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인복지재단 - 예술인 역량강화 지원사업
지난 글에 이어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인 역량강화 지원 사업 중 신진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한 소감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내 비록 예술인이라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을 상황일지언정 신진예술인 자격을 얻었으니 주어지는 기회들은 다 잡기로 했다지만 솔직히 신청서를 쓰는 것만으로도 큰 도전이었고 선정이 되든 안되든 상관은 없었다.
신청서 제출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재단으로부터 멘토링 프로그램 참여 안내에 대한 연락이 왔다.
기획서 작성법 교육에 문화기획 및 공공예술․창작 등 기획 분야 전문가 네 분, 포트폴리오 작성법 교육에 예술 장르별 전문가 네 분이 멘토가 되어 멘토당 각각 2조씩 맡아서 온라인 교육을 진행해 주셨다. 내가 신청한 기획서 작성법 멘토는 유다원 (플러스마이너스 1도씨 공동대표)님이 담당해 주셨고 나를 포함해 총 4명의 멘티가 있었다. 7월 25일, 7월 31일, 8월 14일. 평일 오후 두 시, 단 세 번의 온라인 줌 수업이었지만 그중 두 번은 둘째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부랴부랴 달려와서 참석하고, 나머지 한 번은 여름휴가 중이어서 휴양지 숙소에서 노트북을 지참하고 참석했다.
기획서 작성법이라는 제목으로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단순한 문서 작성법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었다. 예술가로서의 내가 있고 내가 가진 철학을 바탕으로 예술작품이 사회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어떻게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 안에서 생계수단으로 직업적인 면까지 고려하는 찐 예술인들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조원들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예술 활동을 하고 계셨다. 한 분은 순수미술 전공으로 해외 대학원을 마치고 국내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분이었는데 생각이 깊고 철학가적인 면모가 있는 분이었다. 자연과 시간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았다. 다른 한 분은 레진아트로 공예품을 만드는 분이었는데 사업을 준비하고 계셨다. 특히 반려동물의 죽음으로 아픔을 겪는 분들의 현실을 놓고 상실과 위로를 주어로 한 여러 확장사업을 구상하고 계셨다. 마지막 한 분은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관련 교육을 하고 계신 분이었는데 수도권이 아닌 지역의 청년들과 학생들을 위한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목표를 가진 분들이 지원금이나 투자를 받기 위해 또는 전시나 공연을 하기 위해 구체적인 기획을 해야 하는데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표현하고 사진과 그림을 첨부하여 보기 좋게 서류로 만드는 것이 기획서 작성이다.
나는 겨우 한 시간반 동안의 줌수업이 너무나 힘들었다. 나는 아직 내가 스스로 정의가 되지 않은 상태니까 무엇을 기획해야 하는지부터 너무 어려웠다. 그냥 서식에 빈칸을 채우라면 어울리는 글들로 만들어 넣을 수는 있었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예술활동이 무엇인지 나도 모르겠으니 수업시간에 매주 자신의 이야기들로 발표를 해야 하는 것이 꽤나 곤욕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지쳐서 몇 시간씩 낮잠을 자버리게 될 정도였다. 교육이 끝나고 벌써 반년이 지나고 있지만 난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노래를 해서 음반을 발매하고 싶은 건지, 뮤지컬을 해서 오디션을 보고 공연을 하고 싶은 건지, 생활문화예술이하고 싶은 건지, 프로 공연인이 되고 싶은 건지, 혼자 활동하고 싶은 건지, 단체를 조직하고 싶은 건지 당최 모르겠다. 어디선가 들은 가능성에 중독된 상태라서 계속 괴로워만 하고 있는 것일지도. 그렇지만 온라인 세 번의 교육은 빠짐없이 참석을 다 했고 그 안에서 최대한으로 내가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있을지 예민하게 반응했다. 마지막 과제로 나만의 기획서를 제출해야 했는데 내가 창작뮤지컬을 기획하는 콘셉트로 작성해 보았다. 나와 같은 처지의 경력단절 혹은 마음에 예술을 품고 사는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줄거리를 만들었다. 에이미(애미), 누리(며느리), 아가타(새아가)가 꿈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연말 서울의 작은 소극장에서 단 1회 공연을 하리라는 기획서를 작성하였는데 상상하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기획서 포맷을 채우는 일은 대학, 대학원, 다년간의 회사 생활로 다져진 문서 채우기 실력을 활용하였고 일단은 빈 곳 없이 잘 채웠다는 멘토의 칭찬을 받았다. 나에게는 기획서 작성법이 아니라 '네가 예술인인지 알아보기' 수업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안갯속을 헤매고 있지만 늘 뒷전으로 두던 고민을 앞으로 꺼내서 생각해보게 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렇듯 아름답게 온라인 수업을 종료하고 몇 주 뒤 이메일로 오프라인 네트워킹 캠프에 대한 안내가 왔다. 9월 8~10일, 2박 3일 동안 도봉숲속마을이라는 교육연수원에서 멘토들과 멘티들이 모여서 서로 얼굴을 보고 토론을 하게 된다. 남편이 합숙교육을 왜 가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제 전문예술인이 되려고 간다며 대꾸했지만 속으로는 금토일 3일간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고 나만 생각하러 떠나는 힐링타임라 가는 거라며 대답했다. 살면서 예술인들만 모인 곳에 가본 적이 드물기에 생소하지만 멋진 경험을 하러 백팩에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챙기고 지하철을 탔다. 거의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대장정이라고 여겼는데 멀리 제주도에서도 오시고 불편한 몸으로 ktx를 타고 오시는 분들도 계셔서 그분들의 열정에 많이 놀랐다.
