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프 Aug 06. 2018

요즘은,


 요즘은 잘 지낸다. 거의 매일 한 시간 이상 운동을 하고, 딱히 폭식이랄 것도 하지 않는다. 우울을 느끼는 빈도가 크게 줄었고 우울감이 지속되는 시간도 많이 짧아졌다. 작년 12월 말에 시작한 구몬 일본어는 벌써 8개월차에 들어섰다. 이제 '이것은 얼마입니까?' '이 지갑이 저 지갑보다 비싸네요. 어느것이 인기가 많습니까?' '어제 우리집에서 친구와 함께 쿠키 10개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오늘 그 쿠키를 먹었습니다. 맛있었습니다.' 따위의 문장을 쓰고 말할 수 있다. 화상으로 하는 영어 회화 과외도 시작했다. 내 영어 선생님은 하필이면 심한 우울증을 앓은 전적이 있는 학생을 맡은 탓에, 매 시간마다 나의 우울했던 과거 이야기와 썩 괜찮은 현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이제 겨우 오십 분짜리 수업을 네 번 진행해본 것뿐이지만 시작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알고는 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문장과 표현들을 조금씩 꺼내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아예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조금 더 편하게 늘어놓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생각지도 못한 이점이다.


 요즘은 내가 무슨 일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직종을 고려해보고 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다양한 직업을 꿈꿔왔다.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가 예능 프로그램의 방송 작가가 되고 싶었다가 프로파일링 혹은 범죄자의 교화를 담당하는 범죄 심리학자가 되고 싶었다가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을 결합한 이론을 연구하는 심리학자가 되고 싶었다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가……. 이 중 가장 현실감 없게 느껴지는 꿈은 작가다. 문예창작학과를 벗어난 지 몇 달이 채 안됐으면서도 그렇다. 문창과에 입학한 지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내가 작가가 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일 년쯤 지난 뒤에는 확신했다.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소설을 썼다가, 시를 써봤다가, 결국에는 뜬금없게도 비평으로 졸업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동화나 시나리오, 희극에는 관심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안심이 된다. 나의 관심 분야가 아예 중구난방으로 날뛰는 건 아니구나, 내가 어떤 진로를 택하든 맥락이 있기는 하겠구나 싶어서. 그렇지만 또 아예 새로운 분야면 어쩔 거야, 하고 싶으면 해봐야지ㅡ 하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그렇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불안이 많은 사람이다. 불안을 잊기 위해 불안할 거리를 회피하면서도 내가 한 선택들이 모조리 다 회피일까봐 끝내 다시 불안해지고야 마는 사람이다.


 요즘은 수다를 많이 떤다. 엄마와도 수다를 떨고, 가끔 만나는 친구들과도 수다를 떤다. 하다못해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같이 일하는 열네 살 차이 나는 언니와도 열심히 수다를 떤다. 나는 원래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남들과 나눌 말이 없어서였다. 상대의 일상이 궁금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나의 일상은 더더욱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 자신에 대해서 드러낸다는 감각 자체를 싫어하기도 했다. '너를 몇 년이나 봤는데 아직도 너를 모르겠어.' 친구들이 그렇게 이야기할 때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기뻤다. 누군가가 나를 알게 되는 게, 정확히는 누군가가 나를 안다고 '생각하는 게' 싫었다.

 지금은 다르다. 남들에게 나를 알려주지 못해 안달을 낸다. 가끔은 내가 말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나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쏟아내는 것 같아서 싫을 정도다. 나의 일상을, 나의 생활을, 나의 생각과 나의 삶의 방향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 후부터, 정확히는 그걸 인정한 후부터 변하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이렇게 한두 문장으로 간단하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다. 그렇지만 대충은 그렇게 이야기해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 이것에 대해서라면 앞으로도 자주, 그리고 많이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까.


 삼십 분만 쓰려고 했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길어졌다. 매일 삼십 분씩 어떤 글이라도 쓰는 것이 나의 거창한 목표다. 일기나 산문이 될 수도 있고 소설이나 비평 같은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이건 절대로 소소한 목표가 아니다. 매일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요즘 나는 그걸 해내고 있다. 그게 요즘의 내가, 요즘의 나를 믿고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다.


 '요즘'은 참 재밌는 표현이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를 간단하게 내포한다. '요즘은'은 '요즘'보다 덜 일상적이고 더 굳건하다. 그리고 조금 더 불확실하다. '요즘'을 넘어선 미래와는 단절되어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요즘은'이 불안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끊어진 요즘들이 모여 나의 생활을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요즘은, 으로 운을 뗄 때마다 나의 요즘들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덜 일상적인 것이 일상이 되면서 나는 훨씬 단단해졌다.

작가의 이전글 변명에 대한 변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