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시작해볼까요.
브런치에 일상을 기록해보기로 했다. 모든 일상을 기록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브런치에 일상을 기록해보기로 했다.'라는 문장을 읽고 '모든 일상'을 기록하리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저 문장을 읽어넘기는 시간은 어떤 생각을 떠올리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일상을 기록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보다시피 나는 변명이 많은 사람이다. 한 문장을 써두고 그 문장에 대해 변명하고, 다시 그 변명에 대해 변명한다. 내가 글을 잘 쓰지 못한-않는-다고 이야기할 때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변명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며, 바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글을 쓰지 못하는-않는- 것에 대한 변명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이다. 혼자 쓰는 다이어리에서도 나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게 내가 남들에게 보이는 글을 잘 쓰지 않는 이유다. 나는 변명이 많다.
변명에 대해서라면 작년 말에 마무리한 졸업작품집(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기 위해 필수로 제작해야 했던)의 창작 노트에 이미 써둔 적이 있다. (그 구절을 따오는 것조차 내가 지금껏 이야기한 내용에 대한 변명의 근거가 된다는 게 재밌다. 이쯤되면 나는 인간 변명이 아닐까?)
가끔 일기 비슷한 걸 쓴다. 하루 일과를 늘어놓기보다는 그 날의 인상 깊은 한 사건과 그에 대한 생각을 적는 식인데, 몇 줄이면 기록될 내용인데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작은 노트 한 바닥을 꼬박 채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오늘 만난 사람이 어떤 말을 했다. 그 말은 내게 A라는 의미로 들리기는 했지만, 사실 B라는 의미를 가지고 한 말일 수도 있고, 별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일 수도 있는데, 그걸 A라고 받아들인 건 내가 요즘 이러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거나 혹은 과거에 이러저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꼭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만 그러는 건 아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했다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를 끈질기게 추론해나간다. 그러다보니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에너지 소모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방향을 짚어보게 된다.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다.
그러니까, 내가 쓰는 모든 글은 변명이다. 내 생각에 대한 변명이고, 내가 인식하는 세계에 대한 변명이고, 내 왜곡의 방식과 결과물에 대한 변명이다. 이 창작 노트처럼, 때로는 변명에 대한 변명이다.
어쩌면 나중에 에세이 같은 걸 쓸 때 위 구절이, <변명>이라는 타이틀에 딸린 내용 중 일부분으로 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 생각은 꽤 우습게 느껴진다.
나는 평가받는 게 두렵다. 아니, 재단당하는 게 두렵다. 아니, 너를 안다는 말을 들을까 두렵다. 아니, 아니다. 내 삶의 모습을 내가 원치 않는 때에 내가 원치 않던 방식으로 알리게 되는 게 두렵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내가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사람들이 나를 알게 되는 게,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두렵다. 나는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아는 것만큼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아는 것보다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이야기하는 것에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는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이야기만으로, 내가 보이는 모습만으로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아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생각을, 나의 일상을 긴 글로 정제해 내어놓지 않는다. 지금껏 그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써보기로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이, 내가 행하는 것이 나의 꽤 많은 부분, 어쩌면 나의 대부분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구성된 나를 다른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건 내버려두는 것에 대한 연습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혹은 이야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에 대한 연습. 나는 이 연습이 꾸준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