <갑자기 소득이 줄어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정부에서 한시적으로 50만 원을 지원한다>는 광고를 보고, '50만 원으로 어떻게 한 달 생활비가 될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퇴근 후에 바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내가 너무 세상 물정에 어두워 허튼짓을 한 것이다. 이제 물건 파는 것도, 나누는 것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동네 생활도 질린다.


"당근아, 미안해! 우리 이제 서로 시간을 좀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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