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걱정 마세요. 다 기억하고 있어요."

by 해린C

“오늘 장 볼 물건의 목록이야. 향신료는 쓸 만한 게 있으면 네가 알아서 더 사 오고.”

“네, 어머니.”


어머니가 식탁 위로 건네어 오는 종이를 받아 든 에젤드는 그것을 눈으로 한 번 쓱 훑어보고 수프 접시 옆에 놓아둔 뒤 식사를 이어 갔다.


그것뿐이었다. 그 외의 다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아, 어머니와 다섯 남매가 모여 앉은 아침 식사 시간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마치 사람의 목소리를 더 섞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먼저 깬 것은, 전에 에젤드의 그림을 쏘시개 더미 위에 올려놓았던 그녀의 언니였다. 에젤드의 언니는 수프를 후루룩대며 앞에 앉은 두 청년에게 말했다.


“오빠들, 이번엔 잘 좀 해 봐. 어머니 아버지가 그렇게나 며느리를 원하시는데. 포도 축제만큼 신붓감을 찾기에 좋은 기회가 또 어디에 있겠어? 나도 엄청 기대하고 있단 말이야. 한 번에 올케언니 두 명이 생기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녀의 방정스러움 때문이었을까, 생김새도 콕 빼다 박은 두 청년이 어쩌면 반응마저도 그리 똑같은지, 그들은 그저 시큰둥한 얼굴로 입술을 실룩거리며 같은 동작으로 소금 통의 소금을 떠서 수프에 톡톡 뿌릴 뿐이었다. 어머니가 빵을 뜯으며 아들들을 대신해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급 원단으로 정장을 준비해 두었으니 호들갑 떨 것 없어. 네 오빠들이 외모로 보나 매너로 보나 어디 가서 빠지는 타입은 아니잖니. 늘 하던 대로만 하면 괜찮은 아가씨들이 줄을 설 거다.”


어머니의 강한 자부심에 동의할 생각은 없는 듯, 에젤드의 언니는 맞은편에 앉은 또 다른 여인과 짓궂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키득댔다. 그러고는 아직 화제를 바꿀 생각이 없는지, 이번에는 그 여인에게로 초점을 옮겨 말을 이었다.


“언니, 이번 축제는 예년보다 일찍 시작한다니까 우리도 일찍 나가자.”

“그래. 그런데 넌 입을 옷은 다 준비해 놓고 하는 소리야?”

“물론이지. 작년에 입었던 노란색 드레스를 또 입을 생각이야. 조금 튀기는 하지만, 덕분에 사람들 이목 끌기에는 딱이었거든. 언니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닌데, 좋은 신랑감 제대로 잡으려면 신경 좀 써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이번엔 좀 우아한 것으로 준비했지. 왜, 지난달에 같이 본 흰 드레스 있잖아.”

“그 러플이 잔뜩 달린 드레스 말하는 거야? 그거 결국 샀구나! 좋아, 기분이다. 이왕 힘주는 김에 내가 손 좀 보탤게. 지난번에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사 오신 머리 장식, 언니 빌려줄게. 붉은 꽃 장식이니까 흰 드레스와 잘 어울릴 거야.”


에젤드의 작은언니는 머리 장식 이야기에 한창 열을 올리더니, 이번엔 에젤드를 돌아보며, 측은히 보는 것인지 같잖게 보는 것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우리 불쌍한 테사, 넌 아직 드레스가 한 벌도 없잖아? 너도 이제 스물이 되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아버지가 네 것도 장만해 주실 거야. 우리도 그때나 되어서야 드레스라는 걸 구경했단다. 그치만 너도 이번에 기분 좀 내고 싶다면 나에게 말해. 너에게 빌려줄 여분의 드레스 정도는 있으니. 화장품을 빌려줄 수도 있고.”


에젤드는 고개를 저으며 수프를 떴다.


“괜찮아. 난 조금 돌아보기만 하고 올 생각이야.”


그녀의 짧은 한 마디에 작은언니는 언짢은 얼굴로 에젤드의 팔을 획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떠올린 수프가 흩날려 일부는 도로 접시에 퐁당 빠져 버리고 일부는 식탁 위에 후드득 떨어지고 말았다. 에젤드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언니를 돌아보았으나, 작은언니는 그런 표정쯤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며 지근지근 타일렀다.


“이렇게 방심하고 있다가 세월 훅 가는 거야. 외모는 어릴 때부터 가꿔 버릇해야지, 시집갈 나이가 되면 그땐 이미 늦다고. 네가 얼굴이 빼어나게 예쁜 것도 아니고, 목구멍에서는 경첩 돌아가는 것마냥 쇳소리나 나고. 그렇다고 손재주가 특별히 좋기를 해, 머리가 좋아 뭐라도 빨리 배우기를 해. 무슨 자신감으로 이렇게 허송세월하니? 종이에 되지도 않는 그림 그릴 시간에 네 얼굴에 그림을 좀 그리라고.”


잔소리가 길어지자 큰언니가 개입했다.


“넌 동생한테 말이 너무 심하다, 얘.”

“내가 뭘? 아주 객관적으로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데.”


작은언니는 에젤드를 매우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아휴, 됐어. 얘는 포기하자. 아무튼 언니, 아침 먹고 나서 우리 방으로 와. 아까 말한 꽃 장식 보여 줄게.”

“아버지가 언니에게 사다 주신 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에젤드가 끼어들자 작은언니가 슬쩍 눈을 흘기며 물었다.


