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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Dec 08. 2021

엄마가 필요 없는 집

결혼 21년 차. 아이 둘. 그런데 갑자기 엄마라는 타이틀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적당한 시간에 퇴근을 하고, 적당한 거리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에 내 차를 함께 타고 집으로 오는 둘째가 요즘 들어 부쩍 나한테 먼저 가라고 한다. 방과 후에 친구들과 더 놀고 싶기 때문이다. 둘째가 늦게 집에 오는 날에는 첫째와 연락해서 같이 오게 하거나 아니면 가족 중에 한 명이 삼십 분이 넘는 거리를 걸어서 마중을 나가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버스를 타고 혼자 오겠다고 해서 덜 번거로워졌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아파트 주차장이 붐비지 않아 쉽게 주차를 하고 집으로 오니, 첫째가 벌써 외출을 하고 없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잠시 휴학 중인 첫째는 하루 종일 퍼질러 자다가 가족이 돌아올 시간이 다 돼서야 외출을 한다. 나름대로 일자리도 알아보고 하는 모양인데, 좀처럼 쉽게 잡히지 않는지 아직은 백수 신분이다. 예전 같았으면 저렇게 놀고 있는 모양새가 무척 답답했을 터인데, 팬데믹을 겪으며 인생관이 변했다고나 할까? 생과 사에 직결된 문제가 아니고서는 가능하면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로 했다. 사실 큰애가 돈을 못 벌면 못 버는 대로 그냥 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돈이 없으면 용돈을 타 써야 하기 때문에 본인이 괴롭겠지만 말이다.)


집에 오니 남편에게서 온 문자가 있었다. 갑자기 회식이 있어서 가야 한다고 말이다. 조직에서 남편의 위치도 있고 하니 안 간다고 하기 힘들 것이다. 나야 가고 싶지 않은 자리 억지로 가야 할 만큼 중요한 지위에 있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집에 나름대로 서둘러 온 이유는 정수기 필터 교체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대충 설거지는 해 두고 갔지만, 바닥 청소를 못했기 때문에 바닥청소도 하고 겸사겸사 세탁기도 돌렸다. 집에 혼자 있으니 맛난 저녁을 시켜 먹고 싶은데, 아무래도 정수기 필터 교체가 끝난 후에 음식이 도착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늦게까지 음식 주문을 안 하고 정수기 기사님을 기다렸는데 하필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을 주셨다. 할 수 없이 저녁을 시켰더니 아니나 다를까 음식이 먼저 도착해 버렸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기온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환기를 한답시고 창문은 열어젖혀 두었고, 집에 온 후에도 계속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서둘러 집에 온 날 아무도 없을 때 문득 드는 생각이 '이제 엄마가 필요 없는 집이구나!'이다. 집안일은 부부가 번갈아 가며 하고 있고, 음식은 각자 알아서 찾아 먹고, 엄마가 굳이 아이들을 일일이 챙기지 않아도 되니 뭐 엄마가 없다고 해도 집안은 그럭저럭 굴러갈 것 같다는 생각에 흐뭇해해야 할지 서운해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외출을 다녀온 첫째는 짧은 인사 후에 다시 방으로 들어가 게임에 열심이고 버스를 타고 온다던 둘째는 한참 동안 무소식이었다. 식어가는 피자 박스를 열어 보았더니, 7천 원 할인받은 걸 고려해도 바가지를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피자가 손바닥만 다.) 같이 먹을 사람도 없는데 왜 좋아하지도 않는 피자를 시켰나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다음에는 그냥 내가 먹고 싶은 거 시켜서 혼자 맛나게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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