도봉산역에 내려서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도봉역에 내리는 바람에 지하철 요금을 더 내고 도봉산역까지 다시 갔다. 도봉산 입구라서 등산객들과 등산욕품 판매점이 많았고 음식점도 많았다. 묵사발로 점심을 해결하고 슬슬 올라가니 멀지 않은 곳에 교육장소가 있었다. 교통도 편리한 곳에 교육수련원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도봉구는 참 좋은 동네인 듯하다. 방배정을 확인한 후 짐을 놓고 집합 장소에 갔다. 갓 대학을 졸업한 분들부터 머리가 하얗게 센 어르신들까지 정말 다양한 분들이 모여계셨다. 미술전공하신 분들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고 연령이 높아질수록 여러 가지 취미로 작업하시다가 예술가가 되신 분들이 많았다. 교육은 여느 교육 프로그램들과는 다르게 단방향 강의가 아닌 멘토를 중심으로 모여서 주제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강연자의 강의를 듣는 게 훨씬 편한 일이었지만 네트워킹 캠프라는 이름에 걸맞게 여러 멘토님들도 만나고 참가자들의 목소리와 의견을 다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들의 공통적인 고민들은 예술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움과 예술로 사회와 환경을 위한 좋은 영향력을 어떻게 줄 것인지에 관한것, 본인의 예술철학에 대한 것들이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경험이 많든 부족하든 자신의 예술관에 대해 정말 많은 고민을 하는 모습에 많이 놀랐다. 매일 단순한 생각으로 삶을 영위하는 내가 부끄러웠고, 나는 예술인으로서의 자질이 정말 부족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303호실은 세 명이 배정받았다. 뒤늦게 순수미술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모조금 작가님과 한국무용을 하시는 나미희 님 이렇게 두 명을 방동료로 맞이하게 되었다. 나잇대도 비슷하여 한방살이 하는데 어려움은 별로 없었다. 서로 배려를 많이 해주는 분위기였다. 두 분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듣는 시간도 꽤나 재미있었다. 겨우 3일이었지만 같이 먹고 자고 대화하면서 정이 많이 들어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날짜를 잡았었는데 아직 만남이 성사되지는 못했다. 올해 안에는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온라인으로만 뵈었던 유다인 멘토님과 멘티 중 한 분이셨던 김재현 작가님도 캠프에 오셨다. 멘토님의 따뜻한 조언을 가까이에서 들으니 더 힘이 났다. 캠프 마지막날 서로에게 편지를 주는 시간이 있었는데 김재현 님이 나에게 격려의 내용으로 편지를 주셨다. 3일 동안 예술인들 사이에 혼자 이방인처럼 끼어있던 나에게 큰 위로처럼 느껴져서 눈물이 났다. 다들 전시회 일정과 공연 일정들을 주고받는데 나도 언제가 되어야 내 이야기와 계획을 저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캠프가 끝나고 벌써 몇 달이 흘렀지만 아직도 오픈채팅방이 존재하고 글이 올라온다. 피아노 연주회, 책 출간, 사진작가님의 작품 공유, 그림 작품 전시, 일러스트 캘린더 발간 소식들과 함께 멋진 네트워크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을 참가비 무료로 진행해 주신 한국예술인복지재단과 예술가치확산팀 담당자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프로그램 운영을 맡아 열일해 주신 에듀툴킷 디자인 연구소의 대표님과 이하 직원 분들도 애를 많이 쓰셨다.
교육이 마무리되고 이수증도 받았지만 여전히 내 정체성엔 물음표가 가득이다. 너무 느린 걸음을 걷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고, 맞는 길을 가는지도 사실 모르겠지만 그래도 고민하는 내가 기특하다.
캠프에서 만난 분들이 수도권에 전시나 공연을 하시면 찾아가서 얼굴도 뵙고 응원도 하려 했다.
10월 초엔 박하연 피아니스트의 신들린 듯한 연주를 감상했다.
또 10월 말부터 김이주 님의 회화 전시가 있었는데 11월 초에 발가락 골절이 되어서 보러 가지 못했다..
더불어 브런치에 글을 좀 더 빨리 올리려고 했는데 그것 또한 발 부상으로 늦어져버렸다.
올해 안에 하려던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발이 묶여버리니 이도저도 못하고 있다.
조바심은 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차근차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