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삶이 꽃이 되는 순간
"이제는 다 괜찮아!"
화양연화를 처음 들어 본 것은 유 퀴즈에서였다. BTS를 유명하게 만든 노래가 뭐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2000년에 나온 홍콩 영화도 아직 못 보았고, 2015년 BTS의 노래도 듣지 못했고, 2020년에 나온 TV 드라마도 이제야 겨우 보았다. 드라마를 연속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틀에 걸쳐 다 보았다. 드라마를 보는 중에 가끔 한눈을 팔기도 하지만 90 프로 이상은 꽤 집중해서 보는 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끔씩 방영이 끝난 드라마를 뒤늦게 보고 나면 "왜 이제야 이 작품을 알게 되었을까"라는 후회가 들곤 한다. 드라마 <스물 다섯 스물 하나>에서 지금은 40대가 된 사람들의 20대에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 이야기는 올해 방영 중에 보았고 중년이 된 사람의 과거의 사랑 이야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화양연화에서는 20대에 사랑하던 남녀가 40대에 재회하고 다시 연애를 하고 심지어 해피앤딩으로 끝난다.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그래도 행복한 그들을 보며 잠시 만족했다.
20대에 사랑하던 사람들이 다시 만난다면 (그것도 서로에게 아주 불편한 상황으로)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를 외면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서로 다시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둘 다 현재 생활이 행복하지 못해서 인 것 같다. 여자는 애 하나 달린 이혼녀에다 남자는 돈 많은 집 외동딸과 결혼해서 장인어른 대신 빵에도 다녀오고 아내는 심지어 외도도 한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들은 다른 사람들 괴롭히는 못된 놈이다. 그런 아들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남자 주인공에게 남자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예쁜 짓을 해서 예쁜 게 아니라 내 새끼라서 예쁜 거야!"
주인공 남자의 장인어른도 주인공의 첫사랑의 아버지도 그 남자에게는 모두 아버지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다. 곧 둘 다 원수의 딸들인 셈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도 남자는 조건 좋지만 성질 더러운 아내를 버리고 궁상맞게 살고 있는 애 딸린 이혼녀에게로 간다. 확신하건대 현실에 이런 남자는 없다. 이혼녀 이혼남이 넘쳐 나는 현시대에 백마 탄 왕자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40대 이후는 낀 세대다. 부모도 돌 봐야 되고, 애도 키워야 되고, 게다가 부부한테 무능한 형제까지 있으면 죽을 똥을 싸야 겨우 살 수 있다. 그런 판국에 잘난 가문과 결혼해서 윤택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그 모든 걸 포기하고 청춘의 그림자를 쫓을 수 있을까?
예술이 꼭 현실을 반영해야 되는 건 아니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니 드라마 속 해피앤딩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중년의 주인공들이 첫사랑을 결국 이룬다는 내용 말고도 드라마 속에 많은 사회문제들을 다룬다. 90년대의 학생 운동, 현재의 노동 운동, 정경유착과 사법비리, 물질만능주의, 학교폭력, 가족의 붕괴, 중년의 위기, 안전사고, 노인 질병 등등.
이 드라마를 보며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은 주인공 남자의 아버지가 불법 노조 파괴죄로 기소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썰렁했던 장례식과 아버지의 비통한 죽음을 "이제는 괜찮아! 이제는 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겪은 사람이 지난날의 상흔을 보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 약이기도 하지만, 고통을 이기며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더 단단한 사람이 재탄생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생각된다.
코로나가 길어지며 생활의 많은 부분이 바뀌고 있고 나는 드라마를 보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지금껏 본 드라마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이제 드라마 한 편(적게는 10시간에서 많게는 32시간짜리)을 볼 때마다 짧게라도 후기를 남기고 싶다. 아직 못 본 사람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지만 드라마를 보며 투자한 내 소중한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