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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Aug 22. 2024

우울증 일지

제2화: 우울증은 누구의 탓인가?

세상에 행복하고 싶은 사람은 많아도 우울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왜 나는 우울할까? 어려서도 청년이 되어서도 중년에도 늘 우울할까? 내가 우울하고 싶다는 일관된 의지를 갖고 살아온 것이 아닌데 왜 나의 인생은 우울한 것일까?


초년기에 내가 우울했던 이유는 가정환경이었다. 나는 우울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래서 많이 우울했다. 그때는 불우한 환경에서 벗어나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름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했고,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룬 것 같았다. 오만한 착각이었다.


내가 선택한 가정을 이루고 나는 행복에 가까워졌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와 남편은 여전히 가난했고, 아이들이 어릴 적에 많은 것을 누리게 해 줄 수 없었다.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은 시댁 사람들은 가난하게 자란 나를 무시했다. 자존심 상해서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하고 외로웠다. 그렇게 다시 우울과 가까워졌다.


세월이 지나고 아이들이 커 갈수록 우리의 경제력도 자랐다. 가난과 멀어질수록 성공에 가까워졌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 대단하지 않은 성공을 지속하기 위해 늘 일해야 했고, 늘 경쟁 속에서 살아야 했다. 나는 여전히 외롭고 우울했다. 나만 우울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 가족이 다 우울해 보였다. 최근 수술을 받고 방 안에 갇혀 지내고 있는 아들도 우울해 보이고, 일하고 늦게 퇴근해서  술잔을 기울이는 남편도 우울해 보이고, 곧 대학에 진학할 막내도 친구 때문에 속상해할 때가 많다. 왜 우리는 이렇게 우울할까?


나는 우울하지 않게 그간 많은 노력을 해 왔다. 뭔가에 집중하면 외로움이 덜해질 줄 알고 항상 새로운 뭔가를 배우거나 연구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내가 뭔가에 몰두할수록 나는 가족에게서 멀어져 갔다. 나만의 세계에 갇혀버린 것이다.


가족과 행복은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걸까? 우리는 가족 때문에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다. 나에게 가족은 우리 가족에게 나는 어떤 의미일까? 가끔은 너무 버겁다. 나의 짐도 무거운데 남편과 아이들의 짐까지 나눠지려니 답답하다. 그러다가 짜증스러울 때도 있다. '나이가 몇인데 왜 스스로 못하는 걸까? 왜 현명한 선택을 못하는 걸까?' 나는 항상 문제를 고치려고 하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절망한다.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나 자신인 듯하다. 놓지 못하고, 기대하고, 분노하고, 고집을 내세우며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상실감과 허무감에 빠지는 것이다. 나의 우울은 어쩌면 환경도 가족도 일도 아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성향 때문이 아닐까? 그저 그려려니, 좋은 게 좋다는,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는 그런 마음 가짐이 부족해서 나는 끊임없이 투쟁하고 분노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나의 우울이 내 탓이라면, 나는 더 이상 우울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누구에게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너무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겨우 일 년 사이에 내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 버렸다. 내 몸은 힘없이 늘어졌고, 작년에 피땀 흘려 열심히 가꾸었던 몸도 다시 망가지고 있다. 한 번 새치 염색을 했더니 흰머리가 감당할 수 없이 올라왔고, 눈 또한 침침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슬퍼서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나이 들어서 눈물이 난다. <나의 문어 선생님>에 나온 문어가 새끼를 낳고 곧 죽음을 맞이하듯 나도 아이들을 다 키우고 어느 날 그렇게 사라지겠지. 내 인생이 문어 인생처럼 너무 짧을까  괜히 슬퍼진다.


**2024년 3월 서랍 속에 넣어 둔 글 이제야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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