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이건 명령이에요."

by 해린C

다그닥거리는 말발굽이 숲길의 흙을 박차며 시원하게 내달렸다. 제법 속도를 내어 달리던 에드윈은 숲의 길목이 가까워 오자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목을 기다랗게 뺐다. 후, 하고 안도의 숨을 내뱉은 그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섰다. 그러면서도 높다란 나무들 사이로 빛이 비치어 들어오는 숲 어귀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잉그램에게 묻는 말인지 알지 못하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좀 천천히 오려나?”


결국에는 기다림이 조금 더 길어질 것이라고 판단한 듯, 그는 고삐를 묶어 두려 나뭇가지 위로 손을 올렸다.


그때였다. 아직 새끼손가락만 하게 보이는 에젤드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끝에 걸리는지, 기척을 느낀 에드윈이 고개를 돌렸다.


“에젤드!”


그는 여전히 먼발치에 있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에젤드는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에드윈의 앞에 서고서야, 그녀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셨습니까, 전하. 저 오늘은…….”


에젤드가 심상치 않게 말끝을 흐리자, 에드윈이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걸어가겠습니다.”


에드윈은 잠시 당황했으나 침착하려 애쓰며 대꾸했다.


“아, 그럴래요? 그래요, 그럼…….”


에젤드는 앞도 보지 않았다. 무언가 혼란스러운 생각에 빠져든 것처럼 어지럽고 상심한 얼굴로 그녀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내내 발끝만 보며 걷는 에젤드에게 에드윈이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에젤드는 에드윈 쪽으로 고개를 틀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뚝뚝한 말투로 답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에드윈은 평소 같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몹시도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그가 말했다.


“안색이 안 좋은데…….”


에젤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말이라도 더 걸어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는 요량으로, 에드윈이 물었다.


“손에 있는 그건 뭐예요?”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이 그가 바라던 방향은 아니었을 테니. 별 뜻 없는 그의 물음이 마음에 품은 은우를 건드려 마침내는 겉으로 비적비적 새어 나오고야 마는 듯, 에젤드의 얼굴에는 더욱 짙은 그늘만이 드리웠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에드윈을 보았다. 그것이 그날 처음으로 그에게 준 눈길이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냉담하기만 했다.


“왜 궁금해하십니까?”


차가운 물음과는 달리 뜨겁게 붉어진 눈시울. 에드윈은 무슨 말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버벅댈 뿐이었다.


“나는 그저……. 뭘 가지고 왔나, 그것으로 뭘 하고 싶은가 해서…….”

“하고 싶은 것 없습니다.”


싸늘한 한 마디를 던진 에젤드는 에드윈이 화두에 올린 자기 손의 종이 뭉치를 한 번 보고, 에드윈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팔을 뻗어 에드윈의 손 앞에 종이를 더뻑 들이밀고는, 쓰린 눈빛으로 말했다.


“차라리 왕자님께서 이것 좀 버려 주십시오.”


얼떨결에 종이를 넘겨받은 에드윈은 그저 우두커니 서서, 그녀의 쓰라림까지도 온몸으로 받고 서서, 애처로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받아 쥔 종이를 펼쳤다.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를 한 장 두 장 조심히 쓰다듬어 펴는 그의 손바닥과 함께, 그의 눈동자 역시 넘기는 그림 하나하나를 애틋하게 어루만졌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건 당신 그림이잖아요. 이 귀한 걸 왜 버리라고…….”


에젤드가 대뜸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귀하지 않습니다. 제 그림이 무엇이 귀합니까? 왜 계속 대단하다, 귀하다 하십니까?”


그러고는 애원하듯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러지 않습니다.”


에드윈은 또다시, 하지만 더욱 완고히 고개를 저었다.


“내 눈엔 귀해요. 진심으로. 나는 이거 버리고 싶지 않아요.”


