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E에게,
잘 지내고 있나요? 나는 당신이 잘 지내기를 날마다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부디 몸도 마음도 아프지 말아요. 나의 사랑, 당신에게서 직접 잘 지낸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 앞에서 웃을 줄도 울 줄도 모르던 나는 어느샌가 수다쟁이가 되어 이렇게나 재잘거리고 있는데, 당신의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들을 수가 없다는 게 오늘은 몹시 서글프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는 곧 다시 만날 테니까. 그때가 되면 다 말해 주세요. 들려줄 이야기가 아무리 많아도 다 들려줘요.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 다 모아 놓았다가 나에게 모두 말해요.
오늘 콜튼 선생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폐하와 귀족들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폐하께서는 재판 없이 사건을 종결하려 하시나, 많은 귀족들의 반발로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폐하께서는 강직하고 단호한 분이시라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분이, 존엄하신 군주께서, 귀족들의 의견 때문에 아들의 거취에 대한 결정도 마음대로 내리지 못하시는 건지. 그들이 그렇게도 무서운 존재인 건지.
아니라고 했어요. 콜튼 선생님은, 그들이 무서운 사람들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신을 무서워하는 거라고 했어요. 스스로도 빈털터리라 칭하는 당신을, 백성들조차 손가락질하며 멸시하는 당신을, 그들은 당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두려워해 왔다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당신이 폐하의 아들이라서? 적통 왕자이고, 왕세자 다음가는 서열에 드는 사람이라서? 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은 마음 깊이 숨겨진 두려움마저도 위안하고 다독여 덮어 주는 사람인데, 왜 누군가에게는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요? 당신은 두려운 시선을 받는 것에는 익숙해도 그 두려움을 밟고 서는 방법은 알지도 못하고, 오히려 누군가 자신을 두려움으로 대하면 애달파하는 사람인데, 그런 당신이 또 다른 종류의 잔인한 두려움, 그 칼날 같은 경계심들에 한평생 맞서 왔고 맞서야 할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나 가엾고 가슴 아파요. 당신의 삶이 퍽이나 고달팠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 나는 당신을 짓누른 삶의 무게가 어떠한 것이었을지 감히 가늠조차 해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귀하디 귀한 나의 사랑. 언젠가 당신이 모든 하루하루를 버티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날이 올까요? 그런 날이 오면 좋겠어요.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희망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끈질기게 버티며 사는 길을 택할 거예요.
사랑하는 이여. 당신을 위한 이런 내 사랑을 반드시 기억해 줘요. 부디 마음의 우울이 없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내야 해요. 또 편지할게요.
당신의 사랑,
E
추신 : 오늘 그린 그림을 보세요. 이게 당신의 발인 것을 알아볼 수 있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에게 당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그러니 고작 발을 그렸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내가 이 발을 보았을 때 나는 기분이 좋아졌고, 마음이 밝아졌고, 안도했어요. 당신은 몰랐겠지만, 아니 사실 그때는 나도 몰랐지만, 나는 당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어느 때를 말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죠? 우리가 처음으로 성을 벗어나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으로 길을 나섰던 그 가을날을 말하는 거예요. 오늘은 왠지 그날이 많이 생각나네요. 날씨는 조금 쌀쌀했어도, 하루 종일 내 마음은 한 토리의 폭신한 실뭉치를 만지듯 몽클하고 따스했어요. 처음인 것이 너무나도 많았던 그날, 나는 아주 많은 것을 보고 느꼈죠. 당신이 알게 해 준 그 모든 것들은 정말 말할 수 없이 소중해요. 당신도 오늘은 그날을 한 번 더 떠올리고 한 번 더 웃어 보지 않을래요?
에드윈은 허리를 구부린 채 두 팔로 작업대를 짚고 서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에젤드에게 물었다.
“자, 어떻게 하고 싶어요? 첫째, 기념으로 집에 가져간다. 둘째, 기념으로 여기에 보관해 둔다. 셋째, 기념으로 나눈다.”
에젤드의 손에는 아이니스의 가을 경치가 근사하게 그려진 도자기 판이 들려 있었다.
에드윈이 말했다.
“당신의 첫 번째 작품이잖아요. 특별한 것이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야죠.”
에젤드는 고민에 빠졌다.
“집에 가져가고 싶지는 않은데…….”
그녀가 에드윈을 보며 물었다.
“기념으로 나눈다면…… 누구와 나누는 것입니까?”
에드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와 나누는 건지, 오늘 한번 확인해 볼래요?”
에젤드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그러려면 성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오늘은 화요일이 아니잖아요. 화요일에는 오후에도 여유가 있다고 했지만……. 오늘은 언제까지 시간이 돼요?”
“얼마나 멀리 나갑니까?”
