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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프 Apr 24. 2021

공간과 취향에 관하여





이사를 했다.


열 평이 조금 넘는 크기의 투룸이다. 커다란 안방과 작은 다용도실과 작은 거실-나는 이 곳을 다이닝룸이라 명명한다-로 구성되어 있는데, TV를 보지 않아 큰 거실이 필요하지 않은 나에게는 딱 안성맞춤이다. 준공년도는 내 생년과 같은데, 새로 인테리어 시공을 해서 새 집처럼 깔끔하고 예쁘다. 전반적으로 화이트톤이고, 어디 하나 못난 구석 없이 세련됐다.


열흘 전까지 내가 살던 집은 서울 교통의 중심지인 데다가 두 개의 호선이 지나는 지하철 역에서도 가깝고 무엇보다 보증금이 쌌지만(딱 1억이었다) 빨래 건조대를 하나 펼쳐두면 동선이 제약돼 움직이기조차 힘든, 다섯 평이 겨우 되는 원룸이었다.


당시 본가와 직장이 왕복 네 시간 거리라는 이유로 급하게 결정한 독립이었고, 또 마침 집도 깔끔하고 비슷한 금액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매물이었기에 그렇게 좁은 크기라는 생각 없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언가를 하기에는 제약이 많은 사이즈라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내 게으름과 취향 없음에 대해서도 한탄하게 됐다.


퇴근 후 집에 오면 곧바로 침대로 직행하고, 빨래는 내가 집을 조금이라도 오래 비울 타이밍을 노려 한번에 돌리고, 좁은 바닥은 물티슈로 대충 머리카락만 쓸어모으며 '청소했다'고 생각하는 내 게으름과,


몇 년 간의 취향이 한껏 담긴 찻잔에 쌓인 먼지를 애써 못본 척하며 이제는 차에 별로 관심이 없나 보다고 생각하는 나의 취향 없음에 대해.


새 집의 계약서를 쓰고 가구를 알아보고 심지어는 이사를 하는 동안까지도 나의 형편없음을 걱정했다. 기껏 넓고 예쁜 공간으로 이사했는데도 또 똑같으면 어쩌지, 하루종일 침대에만 누워있고 가구에 쌓인 먼지를 모른 척하고 커피도 차도 내려마시지 않고 다 마신 캔맥주 캔을 구겨 주방 한 구석에 올려놓고 이틀씩 방치하면 어쩌지, 하면서.


필요한 가구가 대부분 들어온 지금 시점에 돌이켜 보니, 조금은 기우였던 것도 같다.


이제 샤워 후에는 안방 침대가 아닌 다이닝룸 테이블로 직행해 책을 읽거나 필사를 하거나 맥주를 마신다. 빨랫거리를 나눠 여러 번 세탁기를 돌리고 머리카락이 보일 때마다 청소기를 손에 쥔다. 토요일인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세탁기를 돌리고 먼지를 털고 청소기와 물걸레로 바닥을 쓸고 닦았다.


물론 아직 '이사뽕'에 한참 취해 있을 때라 그런 걸 수도 있다. 어쩌면 요즘이 내 인생을 반성하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 시기여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전기가오리 논문이나 퍼블리 글이나 뉴스레터를 읽고, 점심시간에는 꼭 회사 근처 공원을 산책하는 식의 노력을 하는 그런 시기 말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톤의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다가 종종 하늘을 내다볼 수 있는 아담한 크기의 공간이 생겼으니 전과는 당연히 다를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 게으름에 대한 의지가 지독하다는 뜻일 테니 그것도 한편으로는 참 대단한 일일 테다.


이 집에 산 지 이제 겨우 일주일 남짓 되었지만, 나는 벌써 내 집이 참 좋다. 공들여 고른 원목 톤의 가구도, 화이트톤의 벽지도, 안방의 쉬폰 커튼도 좋고 15분만 걸으면 한강이 나온다는 것도 좋다. 그간 지닌 취향들을 하나씩 잊게 했던 집이라는 공간이 이제는 그 취향들을 다시 하나씩 일깨워주는 것 같다. 이 공간에서, 앞으로 더 많은 취향을 만들고 쌓고 단단하고 느슨하게 엮어가고 싶다.





정말 잘 샀다고 생각하는 가구 중 하나. 술과 차와 잔을 보관하기로 했다. 차와 찻잔은 곧 넣을 예정.


쉬폰 커튼 위에는 브라운 톤의 암막 커튼을 하나 더 달았다. 사진은 암막 커튼을 달기 전에 찍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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