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살 성수

21화 뜯지 않은 봉투

by 왕눈이 누님

졸업식 답사를 하는 언니 은수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 우리는 정든 교정을 떠나려 합니다.

사람되라 가르쳐 주신 선생님 은혜, 감사드......”


단상의 언니 은수는 끝내 답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오열했다.

단상아래 성수도 꺼이꺼이 숨이 넘어갈 듯 울고 말았다.

졸업식장은 그야말로 눈물 바다가 되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잘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우렁차게 부르라고 배운 졸업식 노래도 울음속에서 그렇게 선생님의 풍금소리만 울려퍼졌다.


공부 잘하고 속 깊은 언니 은수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딸자식 공부시켜봐야 팔자만 사납지.”

“큰 딸은 살림밑천이다.”


생활력도 없고 딸 자식에 대한 기대도 다른 아버지는

큰 딸을 중학교에 진학시키는 대신 취업시키는 것을 선택하셨다.


살림을 보태도록.

살림 밑천으로.


친구들이 하얀칼라의 교복을 찾아오던 날

언니 은수는 아버지를 따라 그렇게 서울로 올라갔다.

철 늦은 싸락눈이 사납게 내리던 추운 날이었다.


언니 은수의 빈자리는 컸고 집안 분위기는 예전처럼 밝고 화목하지 않았다. 길목 어귀를 자꾸만 내다보는 엄마의 우울함도 함께 커져만 갔다.


무거움속에서도

그리움은 오고

봄은 또 그렇게 왔다.


벚꽃이 지고 복숭아꽃 살구꽃이 지고

감꽃을 따서 풀줄기에 꿰어 먹을 때쯤

언니 은수가 집에 왔다.


헐렁한 꽃무늬 원피스에 흰색양말 검정구두를 신고 돌아온 언니 은수에게서 병원 약냄새가 났다.


병원 집에 취직한 언니 은수는

낮에는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밤에는 병원집 아이도 돌보면서 잘 지낸다고 했다.

사모님도 병원 식구들도 잘해주어서 편하다고 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옷도 신발도 사주어서

돈은 쓸데가 없다고.


아버지한테 공손히 큰 절을 올린 언니 은수는 누런 봉투를 내놓았다.


‘뜯지 않은 봉투’


열 다섯 살 실림밑천 언니 은수의 꿈과 바꾼 월급봉투다.


‘뜯지 않은 봉투’ 덕으로 성수도 어린 동생들도 먹고 살거라는 걸 모두가 안다.


아버지는 헛기침과 함께 봉투를 받아 옆으로 옮기고, 엄마는 눈물을 훔치며 부엌으로 나갔다.


엄마는 저녁내내 언니 은수의 밥그릇 위에 반찬을 올려주셨다.


밥솥에 앉혀 찐 가시 많은 황석어의 없는 살을 발라주느라 엄마는 입에 음식을 넣을 틈이 없었다.

계란찜도 통째로 은수 앞에 놓아주고 철없는 동생들이 숟가락이라도 갈 참이면 조용히 눈치를 주었다.


큰 딸을 챙기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챙기는 언니 은수는 사뭇 연인 같았다.


짧으면서도 길었던 저녁을 보내고

성수는 언니 은수와 나란히 마루 끝에 앉아 별을 보았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언니인데 어색하기 짝이 없다.


언니 은수에 대한 미안함 같기도 하고

다가올 성수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 같기도 하다.


언니 은수가 살그마니 성수의 손을 잡았다.


“성수야,

너는 공부해서 중학교에 꼭 가.

언니가 그렇게 해줄게.”


성수는 괜히 걸레를 찾아서 마루 끄트러미를 닦는다.

우는 걸 들키기 싫어서.


그런 성수를 언니 은수는 뒤에서 포근히 감싸 안았다.


불 꺼진 방에서 동생들의 잠든 쌔근대는 소리와 엄마의 울음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온다.


오늘도 변함없이 하늘에선 별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