“여기에서 언덕을 두 개 정도 넘어야 하는 곳이에요. 가 봤어요?”
“아니요. 아이니스와 윗마을 말고는 다른 곳에 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요? 당신 정말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군요. 새로운 곳에 가 본다면 당신에게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겠네요. 어때, 시간이 괜찮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드와이트도 함께 갈 거예요.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따라가는 거지만요. 가끔 이렇게 드와이트가 왕진을 갈 때 내가 동행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오늘은 드와이트가 아침에 혼자 출타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고 있죠. 왕진이 예약되어 있는 집은 한 집이라고 하는데, 마을에 아픈 사람이 더 있으면 조금 더 지체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 다시 한번 묻겠는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오.”
에젤드의 적극적인 대답이 의외였는지, 에드윈이 흥미로운 얼굴로 허리를 펴고 섰다.
“그럼 잠깐 기다려요. 드와이트에게 언제 출발할 예정인지 물어보고 올게요.”
에드윈은 상자 안에 도자기와 짚을 번갈아 쌓아 넣었다. 도자기가 깨지지 않도록 세심히 확인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짚을 한 층 더 두껍게 쌓은 뒤 상자의 뚜껑을 닫고 가방 안에 넣어 마무리하자, 드와이트가 가방을 어깨에 멜 수 있게 에드윈을 도왔다.
쌀쌀해지는 날씨에 얇은 외투를 하나씩 걸친 채로, 에드윈은 도자기 상자를 메고, 드와이트는 의료 용품이 담긴 가방을 메고, 에젤드는 하녀가 준비해 준 점심 도시락을 메고 떠날 채비를 마쳤다.
“이제 출발합시다.”
에드윈이 신호탄을 쏘듯 말하자, 세 사람이 동시에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대문의 반대편 끝자락에 있는 뜰의 뒷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왔다. 늘 다니던 숲길이 아닌 곳으로 처음 발을 딛는 에젤드의 얼굴에는 설렘과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 뒷문을 열자마자, 낮에도 빛나고 싶어 땅으로 우수수 쏟아져 내린 별과 같은 새하얀 바람꽃들이 온 들판에 흐드러지게 깔린 것이 보였다. 돌담에 가려져 있기도 했거니와, 담 안의 좁은 경계 안에서 바깥의 세상을 둘러볼 생각을 해 보지 못한 에젤드에게는 그야말로 현실에서 꿈의 나라로 건너온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할 만큼 눈부신 별천지였다. 성에서부터 지대가 점점 높아지는 비탈길로 걸으며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자, 그제야 돌담의 가장자리를 따라 오밀조밀하게 꾸려진 텃밭을 비롯하여, 더욱 넓게는 광활한 바람꽃밭 주위로 성벽처럼 서 있는 울창한 숲도 한눈에 보였다. 몰려드는 가을바람에 한 방향으로 휘어진 채 부산스럽게 흔들리는 노랗고 붉은 단풍과 초록의 나무들이 색색으로 어우러져 아주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에젤드가 사방의 숲을 두루 살펴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때, 드와이트가 급히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엇, 이런. 세이지와 라벤더를 챙긴다는 걸 깜박했네요. 죄송하지만,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드와이트는 짊어졌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서둘러 성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돌담에 이르러 뒷문을 열려던 그는, 무슨 일인지 이내 다시 발길을 돌려 두 사람에게로 달려왔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에드윈에게 흐린 낯빛을 하고 말했다.
“전하, 레스터가…….”
그러자 궁금증에 올라갔던 에드윈의 눈썹이 아래로 스르르 떨어지며 그의 표정도 사뭇 무거워졌다. 에드윈은 머뭇거림 없이 드와이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에젤드와 먼저 가 있게. 세이지와 라벤더는 내가 챙겨 갈 테니 약방 열쇠는 나에게 주고. 에젤드, 이따 봐요.”
드와이트에게서 열쇠를 건네받은 후, 에젤드에게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던지듯 인사를 남긴 에드윈은 도로 성으로 향했다.
“우리는 가죠.”
에젤드가 멀어지는 에드윈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자, 드와이트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어 올려 어깨에 메며 말했다. 어딘지 마뜩지 않은 표정으로, 에젤드는 드와이트를 따라 돌아서서 무거운 발을 끌었다. 발걸음이 무겁기는 드와이트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몇 발짝을 걸었을 때, 에젤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레스터라면……. 제가 다리를 다쳐 성에 왔을 때 왕자님과 함께 있던 시종이 아닙니까?”
드와이트는 걸음을 멈추고 에젤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굳이 그 짧은 대답을 하려고 걸음까지 멈춘 것일까. 드와이트는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는 것처럼 에젤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결국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묵묵한 걸음을 뗄 뿐이었다. 에젤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를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