그는 그림을 두 손으로 살며시 모아 쥐고는, 마음을 가다듬은 뒤 에젤드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에젤드, 내가 뭔가 더 기분 상하게 만든 것 같은데, 미안해요. 내 말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면 나에게 기탄없이 말하고 기분 풀어요. 부디 마음 아파하지 말아요.”


고통을 덜어 주려 한 말에, 에젤드는 오히려 차오르는 고통을 참아 내려 눈을 꼬옥 감았다. 그러다가 문득 촉촉이 젖은 속눈썹을 치켜올리며 흔들리는 음성으로 울분을 토해 냈다.


“사과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는 정말 왜 이러십니까? 왜 저를 위로하십니까? 다른 귀족들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세찬 바람에 휩쓸리듯 울부짖는 에젤드의 말에 에드윈이 멈칫하며 물었다.


“지금 내가 다른 귀족들 같지 않아서 화가 난 거예요?”

“저는 화나지 않았습니다.”

“주먹을 이렇게 꽉 쥐었는데도?”


에젤드는 에드윈이 가리킨 자신의 주먹 쥔 손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는 다른 한 손으로 그 손을 급히 감쌌다. 어쩌면 그녀가 느낀 무안함이 순간 격렬해진 감정을 가라앉혀 주기에 적절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흥분이 빠져나간 후의 무기력해진 목소리로, 아무 의미도 담기지 않은 시를 읊어 대는 것처럼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런 것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하……. 대체 왜……. 저는 정말, 정말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가끔 답답하고 허전하긴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단 말입니다. 정말로 괜찮았습니다.”


왜일까. 에젤드는 에드윈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미움이 없었다. 에드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을 탓하는 그녀의 눈길에도 알았다는 듯, 다 헤아려진다는 듯, 너그러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으리라.




“이제 좀 진정이 되었어요? 내가 말 걸어도 되겠어요?”


성에 거의 다다랐을 때, 에드윈이 고개를 외로 꺾어 에젤드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아직 침울함을 온전히 내버리지 못한 에젤드는 반대로 고개를 돌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


“왜…… 왕자님께서 제 눈치를 보십니까.”

“이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눈치를 안 봐요.”


에젤드가 자신을 끝내 돌아보지 않자 에드윈은 그녀의 앞으로 가 걸음을 멈추게 하고는, 그래 놓고 왜인지 땅만 내려다보며, 차분하고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에젤드, 내 태도나 언행이 진정 당신을 더 괴롭게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말이에요, 다른 귀족들처럼 하는 거. 사실 어떻게 하는 건지 나는 잘 몰라요.”


에드윈이 숨겨 놓은 진심을 고백하는 소년처럼 마음을 털어놓자, 그제야 에젤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에드윈도 눈을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렇게 안 해 봤어요. 아니, 해 봤대도, 지금은 다 잊어버렸어요.”


그의 진솔한 표현에 더욱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에젤드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에드윈은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무엇을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에젤드. 오늘은 그림 그리지 말아요. 나도 오늘은 도자기 안 만들래요.”


에젤드가 난처해진 낯빛으로 물었다.


“이만 돌아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에드윈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돌려보내면 당신 혼자 어디 주저앉아서 진짜로 펑펑 울어 버릴 것 같아서 그건 안 되겠고……. 우리 오늘 땡땡이치고 어디 놀러 갈래요?”

“네?”

“아니, ‘놀러 갈래요?’ 말고, 놀러 갑시다. 이건 명령이에요.”


그는 단단히 힘을 주어 말해 놓고는 금세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어때요? 나 좀 귀족 같았어요?”


에드윈의 싱거운 소리에 에젤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웃자, 에드윈의 눈이 그녀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이리저리 좇으며 함께 웃었다.


“농담이에요. 원하지 않으면 안 가도 돼요.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생각지 않게 터져 나온 웃음이 가슴에 엉긴 침울을 뻥 걷어차서 내쫓아 버린 것처럼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그러나 또렷하고 곧은 목소리로, 에젤드가 대답했다.


“가겠습니다. 명령이라 하셔도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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