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싫습니다."

by 해린C

울긋불긋한 낙엽들이 발에 차이고 밟힐 때마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훌훌 흩어져 날렸다. 어느덧 완연한 가을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푸른 풀 위에 폭삭하게 덮인 낙엽 이불 위를 부지런히 걷는 에젤드의 시선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무줄기에 묶여 풀을 뜯고 있는 잉그램이 들어왔다. 무언가가 소복이 담긴 울룩불룩한 가방을 등에 지고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녀는 고개를 쏘옥 빼고 잉그램의 주변을 두리번댔다. 잉그램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바삐 움직이는 그녀의 눈동자였지만, 예상하던 만남이 더디어지자 그 눈빛은 조금씩 짙어지는 의문과 걱정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잉그램이 지척에 닿았을 때에서야 잉그램의 배 밑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본 에젤드는 허리를 살짝 숙이고 고개를 외로 꺾어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내 반가운 것 같기도, 놀란 것 같기도 한 얼굴로 잉그램을 지나쳐 반대편으로 간 에젤드의 눈이 마침내 궁금해하던 그를 발견해 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고 있었는지, 낙엽 밟는 소리에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다리를 뻗은 채 나무에 기대앉아 하늘을 보고 있던 에드윈은, 에젤드가 눈앞에 다가와 자기 앞에 선 뒤에야 퍼뜩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다보았다.


“어? 에젤드!”


에드윈은 얼른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하지만 그렇게 두리번거릴 때는 언제고, 에젤드는 에드윈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넋이 나간 듯 말을 잊고 그대로 굳어 멈추어 있을 뿐이었다. 양쪽 어깨의 가방끈을 붙잡은 두 손에만 꽈악, 힘이 들어갔다.


사라지고 없던 깊은 상흔들이 한 달여 만에 또다시 에드윈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광대뼈 주위의 시퍼런 멍과 눈썹 위, 콧등, 아래턱의 굳은 피딱지, 찢어진 입술과 그 언저리의 멍, 그리고 그 위에 희미하게 보이는 약초즙의 자국들. 아마도 몸통을 가로질러 감겼을 목덜미 위의 붕대.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풀풀 풍기던 술 냄새와 붉게 달아오른 얼굴빛을 빼면 모든 것이 처음 그대로였다.


숨이 막힌 사람처럼 서 있는 에젤드에게 에드윈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잘 잤어요?”


그 꼴을 하고 지금 그게 물을 말인가 싶은 질문이었으나, 질문의 시의적절함을 분간할 정신이 없는 에젤드는 그저 멀건 눈을 하고 무의식적으로 물음에 답했다.


“네, 전하. 전하께서……는……?”


그게 지금 그에게 물을 말인가 싶었는지 에젤드는 속히 말을 멈추고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선만 이리저리 옮겨 댔다.


“나는 뭐……. 그럭저럭.”


중간에 다급히 자른 인사말을 굳이 다시 주워 올려 답하는 에드윈의 얼굴에는, 그럼에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비록 그것에 저리고 스산한 기운이 은연히 배어 있었을지라도.


에드윈은 나무줄기에 묶어 놓은 잉그램의 고삐를 풀어 에젤드에게 건넸다.


“그럼 가 볼까요? 오늘은 속도를 좀 더 내 보기로 했잖아요.”


에젤드는 말없이 고삐를 받아 쥐었다. 하지만 번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헝클어 놓아서인지, 말의 옆구리 앞에 서서 갈기와 안장을 양손으로 잡고서도 쉬이 다리를 올리지 못했다.


“잠깐만요. 이걸 깜빡했네.”


에드윈이 서둘러 다가가자 에젤드는 어물어물 뒤로 물러났다. 에드윈은 안장 밑에 깔린 등자 끈의 길이를 에젤드의 키에 맞게 조절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에도 에젤드의 멍한 눈빛은 제정신을 찾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방황하던 그녀의 눈이 결국 자리를 잡고 가 닿은 곳은 등자 끈을 만지고 있는 에드윈의 손등과 팔이었다. 또다시 심하게 벗어진 피부와 부풀어 오른 물집들을 본 에젤드는 벌에 따끔하게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미간을 옴짝 찌푸렸다. 등자에 집중한 에드윈은 그녀가 무언가에 실망한 사람처럼 시무룩하여 짧은 한숨을 폭 내쉬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자, 이제 타 봐요.”


