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겁이 나서 그랬습니다."

by 해린C

“전하. 전하. 일어나 보십시오.”


상체는 바닥에 늘어져 있고 하체는 아직 계단에 걸친 채로 까무러쳐 있는 에드윈을 부르며 에젤드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그가 쓰러져 있는 계단 밑으로 보이는 음참한 지하실을 흘끔 엿보니, 깨진 병에서 쏟아진 액체와 들이친 비로 온 바닥이 축축이 젖어 있었고, 동강이 난 벽돌 조각들과 산산이 부서진 유리 파편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에드윈의 등은 피가 흠뻑 배어 그에게서 피 냄새가 났다. 단지 어깨만 살짝 만지는데도 뜨끈뜨끈한 열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전하!”


혹여 그가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난 에젤드가 조금 더 소리를 높여 그를 부르자, 에드윈이 슴뻑, 눈을 반쯤 떴다 감았다. 에젤드는 한 번 더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뜨거운 어깨에 닿는 차가운 손가락의 감촉, 땀에 젖은 몸에 시린 바람처럼 밀어닥치는 서늘한 체온에, 에드윈은 다시 눈을 떴다. 그가 에젤드를 보며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에즈…….”


그가 자신을 알아보자 에젤드가 그의 팔을 두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에드윈이 한쪽 뺨을 바닥에 비비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젤드가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그 역시 몸에 힘을 주려 애썼다. 에젤드는 그의 옆으로 내려가 그의 팔을 자기 목에 감았고, 에드윈은 조금 더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겨우겨우 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한 단 한 단 오르던 에드윈의 무릎이 단지 몇 단을 남겨 두고 힘을 잃어 꺾여 버리자, 에젤드도 축 늘어진 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함께 휘청였다. 그러나 버거워 끙끙대면서도 에젤드는 말했다.


“좀 더 힘을 빼셔도 됩니다. 제가 잘 버텨 볼 테니, 저에게 기대십시오.”


그 말에 에드윈이 조금 더 자신에게 의지하며 몸을 기대자 에젤드는 좁은 구멍에 끼인 몸을 빼치듯 낑낑거리며 그를 들어 올렸고, 힘겨운 분투 끝에 마침내 그의 몸이 계단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계단을 빠져나오니 에드윈의 다리에도 서서히 힘이 들어가 그를 부축하는 일이 그래도 조금씩은 수월해지고 있었다.


에드윈을 데리고 응접실에 들어선 에젤드는 눈앞에 차려진 것들을 보고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푹신한 담요와 쿠션이 놓인 안락의자가 장작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를 마주 보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앞에 놓인 탁자 위에는 깨끗한 수건들과 물이 담긴 대야, 주둥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주전자와 찻잔이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조금 전 출입문을 박차고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응접실의 모습이 그것과는 달랐으니, 에드윈을 깨워 데리고 오는 동안 누군가 재빨리, 그러면서도 정성스럽게 갖추어 놓은 것임이 분명했다.


어찌 되었든 잘된 일이었다. 에젤드는 에드윈을 벽난로 앞으로 데리고 가 안락의자에 앉히고, 쿠션을 받쳐 맥을 못 추고 흐느적거리는 그를 옆으로 눕게 했다. 그러고는 바닥에 앉은 뒤, 그를 찬찬히 살폈다.


그사이 정신이 조금 들었는지 까무룩 감기던 에드윈의 눈도 조금은 빛을 찾은 듯 보였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피어오르는 불꽃이 에드윈의 눈동자에 비쳐 발갛게 빛났다. 깜박. 그리고 또 깜박. 에드윈이 눈을 감았다 뜨며 에젤드를 보았다. 에젤드도 말없이 그의 두 눈에 갇힌 불꽃만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두 사람이, 하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눕고 하나는 엉망진창인 몰골로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당분간은 말을 하지 않기로 맹세라도 한 것처럼, 그저 시간을 잠시 곁에 붙잡아 놓고 서로에게 묵묵한 눈의 언어를 한 마디 한 마디씩 건네고만 있었다.


“왜…….”


에드윈이 먼저 피가 맺힌 입술을 달싹여 입의 말을 꺼냈다.


“왜 이렇게 젖었어요. 옷이 왜 이렇게…….”


