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림 Jul 26. 2023

사막 여우의 뒷모습

- 떠나간 이를 그리는 우리 모두 사막 여우이다

  난 소설 <어린왕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길들인 장미꽃을 책임지기 위해 어린왕자가 원래의 별로 돌아가는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혼자 쓸쓸하게 남은 사막 여우의 뒷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어린왕자를 떠나보낸  뒤 또다시 자신을 길들여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을 사막 여우. 넓은 들판 위에 자그마한 점으로 남은 듯한 사막 여우의 뒷모습이 나는 늘 아프게 와 닿는다.

  열 두 살 즈음의 추석이었을 것이다. 난 여느 때처럼 사촌 언니와 함께 큰집에서 어른들이 전 부치는 것을 돕고 있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부엌으로 들어가 5시간 째 기름 냄새를 맡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얇게 자른 고구마며 동태포, 새우 등등은 꼴보기도 싫어져서 나는 계속 몸을 배배 꼬았다.  

  “이집 장손은 명절에도 돈 번다꼬 새벽부터 나가 택시를 모는데, 가스나들이 집 안에 펜안히 앉아 있으믄서 뭐 힘들다꼬 들썩거리노?”

  할머니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우리를 노려 보셨고, 큰엄마와 엄마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전을 뒤집을 뿐이었다. 추석 전, 약 반 년 가량 가출을 했다가 돌아온 큰엄마는 그 일 이후로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뭐라고 경을 쳐도 한 마디도 대거리하지 못한 채 그대로 듣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대놓고 화를 내는 건 사촌 언니였다. 이번에도 언니는 참지 못하고 전을 부치던 젓가락을 탁 놓으며 나에게 나가자고 말했다. 나는 할머니 눈치를 보느라 잡고 있던 새우 꼬리도 채 놓지 못한 채 엉거주춤 언니를 따라 일어섰다.

  나오자마자 우리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기름내만 드나들던 콧구멍에 선선한 가을 냄새 사이사이로 어디선가 진한 꽃향기가 묻어 왔다.

  “혜진이, 나와 있었네? 오랜만이다!”

  하늘거리는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언니에게 말을 걸었다. 꽃향기는 그 여자에게서 나는 것이었다.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고 싶었지만, 나는 가느다란 여자의 다리와 높은 구두에 먼저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여자의 뒤편으로 큰아빠의 구두가 보였다. 명절 전날에도 택시 운전을 나갔다는 큰아빠였다. 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단박에 눈치챘다. 큰엄마가 없던 시간 동안 큰집에 들어와 살림을 했다는 그 여자였다.

  “그렇잖아도 너 불러서 맛있는 거 먹이고 싶었는데! 잘 됐다, 같이 가자.”

  맛있는 곳을 알고 있다며 여자는 큰아빠와 함께 우리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난 여자를 따라가며 슬며시 언니 쪽을 쳐다 봤다. 표정에 별 변화는 없었는데, 날 잡은 손에 촉촉하니 땀이 배어들고 있었다.

  여자와 큰아빠가 우릴 데려간 곳은 일식 돈까스 집이었다. 방금 전까지 기름 냄새가 진동하던 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참이었는데 또 기름에 튀긴 음식을 먹어야 하다니. 아마도 여자는 명절날 전을 부쳐 본 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혜진이 뭐 먹을래? 전부터 여기 오고 싶어 했잖아.”

  전을 부치며 헛구역질까지 했던 언니는 놀랍게도 돈가스를 시켰다. 나는 차마 돈가스를 먹을 자신이 없어 우동을 먹겠다고 했다. 나오자마자 고춧가루를 잔뜩 뿌려 먹을 작정이었다. 여자는 큰아빠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언니의 돈가스를 먹기 좋게 잘라주고, 자기의 치즈 돈가스를 얹어 주기도 했는데 오랜 시간 그래왔던 것처럼 그 모습이 꽤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엄마가 나의 흰 쌀 밥 위에 갈치를 발라 올려주거나, 내 앞에 가장 맛나게 구워진 돼지갈비를 놔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언니는 말없이 젓가락을 입에 욱여넣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접시 위의 돈가스는 조금도 줄어 있지 않았다. 여자가 준 치즈 돈가스의 치즈가 점점 굳어 가고 있었다.

  살뜰하게 언니를 챙기던 여자는 헤어지는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더니 언니의 손에 꼬옥 쥐어 주었다.

  “너랑 레코드 가게에 갔을 때, 사고 싶다고 했던 카세트 테이프야. 추석 선물로 샀어. 이제는 누구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들어.”

  언니는 손을 내려다 보며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여자는 언니의 눈높이에 맞춰 앉더니 언니의 얼굴을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뭔가 더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말을 하진 않았다. 나는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언니의 손만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언니의 손 위로 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언니는 울고 있었다. 우리 둘뿐이었던 돌아오는 길에 언니는 내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약속한 건 아니었지만 그날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큰아빠를 만났다는 것조차도 우리만의 비밀이었다.

  어린왕자가 장미꽃에게 돌아갔듯, 큰아빠는 결국 큰엄마에게 돌아왔고 큰엄마도 원래의 자리를 찾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막 여우는 그 여자여야 옳은 것일텐데도 이상하게 나는 언니에게서 사막 여우의 모습을 보았다. 여자에게 등을 돌린 채 터덜터덜 힘없이 걷던 언니의 뒷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한없이 작아 보였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길들여졌다가 그 사람을 떠나보낸 우리 모두 사막 여우인 건 아닐까. 날 떠난 이를 그리워하며 또 다시 나를 길들여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우리 모두.

매거진의 이전글 이탈해서 다행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