에드윈이 뒷걸음질하며 에젤드에게 자리를 내주었으나 웬일인지 그녀는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애꿎은 잉그램의 등만 뚫어질 듯 노려보고 있는 그녀에게 다시 권하기도 난처해서인지 에드윈은 아리송한 얼굴로 그저 그녀의 반응만을 잠잠히 기다리고 있었다.


꽤나 한참을 기다렸다고 느껴질 때쯤, 옅은 숨만 들이쉬고 내쉬던 에젤드는 시선의 미동도 없이, 느닷없이 말했다.


“싫습니다.”

“무, 뭐라고요?”


에드윈은 무엇을 잘못 들었나 싶은 얼굴로 되물었다. 에젤드는 이번엔 그의 눈을 보고 같은 어조로 다시 한번 말했다.


“싫습니다. 오늘은 안 타겠습니다.”

“‘안 됩니다’가 아니라…… ‘싫습니다’예요?”

“네.”


그 음성이 하도 결연해서 절로 그녀의 눈치가 보이는 듯, 에드윈은 입을 벌리고 눈을 껌벅껌벅하며 고개를 가볍게 한 번 끄덕했다.


“그……래요. 싫으면 타지 말아야죠. 같이 걸읍시다.”


에드윈은 잉그램의 고삐를 잡아끌었다. 에젤드는 에드윈의 옆으로 가 조용히 발을 맞추어 걸었다.


그렇게 앞을 보며 걷다가 또 에젤드를 흘깃 보기를 반복하던 에드윈이 어느 순간 슬쩍 적막을 깨며 말을 걸었다.


“그 가방은 뭐예요? 무게가 꽤 나갈 것 같은데, 그거라도 잉그램 등에 싣고 갈래요?”

“이건…….”


에젤드가 대답 대신 등에 멘 가방을 가슴 앞으로 돌려 메고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내어 보였다.


“사과?”

“네. 집에서 키운 것입니다. 먹기 좋게 익었길래 나누어 먹으려고 조금 따 왔습니다.”

“조금이 아닌데? 이 정도 양이면…… 모친께서 한소리 하셨겠는데요?”

“괜찮습니다. 부자 친구에게 줄 거라고 했더니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부자 친구?”

“네. 지난번에 어머니가 누가 이렇게 고기를 후하게 줬냐고 물으시기에, 부자인 친구가 줬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 부자 친구란 말이죠?”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무거운 분위기에 줄곧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에드윈은 그제야 은근한 미소를 되찾고는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데, 부자 친구라……. 내가 가진 별명들 중에선 최고의 별명이네요. 하나 먹어 봐도 돼요?”


에젤드는 사과 한 알을 꺼내어 겉에 묻은 먼지를 앞치마로 쓱쓱 닦은 뒤 에드윈에게 건넸다.


“잘 먹을게요.”


에드윈은 사과를 받자마자 한 입을 서걱 베어 물었다. 곧 눈이 동그래진 그가 사과를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음, 정말 맛있네요. 당신도 먹어 봤어요?”

“아니요, 아직.”

“어서 하나 먹어 봐요. 맛이 기가 막혀요.”


에젤드는 그의 말대로 사과 한 알을 꺼내어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에드윈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그녀도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살며시 머금는 듯했다.


“맛있죠?”


에드윈이 얼굴을 바라보며 묻자 에젤드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마음이 가벼워진 에드윈은 사과 한 입을 더 베어 물고는 에젤드를 한 번 슬쩍 보더니, 그녀가 앞에 멘 가방을 쑥 잡아 올려 자신의 한쪽 어깨에 휙 걸머메며 말했다.


“이건 내가.”


그러자 잠시 뜸을 들이던 에젤드가 그의 가슴 앞으로 손을 쑥 내밀었다.


“그럼 저에게 주십시오.”

“뭘요?”

“고삐요. 제가 끌어 보겠습니다.”

“음, 그럴래요?”


에드윈은 고삐를 에젤드의 손에 넘기고 에젤드가 있던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에젤드는 잉그램의 옆으로 가 말을 끌었다.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숲의 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은 걸었다. 에드윈이 사과를 한 입 깨물면, 에젤드도 역시 사과를 아삭 깨물었다. 에드윈이 가방을 한 번 올려 메면, 에젤드는 잉그램을 한 번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걸었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아롱아롱 비껴드는 기다란 햇살에 비친 에젤드의 얼굴이 눈부시게 환해지자, 근심을 덜어 낸 에드윈의 낯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뭐가 좋은지, 에드윈은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가 멍이 든 입가에 아린 통증을 느낀 듯 얼굴을 찡그리고는, 아무도 듣지 못할 신음 소리를 재빠르게 삼켜 내며 급히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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