가물가물 사위어 가던 정신을 차차 되찾으면서, 그제야 보랏빛을 띤 에젤드의 입술과 물방울이 구슬져 떨어지는 머리카락, 얼룩덜룩하게 흙물이 물든 옷이 그의 눈에 띈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기만 할 뿐 에젤드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에드윈은 여전히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까마득한 정신 속에 남아 있는 편시간의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시선과 뇌리에 스쳤던 모든 것들을. 이윽고 생각의 수면 위에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 하나를 붙잡자마자, 그는 뜨끔 놀랐다. 그러고는 의혹하여 물었다.


“당신이…… 그랬어요?”


에젤드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녀는 말을 잃은 사람처럼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숙였다. 옆으로 누운 에드윈의 어깨가 여리게 동요하며 오르내렸다.


그의 어깨 위에 비통한 눈길을 던지며, 에젤드는 그저 다른 말을 할 뿐이었다.


“많이 다치셨습니다. 지금 제가 무엇을 하면 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도와드리겠습니다.”


에드윈은 애달피 눈을 내리깔았다. 눈꺼풀에 반쯤 가린 눈동자에서도 그의 마음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고마움, 그러나 아픔을 들킨 것에 대한 자괴, 그럼에도 초연하려는 의지, 그런 것들이 철썩이는 파도처럼 흘러 흘러 지나갔다. 그러나 흘러가는 마음들은 그냥 흘러가게 두고, 그는 에젤드가 건넨 마음을 고이 받아 담았다.


“상처를 좀 눌러 줘요. 피가 멈출 수 있게.”


에젤드는 곧 깨끗한 수건 하나를 집어 들었고, 에드윈은 통증을 꾹 삼켜 내며 몸을 엎드렸다. 에젤드는 피가 척척히 번진 에드윈의 옷을 조심히 들어 올려 젖혔다. 살이 붓고 패고 찢긴 그의 등을 본 순간 미간이 찌푸려지며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갔지만, 그녀는 이내 홀로 침착히 마음을 다독이고는 출혈이 많은 상처 위에 수건을 올려 지그시 눌렀다. 열상이 압박되자 결국 견디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괴로움의 소리가 마음을 조여 왔지만, 에젤드는 꾹 참아 내고 지혈을 이어 갔다.


“미안해요.”


에드윈이 끙끙대는 신음 소리와 함께 속마음을 뱉어 냈다.


“이런 것 보게 하면 안 되는데……. 좋은 기억이 남아야 하는데…….”


에젤드의 손길이 멈추었다. 목구멍에서 자꾸만 차오르는 뜨거운 무언가가 있어 그것을 억누르기 위해 연신 침을 삼켜 마음을 가다듬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


“나쁜 기억 없습니다. 전하께서 주신 것 중에.”


손가락을 깨물며 아픔을 참던 에드윈의 고개가 에젤드를 향해 스르르 움직였다.


“전하의 말씀을 거스르고 성에 남은 것은 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니 괘념치 마십시오.”

“그러니까…….”


에드윈은 몸에 남아 있는 힘을 모두 모아, 있는 힘껏 통탄하여 말했다.


“어쩌자고 그랬어요. 위험하게.”


에젤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출혈 부위 이곳저곳을 수건으로 덮어 가리면 울컥대는 마음도 차분히 덮일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에젤드는 떨리는 목소리를 채 다잡지 못하고 답했다.


“겁이 나서 그랬습니다. 전하께서 잘못되실까 봐.”


에드윈의 눈망울에는 서러움이 서렸다. 그는 먹먹함으로 잠겨 가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끌어올려 물었다.


“죽기라도 할까 봐요?”


자기 물음에 대한 스스로의 답으로, 에드윈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처량한 음성을 툭 떨어뜨려 말했다.


“죽이지는 않아요. 못 죽여요.”


상처를 누르던 에젤드의 손에서 힘이 쑥 빠져나갔다. 하지만 행여 참혹히 내려앉은 그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질까, 에젤드는 어수선한 눈빛을 감추려 마치 원래부터 의도했던 일인 것처럼 얼른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사용하던 수건을 내려놓고 공연히 새 수건을 집어 들어 다시 상처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나 에드윈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막았다.


“이제 됐어요. 잠깐 이대로 두고, 당신 몸부터 좀 녹여요. 이러다 병나요.”


에젤드는 자기 손에 닿은 에드윈의 손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굳어진 유약 자국 위에 붉은 피가 덮인 그의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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