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우리가 같이 주는 선물이야."

by 해린C

벤치에 앉은 에젤드와 두 아이를 앞에 두고, 에드윈은 등에 지고 있던 가방을 조심스레 풀어 그들의 발 앞에 내려놓았다.


“에젤드를 찾으면 나도 선물을 주겠다고 했지?”


에드윈이 가방을 열고 그 안의 나무 상자를 꺼내어 뚜껑을 열자, 아이들의 눈이 기대감에 반짝반짝 빛났다. 일단 맨 위에 두둑이 덮어 놓은 지푸라기의 한편을 걷어 내니, 매끄럽고 단단한 도자기 표면 위에 그려진, 바로 눈앞에서 춤을 추는 듯 생생한 형태의 나무 이파리들이 형형색색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한편의 지푸라기를 쓸어 냈을 때에는, 옹기종기하게 자리한 집들로 이루어진 마을과 그 가운데를 흐르는 푸른 냇물, 그리고 마을을 감싸 안은 웅장한 산들과 하늘을 뒤덮은 양떼구름이 나타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온 마을이 가을 향연의 분위기에 흠뻑 젖은 듯, 가까이에서 하늘거리는 풀꽃들의 소박한 무도회부터 저 멀리 지평선 끝까지 굽이굽이 파도치는 초록에 덧댄 황금빛 곡식밭의 줄무늬 융단, 그 사이사이에 알알이 박힌 가을꽃들의 보석 장식까지, 온갖 풍광이 도자기 위를 빈틈없이 꽉 채워 휘감고 있었다. 선은 화려하지 않으나 유려했고, 색은 담백하나 초라하지 않았다.


“우와!”


데이지가 감탄하며 벤치에서 내려와 상자 앞에 웅크려 앉고 그림을 더욱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클라라도 자기 언니를 따라 얼른 벤치에서 내려와 앉더니, 살며시 손을 뻗어 도자기 위의 그림을 집게손가락으로 콕 찍어 보았다.


“만져 봐도 돼.”


에드윈이 남은 지푸라기를 모두 털어 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이 반질반질한 도자기 위의 그림을 닳도록 하염없이 쓰다듬기 시작했다.


데이지가 물었다.


“엄청 멋있어요. 이거 우리 선물이에요?”

“응, 너희 주는 거야. 그런데 사실,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 아니야.”


에드윈이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는 양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속삭이자, 데이지도 그를 따라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럼요?”


에드윈은 질문에 대한 답으로 고개를 들어 에젤드를 쳐다보았고, 두 아이는 그의 시선을 따라 뒤에 앉아 있는 에젤드를 휙 돌아보았다. 에젤드는 수줍은 듯하면서도 설레는 얼굴로 그런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클라라가 다시 에드윈을 보며 물었다.


“에젤드 언니?”

“응, 이건 에젤드가 그린 그림이야.”

“우와아아!”


아이들이 입을 헤벌리고 다시 에젤드를 돌아보며 놀라워하자, 에젤드가 민망해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혼자 만든 게 아니야. 왕……, 에드 삼촌하고 같이 만든 거야. 도자기는 삼촌이 만들고, 그림은 내가 그렸어. 우리가 같이 주는 선물이야.”

“맞아. 같이 주는 선물이야.”


에드윈이 미소 띤 얼굴로 에젤드를 보며 동조한 뒤, 다시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에드윈의 물음에 데이지가 도자기 판을 손에 들고 흥분하여 답했다.


“너무너무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이거 꼭 언니가 이렇게 놓고 꾹 누른 것 같아요.”


아이는 도자기 판을 든 양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가 뒤로 쑥 당기면서 거의 소리를 지르는 수준으로 우렁차게 말했다. 아마도 풍경을 판에 박아 낸 것처럼 그림이 사실적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격앙된 반응에, 에드윈이 뿌듯한 얼굴로 에젤드를 보며 말했다.


“우리 둘 다 처음이라 그렇게나 노심초사했는데, 변색도 균열도 없이 정말 잘 나왔어요. 이 정도면 아주 성공적인 것 같죠?”

“그런 것 같습니다. 너무 다행이에요.”

“그리고 봐요.”


에드윈이 두 팔을 펼쳐, 양손과 무릎을 땅바닥에 딱 붙인 채로 그림에 푹 빠져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을 보여 주었다.


“당신은 이미 대단히 사랑받는 작가예요.”




펜을 든 에드윈의 손이 책의 첫 번째 페이지 위에서 휘휘 맴돌았다. 벤치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네 사람의 시선은 오로지 그 펜 끝만을 향해 있었다.


“그럼 에젤드 이름은 여기에……. 그리고 내 이름은 여기에, 이렇게 써 달라는 거지?”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드윈이 책장 위에 둥둥 떠다니는 두 개의 구름 같은 이름들 사이에 에젤드와 자기 이름을 써넣었다. 아이들은 종이 안에 채워진 동일한 필체의 이름 네 개를 보고 몹시 만족스럽게 웃었다.


클라라가 에드윈의 팔을 흔들어 주의를 끌었다.


“삼촌, 들어 봐요. 나는 크, 으을, 라라. 우리 언니는 데이, 즈, 이. 에젤드 언니는 에, 즈, 에을, 드! 우리는 소리가 똑같아요!”

“아하! 정말 그렇네?”


에드윈이 맞장구를 쳐 주며 에젤드를 대견스럽게 건너보았다. 에젤드는 부끄러워 입술을 맞다물었지만, 입꼬리만큼은 부드럽게 휘어 올라가 있었다.


“아주 중요한 걸 배웠구나. 이젠 이 책도 직접 읽을 수 있겠는데? 이렇게 하자. 너희들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되면 또 다른 책을 선물해 줄게.”


에드윈의 말에 데이지가 시무룩하여 머리를 수그리고 말했다.


“우린 아직 다 못 읽는데…….”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반짝 들고 물었다.


“삼촌이 가르쳐 줄 거예요?”

“당연하지.”


데이지가 방긋 웃자 에드윈도 아이를 내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끼익하고 현관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마침내 치료를 끝낸 드와이트와 아이들의 아버지가 모습을 보이자 네 사람이 곧바로 자리에서 웅기중기 일어섰다. 드와이트는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처치는 잘 끝났어요. 혹시나 덧날까 봐 좀 더 주의해서 살피다 보니 시간이 좀 걸렸네요.”


그는 허리를 숙이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웃음소리가 아주 끊이질 않던데? 재미있게 놀았어?”

“네에!”


아이들이 힘차게 답했다.


드와이트는 떠나기 전 아이들의 원기를 돋워 줄 의료용 사탕을 주겠다며 가방을 뒤적였다. 사탕이 어디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것인지 찾는 시간이 길어지자, 에젤드는 고작 반나절 동안에 몇 년 치가 될 만큼의 추억을 쌓으며 시간을 보낸 마당을 무심히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얼핏 뒤를 돌아본 그녀의 눈에 벤치 위의 책이 들어왔다. 에젤드는 책을 슬쩍 집어 들었고, 첫 번째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그 안의 뭉게구름 같은 네 개의 이름. ‘클라라’, ‘에드’, ‘에젤드’, ‘데이지’.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름을 훑어 읽던 그녀가 문득 사람들의 눈치를 쓰윽 살폈다. 그러더니 이내 살금살금 펜을 집어 올렸다. 그녀가 든 펜의 펜촉은 두 번째에 쓰인 이름, ‘에드’로 곧장 향했다. 그 이름 끝에 ‘윈’이라는 작고 귀여운 꼬리를 달아 준 에젤드는, 얼른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책을 있던 자리에 다시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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