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5. 다행인 날들

by 이일리


[weekly illy] 25.06.02-25.06.08



감정은 해소되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커다란 일이 남아있지만 그건 뭐, 내가 더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드디어 거실과 주방을 거의 정리했다. 전에 살던 집에 비해 수납공간이 턱없이 적어 각종 짐을 봉지에서 꺼내지도 못한 채 꾸역꾸역 살다가, 일단 잔 수납장과 책장을 꼼꼼히 정리하고(책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썼다) 주방의 좁은 틈에 넣을 수납장과 소스 등을 놓을 트롤리를 구매함으로써 놀라울 만큼 많은 게 정리됐다. 아직 벽면에 놓을 수납장을 사지 못해 임시로 둔 랙 위에 오만가지 짐이 얼기설기 놓여 있지만 제법 널찍하고 깨끗한 느낌이 들어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느낌이다.


거실 쇼파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은 이 집에서도 아름답다. 전에 살던 집에선 오른쪽으로 책장과 잔 수납장을 배치했고 머리 뒤에 창이 있었는데, 지금 집에선 왼쪽에 창이 있고 바로 맞은편에 책장과 잔 수납장을 배치했다. 그래서 더더욱 책 한 권 한 권을 어떻게 놓을지 꼼꼼히 정리한 건데, 아직 정리하지 않은 안방의 책장은 잘 모르겠고... 일단 거실의 공간은 매우 마음에 든다. 전에는 책장 뒤로 숨겨두었던 (다 마신)와인병과 맥주병도 이번엔 책장 위로 올렸다. 거친 이사 과정에서도 상하지 않고 잘 버텨준 레고꽃도 잘 꽂아두었고.


거실의 창은 맞은편 건물에서 이쪽을 들여다볼 때 실루엣 정도만 보이도록 얇은 흰색 커튼으로 살짝 가려두었다. 그러다보니 샷시의 푸른빛이 들어오는데, 무조건 따뜻한 빛을 좋아하는 나지만 옥빛 찻잔을 두니 매우 잘 어울려서 그것 또한 만족스러웠다. (이 찻잔은 무려 화양연화의 그 찻잔이다.) 그래도 너무 바깥이 그대로 보이는 느낌이라, 샷시 바깥쪽으로 인공 풀과 나무를 조금 달아둘까 싶다. 아무래도 진짜 풀과 나무를 두기엔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위험할 수 있으니까. 물론 화분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 (실외기를 놓아둔 공간이) 단단하게 구성되어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인공 풀과 나무를 생각하고 나니 그것도 제법 귀여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직 안방과 옷방은 엉망이지만, 거실과 주방을 제법 정리해둔 것만으로, 그리고 그 두 공간이 마음에 드는 것만으로(당연함. 내가 마음에 들게 꾸몄음...) 이렇게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 수 있어 다행이다. 집에서 1k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한강공원이 매우 아름다운 것 또한 다행이고, 퇴근길에 내리는 지하철 역에서부터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복작복작 생기넘치는 큰 시장을 거쳐갈 수 있는 것도 다행이다.


비록 아직도 월급은 안 들어왔지만, 게으르게 먹고 마시고 뒹굴고 자기만 한 탓에 몇 키로나 쪄버렸지만, 그래도 당장 내 눈 안에 담기는, 내 몸 뉘일 공간이 내 마음에 들게 아름다워서, 그런 아름다움을 기획하고, 구성하고, 마음놓고 사랑할 수 있어서 정말, 정말로 다행이다.


감사하게도 다행인 날들이다.



작가의 이전글1644. 어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