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자기계발서/성공필승에세이/이것만하면부자될수있다 뭐 그런 글 아님.
여기 동갑내기에,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같은 연봉을 받는 두 사람이 있다.
A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영어 문장 몇 개를 눈으로 훑는다. 일하다 숨 돌릴 때 가끔씩 영어 문장을 들여다보지만 다 합쳐 하루에 오 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니 업무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다. 간단한 도시락 같은 것을 점심으로 먹고는 20분 정도 근처 공원을 산책하거나 책을 읽는다.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저녁밥을 차려 먹는데, 가끔은 전자렌지에 돌리기만 해도 완성되는 식사를 할 때도 있고, 가끔은 삼십 분씩 걸려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를 해먹을 때도 있다.
식사 후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를 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힘차게 자전거를 타고 땀에 젖어 집에 와서는 샤워를 하고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친다. 대학원에 가기 위함이다. 지난 날의 복습 삼십 분, 전공과목 공부 한 시간 반, 영어 번역 및 회화 공부 한 시간, 도합 세 시간 정도의 공부를 마치면 다음날의 투두리스트를 짜고 자기 전 전자책을 읽다가 잠에 든다.
B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주식창을 들여다본다. 딱히 주식 관련 공부를 하지는 않지만 우량주라고 판단되는 주식 몇 가지에는 돈을 넣어두었기 때문에 추이를 확인해야 한다. 간단한 도시락 같은 것을 점심으로 먹고는 동료들과 수다를 떨거나 SNS를 들여다 본다. 퇴근 후 술 약속이 없으면 집에 가면서 저녁 메뉴로 뭘 고를지를 내내 고민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배달음식을 시키고, 음식이 올 때까지 이불 속에서 핸드폰을 들여다 본다. 음식을 다 먹은 뒤에도 한참동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먹은 것을 치우지도 않고 침대로 향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자정이 가까워지고, 겨우 몸을 일으켜 샤워를 하고 먹은 것을 대강 설거지통에 넣어두고 설거지와 뒷정리는 내일 아침의 자신에게 미룬다. 바닥에는 갈아입은 옷이 널려 있다.
A와 B 둘 중에 누가 성공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 것 같냐고 물어보려는 게 아니다.
A와 B, 둘 다 나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A로 살고 있을 때는 '이렇게 사는 거 생각보다 어렵지도 않고, 성취감이 커서 정신건강에도 좋은데 왜 B로 살았지?' 싶어서 여기저기 꼰댓말 하고 싶어 죽겠더니 막상 B로 살고 있으니 '아니 나도 다 아는데... 내 몸과 마음이 그게 안 된다고...' 하게 된다.
출근해서 일은 잘 하고, 기분에 있어서도 크게 문제 없는 걸로 봐선 우울 증세는 아닌 것 같다. 그냥 1)내가 조성해놓은 생활패턴이 깨지고 2)지난번 1차 공부 목표치를 달성한 뒤 2차 목표치를 명확하게 잡지 않았고 3)날이 추워지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게을러진 것뿐.
휴, 정말이지. 동전에도 앞면과 뒷면이 있다지만 이 정도로 앞뒤가 다른 인간이 될 줄은 몰랐다. (정확히는 앞뒤가 다른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오늘은 최근의 나날 중 그나마 가장 나은 하루였다. 근 2주간 계속 침대에 누워만 있어서 오늘은 기필코 침대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더니, 침대에 안 눕고 바닥에 누워서 잠까지 들었던 것만 빼면. 아니지, 겨우 일어나 반쯤 포기하는 마음으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 핸드폰을 두 시간 가까이 했던 것도 빼야지. 아무튼 그러고 나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빨래를 개고 새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하고 재활용품과 종량제 쓰레기를 정리하고 식탁을 닦고 자질구레한 것을 치웠으니 오늘은 오늘의 할 일을 다 해낸 셈이다.
내일의 목표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10분이라도 읽는 것. 내일 모레의 목표는 내가 바라는 목표치를 좀 더 확실히 잡아보는 것. 내일 모레 글피의 목표는 비록 다시 A로 돌아가 주변에 꼰댓말 하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온몸이 배배 꼬일지라도 일단은 내 생활에 내가 만족할 수 있도록 나와 내 주변을 세팅하는 것.
어쩌다 보니 초반에 적어둔 주의사항과 다르게 A의 생활을 옳다 여기는 자기계발서 류의 글이 된 것 같은데, 그런 건 정말 아니고. 나는 정말 B로 살 때 몸 건강과 정신 건강이 끝도 없이 떨어지는 사람이라서... 그냥 내가 계획해둔 방향대로 시간을 쪼개 쓰는 게 가장 좋다.
음, 그러니까.
오늘의 변명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