“사다 주신 거 뭐?”

“그거 꽃 장식 아니야. 지난번에 아버지가 사 오신 건 깃털 장식이야. 붉은색도 아니고, 검은색이야. 흰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검은 깃털 장식을 달면 칙칙해 보일지도 몰라.”


작은언니는 기가 막히다는 듯 팔짱을 끼고 눈을 째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관심 없는 척하더니, 너 은근히 부러웠구나? 내 물건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자세히 기억하는 걸 보니.”


에젤드는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봤으니까 기억하는 거야.”


작은언니가 웃음을 풋 뿜었다.


“봤다고 기억하는 게 어디 있니? 그럼 내가 본 건 뭔데? 그래, 이따가 한번 확인해 보자. 검은 깃털 장식 아니기만 해.”


우겨 대는 언니를 물끄러미 보다가, 에젤드는 그저 체념한 듯 물 잔을 들었다.


그때 에젤드의 어머니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며 물었다.


“그런데, 테사. 지난번에 아버지가 오신 날 네가 그 자리에 있기는 했었니?”


에젤드는 물 한 모금을 입에 넣지도 못한 채 들었던 물컵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려다가 그마저도 단념하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날 집에 없었던 적 없어요. 밖에 있다가도 시간 맞춰 들어왔었잖아요.”

“글쎄.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날만큼은 집에 없었을 수도 있잖아. 붉은 꽃 장식과 검은 깃털 장식은 너무 다르기에 하는 소리야. 아무리 그래도 네 언니가 자기가 받은 선물을 영 딴판으로 기억하겠니.”


에젤드는 수프 접시 위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러고는 매우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맞아요, 어머니. …… 그랬을지도 모르죠. 그날은 제가 집에 없었나 봐요.”


접시 안의 수프가 한참이나 남았지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웬일로 이렇게 일찍 나가?”


큰언니가 묻자 에젤드는 어쩐지 서글픈 눈빛을 하고 말했다.


“나는 늘 이 시간에 나갔어.”


큰언니는 못 미더운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에젤드는 의자를 밀어 넣었다.


“너…….”


돌아서려 하는 에젤드를 올려다보며,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을 풀지 못한 작은언니가 톡 쏘아붙였다.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그 정신 사나운 종이 쪼가리들이나 잘 치우고 나가. 지난번처럼 덤벙대다가 빠뜨리지 말고 부엌에 싹 다 가져다 놔.”


뾰족하게 날이 선 그 말씨에, 큰언니가 또 한번 동생을 나무라며 말했다.


“너는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애가 왜 그렇게 책상을 못 치워서 안달이니? 괜히 심통 나서 하는 소리니 그냥 무시해, 테사.”


그나마 느껴진 온정에 찌푸려졌던 에젤드의 미간이 다시 펴지려던 순간, 큰언니는 주머니에서 고이 접힌 편지 한 통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아, 그리고 이것도 네 그림이랑 같이 좀 버려 줄래? 쿠퍼 씨네 둘째 아들이 나만 보면 편지를 찔러주는데 귀찮아 죽겠어, 정말.”


에젤드는 그저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편지를 받아 들었다. 속히 그곳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처럼, 양볼이 붉어진 그녀는 편지를 받자마자 빠르게 몸을 돌렸다.


“잠깐, 테사.”


어머니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쩌면,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에젤드의 얼굴에 스친 것은 아주 찰나였다. 하지만 그 혹시나에 찬물을 끼얹은 어머니의 한 마디는 그 표정을 아주 싸늘하게 얼려 버리면서도 뜨거워진 얼굴을 더욱 벌겋게 달아오르게 만들고야 말았다.


“장 볼 물건 목록은 가지고 가야지?”


어머니의 시선은 에젤드가 아닌 식탁 위 수프 접시 옆을 향해 있었다. 기다려도 어머니의 눈길은 에젤드에게로 돌려지지 않았다. 무엇을 감추려는지, 에젤드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악다물린 그녀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말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걱정 마세요. 다 기억하고 있어요.”


에젤드가 떠난 빈자리에는 가족들의 기가 찬 듯한 헛웃음 소리가 메워졌다. 그 소리는 식당 밖으로 어슴푸레 흘러 나가, 돌아서 걷는 그녀의 등 뒤에 송곳처럼 박혔다.




어깨가 축 처진 채, 에젤드는 느릿한 걸음으로 부엌에 들어섰다. 몸에 있는 힘이 다 빠져나간 듯 보였으나, 종이 뭉치를 아무렇게나 구겨 쥔 한쪽 손에는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에젤드는 다른 한쪽 손에 든 누군가의 편지를 냄비 아래의 꺼진 장작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그 누군가가 정성스레 붙였을 편지 겉봉의 가냘픈 야생화 한 송이는 잎을 다 떨군 채로 시들해진 꽃대에 허무히 남은 꽃술만을 가까스로 붙들고 있었다. 에젤드는 외면당한 그 마음을 애도하듯 편지의 마지막 모습 위로 안타까운 눈길을 보낸 뒤, 눈을 돌려 선반을 바라보았다. 쌓여 있는 종이 위에 잔뜩 구긴 종이 뭉치를 포개어 올려놓으려던 손이 돌연 주춤, 그대로 멈추었다. 그러고는 이내 덥석, 에젤드는 손에 쥔 종이를 내려놓는 대신 방금 한 통의 편지에게 작별을 고한 빈손으로 선반 위의 종이 역시 아무렇게나 뭉쳐서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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