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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Aug 13. 2021

나의 살림 능력에 현타 온 순간들

휴가 마지막 날, 그동안 미뤄 왔던 일들을 다 해치우려고 이곳저곳 연락을 하고 답을 받았다. 임대 기간 3년 의무기한을 채운 정수기를 새 모델로 바꾸고, 보조 주방에서 쓰는 가스레인지에 점화가 되지 않아 서비스 센터에 연락을 하고, 이사 온 후 줄곧 잊고 지냈던 주방에 달린 모니터에 관한 문의 전화도 하고 나름 바쁜 하루였다. 이렇게 하루를 살림꾼 흉내를 내며 알차게 보내려고 하던 중 나의 살림 능력(의 한계)에 대한 현타의 순간을 여러 번 맞이하게 되었다.


1. 정수기 교체

한참 무더웠던 지난주에 비해 날씨가 그리 덥지 않아 에어컨 가동을 하지 않았다. 정수기 기사님이 오셔서 새 모델로 교체를 해 주시는 동안 혹시라도 더우실까 염려되어 선풍기를 켜 드렸다. 교체를 받고 작동 설명을 듣고 기사님께서 나가실 때 여쭤보았다.


나: 날씨가 더운데 생수라도 드릴까요?

기사님: 아, 네~~ 물이 최고예요.


그렇게 정수기 기사님은 기쁘게 생수병을 받아 들고나가셨고, 나는 정수기 기사님께 물을 권한 게 멋쩍어 혼자 쭈뼛거리다가 부엌에 켜 둔 선풍기 앞으로 갔다. 선풍기에서는 더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래서 '가실 때 물을 드리길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은 것은 낯선 사람과 한 공간에서 창문을 다 닫고 에어컨 바람을 쐬고 싶지 않아서였다. 코시에 피차 그게 더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정수기 기사님이 다녀 가신 후 나는 정수기가 있음에도 생수를 마시고 있는 낭비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2. 부엌 멀티미디어 리모컨

이사한 지는 이제 몇 달 되었지만 부엌에 있는 멀티미디어를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아니 사실상 그곳에 있다는 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멀티미디어의 전원을 켜 보았다. 기능이 의외로 많았다. 티브이, 라디오, 전화에 각종 부가 기능까지 있었다. 마치 신문물을 바라보는 듯이 한참을 만지작 거리다가 리모컨을 집었다. (생각해 보니 이전에 살았던 대부분의 아파트에도 부엌에 멀티미디어가 설치돼 있었지만 내가 사용을 하지 않았다.) 리모컨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보았지만 스크린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리모컨 맨 위에 작은 전구처럼 생긴 부분에도 불이 오지 않았다. '건전지가 떨어졌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건전지를 교체했다. 하지만 건전지를 바꾼 후에도 여전히 작동이 되지 않았다. 멀티미디어 사용 설명서에 있는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다. 아침에는 전화를 받지 않더니 오후에 다행히 전화 연결이 됐다. 상담 직원이 나에게 리모컨을 가지고 부엌 멀티미디어 스크린 앞으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 스크린에서 mic라고 적혀있는 작은 구멍이 난 부분을 향해 리모컨을 작동하라고 했다. 리모컨 윗부분의 전구 같은 부분은 그냥 신호 전송을 위한 것일 뿐 원래 불이 오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상담 직원에게 들은 대로 리모컨을 스크린에 난 작은 구멍을 향하게 하니 진짜 마술처럼 작동이 되었다. 마치 세상을 얻은 듯 기뻤지만 어쩐지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멀티미디어 작동 원리를 알았으니 거실에 있는 모니터에서 볼륨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잘 들리지 않는 벨 소리 때문에 계속 답답했다.) 스크린에서 여러 기능을 확인한 후 벨 볼륨을 조절했다. 아주 간단한 절차였다. 그동안 왜 그리 불편하게 살았나 하는 약간의 자책이 밀려왔다.


3. 보조 주방 가스레인지

이사를 온 이후부터 줄곧 보조 주방 가스레인지가 되지 않아서 불편했다. 이사를 오기 전에 입주 청소 업체를 불러 청소를 했는데 그날 하필 비가 내렸다. 청소 업체에서 비 오는 동안 창문을 다 열고 청소를 했는지 보조 주방 가스레인지는 완전 침수가 되어 점화가 되지 않았다. 급한 대로 경비실에 연락을 했고 경비실 직원이 와서 확인해 보더니 가스레인지 회사에 AS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참을 미루고 미루다 AS 접수를 했고 오후에 기사님께서 방문을 하신다고 연락이 왔다.  약속 시간이 삼십 분이나 지나고 나서야 기사님이 도착했고 나는 기사님을 따라 보조 주방으로 갔다. (그분은 마치 본인의 집인양 보조 주방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셨다.) 기사님은 장비를 내려놓고 가스레인지를 한번 쓰윽 보시더니 가스레인지 위에 있는 탈착 되는 검은 점화 부속을 집어 들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 어~ 이게 거꾸로 놓여 있네!"


그리고 기사님은 잽싸게 위아래가 바뀐 부분을 윗부분이 위로 가게 뒤집으셨다. 그 후 가스를 켜니, 으윽~~ 거짓말처럼 불이 붙었다. 기사님은 불이 붙고 있는 사진을 스마트 폰으로 찍으셨다. 그리고 약간 민망하다는 듯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어, 죄송한데 제가 여기로 왔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빨리 대답을 했다: " 아! 출장비가 있나요? 얼마예요?"


기사님은 그 길로 만 오천 원을 받아 들고 오신지 채 삼 분도 안돼서 우리 집을 나가셨다.

방금 일어난 일을 마음속에서 차분히 정리를 하기도 전에 마침 샤워를 마친 후 방에서 숨죽이고 님이 나갔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에게 기사님이 가셨다고 말하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설명했다. 가스레인지 부속이 위아래가 거꾸로 놓여 있었다는 말을 듣고 아이는 아까 그 기사님보다 더 민망한 얼굴로 "엄마는 항상 나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왜 나의 황당함은 타인의 민망함이 될까?


다행히 이제 더 이상 집안에 고칠 것은 없다. 하루 만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내가 얼마나 경쟁력 없는 살림꾼인지 알게 되었다. 나와 통화를 했던 부엌 멀티미디어 회사의 상담 직원과 우리 집을 방문했던 가스 기사님의 가족이나 동료 또는 친구에게 내가 "멍청한 고객"으로 회자될 것을 생각하니 오늘 밤엔 이불 킥을 날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래도 이런 나에게 월급 후하게 주며, 가끔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까지 챙겨 주는 직장이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휴가의 마지막 날, 나의 살림 능력에 대한 현타를 통해 직장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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