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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림 Jan 04. 2022

매 끼니의 사랑

'노른자'를 먹으며 우리는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달걀 노른자를 잘 먹지 않았다. 그 특유의 퍽퍽함과 희미하게 나는 누린내 비슷한 냄새가 싫었다. 그래서 반숙인 경우에는 가끔 먹어도, 완숙은 절대 먹지 않았고 어릴 때는 냉면이나 떡볶이 안에 들어 있는 달걀조차 노른자는 예외없이 남기곤 했다. 노른자를 으깨어 떡볶이 국물과 섞어 먹는 건 어른이 다 되어서야 처음 경험한 맛이었다. 다들 이 맛있는 걸 어찌 모르고 살았냐며 나를 안타까워 했지만 사실 나는 그닥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다행히 내 주위엔 노른자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다. 어릴 때는 엄마에게, 커서는 남편에게 기꺼이 노른자를 내어 주고 나는 여유롭게 흰자를 즐겼다. 엄마는 어린 내가 입맛이 까다롭고 입이 짧다며 늘 걱정이었는데, 흰자라도 먹으니 다행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런데 아이가 나를 닮아 달걀 노른자를 싫어한다. 한 세대를 지나면서 그 성향은 더 극단적으로 변한 건지 아이는 노른자가 조금이라도 닿으면 흰자도 입에 대지 않으려 했다. 가뜩이나 밥을 잘 안 먹는 아이라 달걀 요리를 할 때 더욱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했다. 아이에게 달걀 프라이를 줄 때면 노른자가 터지지 않도록 매우 조심히 뒤집어야 했고, 반숙도 아닌 완벽한 완숙으로 튀겨내야 했다. 결국 단단하게 뭉친 노란 덩어리는 모두 내 몫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 그 날도 나는 어김없이 노른자를 발라 내어 입 안에 넣고 있었는데 그걸 보던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노른자를 정말 좋아하네!”


우걱우걱 노른자를 억지로 씹어 삼키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어쩌면 엄마도 노른자를 좋아하지 않았을 수 있었겠다는 것. 흰자를 좋아하고 너무너무 먹고 싶었지만 나를 위해 기꺼이 그것을 내어 주고 노른자만 꾸역꾸역 입에 넣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것이 엄마가 나를 향해 보여준 매 끼니의 사랑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우리 집에 아이를 봐주러 오셨던 엄마가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라며 순두부찌개를 끓이셨다. 엄마표 순두부찌개는 늘 마지막에 계란을 넣어 익히는 것이 키 포인트다. 그날의 찌개 속엔 여지없이 노른자 덩어리가 채 풀리지 않은 채 동그랗게 익어 있었다.


“오늘은 골라내기 딱 좋게 익었네. 너 이거 안 먹지?”


엄마는 습관처럼 그 노른자 부분만 떼어다 막 덜어내고 계셨다. 그 손놀림과 일련의 행동이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마음이 아팠다. 그동안 끊임없이 봐 왔지만 오늘에서야 눈에 걸리고 만 엄마표 사랑. 나는 서둘러 괜찮다고 하면서 노른자를 입에 넣고 엄마를 향해 맛있다고 엄지를 날려줬다.


“국물이랑 같이 먹으니까 맛있더라, 왜 이제야 이 맛을 알았을까?”
 

그런 나를 한참동안 보는 엄마의 얼굴이 오묘하다. 이제 노른자도 잘 먹게 된 거냐고, 어른이 다 됐다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웃지를 않는다.


“너도 익숙해져 버렸나보다. 애 때문에….”


엄마는 내가 예전처럼 흰자 타령만 하지 않는 게 속상한 눈치다. 왜 굳이 노른자를 입에 넣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가 보았다. 엄마도 나도, 처음부터 좋아했던 게 아니라 그렇게 된 사람들이었던 거다. 매 끼니마다 밥 안 먹는 아이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그 아이가 싫어하는 음식 때문에 행여라도 밥을 안 먹는다고 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그렇게 서서히 변해간 것이었다. 그걸 엄마는, 단박에 눈치 채 버렸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노른자를 입에 넣어 먹고 있었을 뿐인데도 모든 걸 알아버렸다. 그게 우리 둘 모두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날 식사에선 엄마가 아끼고 내어준 흰자를, 나는 아이에게 내밀었다. 엄마는 노른자를 같이 나눠 먹자고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서 흰자를 잘라 엄마와 아이에게 나눠 주었다. 엄마는 내가 당신처럼 살고 있는 것이 못내 안타까운 것 같았지만, 내리 사랑이라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고 받아들여야 할 몫인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 우리가 먹었던 그 수많은 끼니들이 부모를 비롯한 누군가의 배려로 만들어진 것처럼, 그 끼니로 자란 우리들 역시 다음 세대에게 내 몫을 내어줄 차례가 된 것이다. 다만, 난 이제 아이에게 내 것을 줄 정도로 이만큼이나 컸으니 엄마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고 온전한 자신의 몫을 가져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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