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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May 15. 2021

이상한 하루

주말은 항상 바쁘다. 특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너무 빨리 간다. 평일처럼 새벽에 일어나 강아지 산책을 시키러 나갔다.   그렇게 이른 시간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이 거의 없다. 두 달 전 엘리베이터에서 우리 강아지 만나는 게 무섭다고 밤중에 같은 동 사람이 우리 집을 찾아온 이후로 강아지 아침 산책은 내가 시키고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맨 아래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강아지가 짖기 시작했고, 엘리베이터 우측 (안에서 보았을 경우) 코너의 사각지대에 있던 그녀가 문이 열리자마자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다가 강아지와 마주친 것이다. 강아지를 짖지 못하게 야단을 친 후 연신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라고 말을 하면서 마치 혼이 나간 듯이 동상처럼 굳어 버린 머니를 바라보아야 했다. 가끔 강아지가 빌딩 입구나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지만, 내가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게 최대한 노력하면 별문제 없이 강아지도 타인도 자기 갈 길을 간다. 그런데 오늘은 뭐가 문제였을까? 엘리베이터 안에서 밖을 보았을 때 사각지대에 서 있었던 할머니를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고, 강아지와 할머니가 서로의 동선이 겹치다 보니 둘 다 공포심에 의해 본능적으로 반응을 한 것 같다. 강아지가 다른 사람들을 아예 모르는 척 해 줬으면 좋겠는데, 왜 못 그러는 걸까? 할머니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봤을 때 보이는 곳에만 계셨어도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있는 문제였다. 내일부터는 정말 입마개를 해서 데리고 나가 봐야겠다. 전에도 입마개를 씌어 봤지만 영 불편해하고, 그것만 썼다 하면 산책을 제대로 하지 못 해서 규칙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곳에 개 키우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다른 동에는 소 만한 개를 두 마리나 데리고 산책시키는 사람도 있고, 또 한 번은 견주가 긴 개 줄을 손에서 아예 놓아 버리고 개가 짖으며 나에게 달려온 적도 있었다. 그 개는 소형견이었는데 그런 상황이 썩 편하진 않았지만 견주가 데려갈 때까지 아무 반응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그런데 왜 유독 중견인 우리 개를 보면 그리 공포스러워할까? 엘리베이터나 지하철 또는 건물 입구와 출구 등이 같을 때 상식적으로 안에 있는 사람이 먼저 내리거나 나간 후에 밖에 있던 사람이 타거나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 할머니가 개 때문에 놀란 것은 미안하지만, 안에서 보이는 곳에 서서 나와 개가 먼저 내리는 것을 기다렸다가 조금 늦게 타기만 했어도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일일이 다 바꿀 수 없으니, 사람들 안 다니는 시간에, 개와 딱 옆에 붙어서, 입마개까지 씌우고 아침마다 힘든 산책을 해야겠다. 나도 강아지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우리 개는 겁도 많고 입맛도 까다로워서 나에게 스트레스를 너무 준다. 그중에 제일 큰 스트레스는 개와 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무튼 아침 산책은 그렇게 망쳐 버렸고,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늦게까지 잤다. 좀처럼 낮잠을 자는 일이 없는데, 이번 주는 꽤 피곤했었나 보다.


일어나 보니 시간은 벌써 정오가 돼 있었다. 온라인 중고 거래에 네 개 중에 두 개 남은 장롱 나눔을 <끌어올리기> 했더니, 예약자가 생겼다. 그래서 장롱 속에 있는 옷을 모두 꺼내서 행어 두 개에 빽빽이 걸었다. 옷장 선반 위에 있던 다른 옷과 물건들은 테이블이나 의자에 임시로 올려야 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건 이제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옷장은 모두 처분했고 행어에 걸린 옷은 너무 많다. 그래서 일단 잘 안 입지만 소장만 하고 있는 옷들을 중고 앱에 올려 보았다. 그리고 물건 가치가 그리 없는 오래된 옷은 미련 없이 버리기로 했다. 골라낸 옷들을 모두 대형봉투에 한 가득 담았다. 손에 들고 가기에는 너무 무거워 손수레에 싣고 의류 수거함에 가지고 갔다. 그런데 저 멀리서 자꾸 나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모른 체하고 옷 가지들을 의류 수거함에 던져 넣었는데, 멀리서 나를 주시하고 있던 아담한 체구의 할머니가 나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입을 수 있는 옷이에요?"

그래서 나는 할머니를 보고, "네, 다 입을 수 있는 옷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지난번 이미 옷을 한번 추려냈기 때문에 이번 옷들은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 그냥 단지 나에게 꼭 필요한 옷들이 아닐 뿐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비가 와서.... 입을 수 있는 옷이면.... 갖다 주면 다 입는다..."는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옷이 담긴 대형 비닐봉지를 힘겹게 들고 홀연히 사라졌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는 그 할머니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 할머니는 몇 날 몇 시에 어디로 가라는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내가 옷을 가지고 내려온 그때 딱 나타나서 내 옷을 들고 사라졌다.


그리고 더 이상한 일은 사실 낮에 일어났는데, 너무 망신스러운 일이라 도무지 이곳에 담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 일에 대해서 저녁에 딸에게 말했더니, 새침데기가 그 얘기를 듣고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너무 창피한 일이지만 아이가 즐거워하니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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