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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왜 결혼했는지 깨달았다.

by 정짜리

지난주 10년 만에 대학교 동아리 모임에 나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여자들의 모임인 만큼 전날 코디를 정해놓고 화장은 물론 에어랩으로 머리 세팅까지 한, 신경 써서 나간 자리였다.

청담동의 브런치 카페에서 반갑지만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가격 대비 양이 적은 예쁜 음식들을 먹으며 도란도란 과거로 떠나는 추억 여행이 시작되었다. 대학 때부터 종종 나에게 소개팅을 주선하던 선배언니가 문득 예전에 내가 사귀었던 지혁오빠가 기억나냐고 물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그런가, 스쳐간 남자가 많아서 그런가 뭐가 됐든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아 잠깐 얼빠진 표정을 하자 선배언니는 '예전에 내가 너 소개해 줬던 지혁오빠 몰라? 그 잘생긴 의사 오빠 말이야' 하길래 그제야 생각이 났다.


한 11년쯤 전에 언니가 소개해 줬던 잘생기고 키도 크고 뭐 여러모로 훌륭했던 스펙의 가정의학과 전문의.

당시 소개팅이 잘되고 100일 정도는 사귀었던 거 같은데... 임팩트가 없어서인지 사귀었는지 조차 기억이 안 나던 사람. 선배 언니와는 최근까지도 교류가 있었는지 언니는 그 오빠의 최근 카톡 프사까지 보여주며 다이어트 병원에서 지방흡입으로 떼돈 벌고 있단 소식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모임 멤버가 다 유부녀라 그런지 왜 이런 남자를 놓쳤냐며 나에게 훈계를 하는데 나조차도 '내가 왜 헤어졌었나, 혹시 차였었나?'하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다 기억이 났다.


사귀던 시기가 연말이라 그와 함께 그의 친구들 모임에 나간 적이 있었다. 나름 잘 보이고 싶어 옷이며 화장이며 예쁘게 차려입고 갔는데 그 자리에서 그가 내가 새로 받은 네일 디자인이 신기했는지 이렇게 화려한 네일은 얼마냐고 물었다. '8만 원 정도?' 하자 그는 흠칫 놀라며 “너 그동안 매일 이렇게 비싼 네일 케어받고 다녔던 거야?” 하며 놀라움과 함께 약간의 한심함이 느껴지는 정색 아닌 정색을 했었다. 마치 그 당시 유행하던 된장녀를 만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정이 떨어진 게.


비싼 네일이 맞는가? YES

내 마음에 드는 네일 디자인인가? YES

네일을 해서 내 기분이 나아졌나? YES

네일 값을 남자친구가 계산했나? NO


단순한 사고의 흐름으로도 예쁘고 좋아서 내 돈으로 네일을 받았는데 비싼 네일을 받고 다니며 나를 사치하는 여자로 친구들 앞에서 얘기하는 그에게 정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나는 훌륭한 스펙의 그 남자와 헤어졌고, 동아리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에피소드를 다시 떠올리며 문득 깨달았다. 내가 왜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는지.


요즘도 나는 육아 스트레스 해소라는 명목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네일케어를 받는다. 그리고 지금은 전업주부이니 당연히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네일 케어를 받는다. 남편은 내가 네일케어를 하고 돌아오면 잊지 않고 꼭 묻는다.

“오늘은 손톱 어떻게 했어?”

“이 색은 너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 잘 골랐네. 예쁘다.”

이 단순한 대화 속에서도 나는 알고 있다. 형식적인 관심일지라 해도 남편은 나에게 늘 관심 어린 시선을 보내고,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칭찬일지 언정 그는 나에게 늘 '예쁘다 잘했다' 칭찬을 하며 나의 행동을 지지해 주는 사람이다.


비단 네일케어뿐만이 아니겠지, 만나고 사귀고 결혼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에서 그가 나에게 보내줬던 다정한 관심과 상냥한 칭찬이 나로 하여금 그를 내 배우자로 선택하게 한 것 같다.


어느덧 결혼 7년 차, 신혼의 달달함이 빠지고 육아와 가사, 시댁 등 현실적인 문제로 부딪히는 게 잦은 요즘이다. 오늘만 해도 남편이 출장 간 지 3일 차가 되니, 아이와 지지고 볶는 내 모습에 현타가 오며 결혼은 여자의 무덤이다라는 글에 좋아요까지 누를 뻔했다. 갑작스러운 전 남자 친구 에피소드로 남편과 왜 결혼을 결심했는지 깨닫는 이런 선물 같은 순간이 삭막해진 우리 부부관계에, 또 불만으로만 가득 찬 요즘의 나에게 큰 전환점이 되길 바라며. 내일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남편에게 조금 더 사랑을 담아 인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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