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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Aug 15. 2021

나무 vs 사람

점점 좁혀져 가던 인간관계는 코로나를 계기로 더 좁혀져 버렸다. 인생에서 그런 시기에 봉착한 것 같다. 사람들과 잘 지내려고 어려운 부탁도 들어주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도 해 보고, 먼저 다가가고 베풀고 다 해 보았지만 항상 내가 베풀어야 하는 관계에서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그런 노력은 안 하고 싶다.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막말하는 사람들도 싫고, 항상 뭔가를 부탁하는 사람도 싫고,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사람도 싫다. 이것저것 가리다 보니  원래 단순하던 인간관계는 더 단순해졌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있다. 척하는 사람들 주변에는 척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서로 막 대하는 사람들 주변에는 막 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사람을 많이 가리는 편이다. 진솔한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받으면 가끔씩 줄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 좋다. 모르는 것은 배우려고 하는 의지를 보이고, 남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고, 자신의 배가 부를 때에도 주위에 혹시 배 고픈 사람이 있는지 살필 줄 아는 그런 사람이 좋다. 불행하게도 아직은 그런 사람을 많이 만나지 못했다.


가끔씩 꼭 일이 아니더라도 뭔가에 관심을 쏟고 싶을 때가 있다. 예전에는 주로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시간을 할애한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의미 없는 인간관계에 집착하지 않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람이 하나둘 떠난 자리에 나무가 한 그루씩 들어왔다. 땅이 있는 집이었다면 땅에  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아파트에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화분에 심겨 있다. 거실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면 동서남북이 다 나무로 덮여있다. 침실에도 두 그루나 두었다. 심지어 부엌과 화장실에도 식물이 있다. 키 큰 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 없이 평안하다. 나무는 푸른 잎으로 내 눈을 즐겁게 하고, 신선한 산소로 내 폐를 이롭게 한다. 내가 물을 주면 나에게 산소를 주고, 내가 말을 걸면 귀담아 들어준다. 요즘은 반려 식물이니 식물 집사니 하는 말을 쓰는데, 나에게 나무는 친구 같은 존재다.


오랜만에 미국에 사는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안부를 묻고 코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의견 차이로 대화가 막혀 버렸다. 그는 한국에서 일류 대학을 나오고 현재는 미국에서 괜찮은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그와 얘기를 나누면 어쩐지 그가 대학 시절에 멈춰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세월이 갈수록 뭔가 업그레이드되는데, 그는 업그레이드가 한동안 안 된 거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사실은 나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 또 한 명 있다. 그녀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지 못해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 이후 미국에서 대학 공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대할 때마다 어쩐지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한국에서의 자신의 모습에 갇혀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많은 노력을 했다는 걸 알기에 그녀의 경우에는 극복하지 못한 자격지심이 문제인 것 같았다. 지인의 연락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미국에 있는 퇴직한 동료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이 필요한 개인적 서류를 나에게 부탁을 하길래, 물론 개인 정보 문제도 있지만 내가 중간에서 중요한 서류를 다룰 이유가 없기 때문에 담당자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그녀가 퇴직하기 전 나와 함께 일한 건 고작 일 년 밖에 되지 않는다. 함께 일한 그 짧은 기간 동안에도 그녀는 남에게 부탁하는  참 즐겨하던 사람이었다고 기억된다. 피곤한 인간관계를 애써 피해 다녀도 이렇게 가끔씩 우연찮게 시달릴 때가 있다.


아무리 인간관계에 미련이 없다고 해도 지인과 찝찝하게 대화를 마친 게 종일 마음에 걸렸다. 기분전환 겸 음식 배달을 시켰다. 이제는 비대면 배달에 너무 익숙해져서, 선불을 한 후 음식은 그냥 문 앞에 두고 가시라고 한다. 빌딩 벨이 울려서 문을 열어 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에서 벨이 한 번 더 울렸다. 그런데 기사분이 계속 안 가고 계시길래 문 앞에 다가가서 "거기 그냥 두시면 됩니다!"라고 말을 했다. 스크린으로 그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려는 걸 보고, 아이에게 음식이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략 일 분 후에 문을 열고 음식을 집으려고 하는 순간 복도 반대편에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기사님을 봤다. 그는 왜 복도에서 기웃거리고 있었을까? 비슷한 일이 며칠 전에도 있었다. 중개 거래 온라인 앱에 집 정리를 위해 무료 나눔 및 판매 글을 많이 올렸다. 그렇지만 연락이 오는 곳은 무료 나눔 뿐이었다. 그중에 한 사람은 밤늦게 연락을 해서 다짜고짜 지금 픽업하러 갈 테니 주소를 대란다. 늦은 시간에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는 것이 약간 불쾌했지만, 내가 안 쓰는 물건 주인이 나타났을 때 보내려고 주소를 찍어 주었다. 작은 가구 두 개와 장난감 두 개라 장난감은 봉투에 담은 후 가구 중에 해체를 해서 가면 더 편한 물건을 담아가라고 봉투와 끈을  옆에 두고 문자를 보냈다. (그 사람이 갑자기 온다고 하지 않았다면 내가 가져가기 편하게 미리 담아 두었을 것이다.)  사람이 픽업을 하러 오면 문을 열어 주려고 샤워도 못하고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40분 후에 나타났고, 나는 문을 열어 준 후 샤워를 하러 갔다. 샤워를 마치고 확인해 보니 끈을 못 챙겼다며 다시 올 테니 문을 열어 달라는 문자가 와 있었다. (내가 문자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고 해체하지 않고 물건을 가져갈 수 있었으면 끈이 필요할 리가 없는데 왜 굳이 다시 오려고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필요할까 봐 둔 거라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고 답을 했는데 또 문자가 왔다. 다음에 다시 올 테니 문 열어 달라고... 내 물건 무료로 나눠 주고도 참 불쾌한 경험이었다. 남의 시간이나 공간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고, 일방적이고, 심지어 형식적인 감사 표현도 하지 않는다. 특별히 이상한 케이스였지만, 무료 나눔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맙다는 생각을 별로 갖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 같다. 굳이 내 물건 남 주자고 소독하고, 시간 약속 정하고, 기다리고 하는 번거로움을 겪을 필요가 있을까? 앞으로 '내가 안 쓰는 물건은 그냥 버려야겠다'라고 몇 번을 다짐하고도 나는 또 무료 나눔 한다고 내 시간을 낭비하고 돌아서면 후회하고를 반복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지만 나무는 그렇지 않다. 내가 특별히 뭘 해주지 않아도 늘 내 곁을 지키고, 나에게 산소로 보답하고, 늘 한결같다. 그래서 나는 사람보다 나무가 좋다. 내 옆에 나무가 한 두 그루씩 자꾸 늘어나서 더 좋다. 앞으로 더 많은 나무와 함께 하기 위해, 불필요한 물건을 열심히 없애야겠다. 하지만 다음에는 무료 나눔 한다고 고생하느니 눈 딱 감고 그냥 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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