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큰 비가 쏟아졌냐는 듯 하늘이 반짝 개었다. 묵직이 끌어안고 있던 검은 먹구름을 몽땅 다 떨구어 맑아진 하늘은 이젠 바람과 햇살을 만끽하며 돌아다니는 산새들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가벼운 몸으로 날갯짓을 하며 지저귀는 새들과는 다르게, 성을 나서는 에젤드의 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물을 잔뜩 먹어 축 늘어졌던 머리카락은 그나마라도 얼추 말라 부스스하게 떠오른 몇 가닥이 바람에 소소히 흩날리고 있었으나, 초겨울 날씨에 맞추어 입은 도톰한 옷은 아직 물기를 적이 머금어 축축한 데다가 몸을 사리지 않고 흙탕물에 뒹군 바람에 진흙 범벅이 되어 그렇게 궁상맞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그녀에게 신경 쓸 거리도 되지 않았다. 에젤드는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이 통과해 온, 그리고 자신이 빠져나갈 길고 먼 숲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텅 빈 숲길에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 숲길 끝에서 마차에 치였던 자신의 모습인지, 자신을 습관처럼 장맞이하며 두 손을 휘젓던 에드윈의 환한 미소인지, 그와 함께 잉그램의 등 위에서 보았던 연둣빛 잎사귀인지, 자신을 위로하며 쩔쩔매던 에드윈의 난감한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가 보는 것이 염두에 선명히 양각된 기억의 단편인 것은 분명했다.
“에젤드?”
자신을 억세게 잡아당기는 기억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게 한 친근한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왕진 가방을 메고 다른 쪽 길에서 나타난 드와이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요?”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욱 또렷이 눈에 들어오는 그녀의 젖은 머리와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보고, 드와이트는 매우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디 다쳤어요? 이 핏자국이 다 뭐예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드와이트는 자신을 보고 매우 안심하는 기색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에젤드에게서 심상치 않은 감정을 읽어 냈다. 곧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가슴속 충격과 공포를 다시금 꼭꼭 눌러 삼키며, 에젤드가 하소연하듯 말했다.
“왕자님께 일이 생겼습니다.”
드와이트의 얼굴이 굳었다. 단박에 그녀의 말뜻을 알아챈 그가 어두워진 표정으로 물었다.
“많이 다치셨어요?”
그토록 짧은 순간에 단 한 마디의 말로 그가 모든 상황을 이해해 버렸다는 것이 참으로 허망하고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자기 감정은 재빨리 묻어 두고, 에젤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절박히 말했다.
“네. 너무 많이 다치셨어요.”
“처치는? 처치는 해 드렸고요?”
“일단 지혈을 해 드리고, 염수로 상처를 씻어 드렸습니다, 버드나무 우린 물도 드렸고요.”
“그렇군요. 그럼 내가 나머지 치료를…….”
서둘러 성 안으로 들어서려던 드와이트는 문득,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양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에젤드를 돌아보았다.
“잠깐, 에젤드.”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물기 어린 머리칼과 흙물이 잔뜩 밴 옷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윽고 잔뜩 예민해진 눈초리로, 그가 물었다.
“봤어요? 전부?”
그 물음이 꽤나 조심스럽고도 의미심장했기에, 에젤드는 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게 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드와이트는 영문도 모르고 오도카니 서 있는 에젤드를 앞에 두고 신중한 생각에 잠겼다. 혹시 무엇을 잘못했나 하는 착각이 들게 할 만큼 예리한 눈빛으로 에젤드를 빤히 보다가, 또 무엇 때문인지 한탄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돌려 성을 한 번 돌아보다가, 그렇게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 모양으로 아주 에젤드 쪽으로 몸을 돌리고 말했다.
“같이 갑시다. 오늘은 내가 바래다줄게요.”
“하지만 왕자님은…….”
에젤드가 걱정하며 머뭇거렸지만 그의 어투는 단호했다.
“응급 처치를 했으니 당장은 괜찮으실 거예요. 같이 가요. 당신에게 꼭 해 줄 얘기가 있어요.”
에젤드는 힐끔, 드와이트를 보았다. 그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잠시 기다리던 그녀는 또 힐끔, 그를 보았다. 여전히 그는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결국에는 에젤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다고 하시고, 왜 아무 말도 안 하십니까?”
드와이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되려 물었다.
“내가 먼저 묻고 싶은데요.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아요?”
따져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그는 진지하게, 에젤드의 의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에젤드의 얼굴에 짙은 근심이 어렸다.
“두려워서요. 제가 짐작하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 봐, 아니 그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를 듣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그녀의 말에 드와이트는 왜인지 풀이 죽었다. 그는 고개를 툭 떨어뜨리고는 마음먹었던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힘없이 말했다.
“그래요. 내가 경솔했네요. 당신까지 감당해야 할 일이 아닌데……. 그럴 이유도 없는데……. 당신 의사도 묻지 않고 내 멋대로 불편한 진실을 공유하려 했어요.”
드와이트가 실망한 얼굴로 느릿한 걸음을 옮기자, 에젤드가 얼른 그의 앞을 막아섰다.
“선생님,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에젤드는 깍지 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두렵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그것을 외면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무심할 수 있었다면 제가 오늘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말해 주세요, 선생님. 왕자님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진심이 담긴 그녀의 말에 드와이트는 많은 생각이 드는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먼저 말해 봐요. 당신이 짐작하는 그 무서운 이야기가 무엇인지.”
에젤드의 낯빛이 금세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바로 입을 떼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마주하고자, 그녀는 머릿속에서 소란스럽게 맴돌고 있는 말들을 하나씩 꿰어 천천히 입 밖으로 내보냈다.
“저는 오늘, 왕자 전하를 매우 악랄하게 대하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제 생각에는 그 사람이…….”
결국에는 어렵기만 한 그 말을 끝맺지 못했다. 에젤드의 목소리는 곧 꺼질 듯 말 듯 일렁이는 촛불처럼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생각을 말로써 내보이기를 이내 그만두고, 그녀는 그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못 하겠습니다. 제가 어찌 그분을 제 입에…….”
“왕세자 전하세요.”
흔들리는 여린 촛불을 입바람으로 단번에 꺼 버리듯, 드와이트는 에젤드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이의 정체를 찬 공기 속에 세차게 내꽂아 밝혀 버렸다. 시퍼렇게 얼어붙은 눈빛으로 에젤드를 보며, 그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국왕 폐하의 맏아들이자, 에드윈 왕자 전하의 친형님이신 오거스틴 왕세자 전하. 당신이 본 그 사람이요.”
기어이 두 귀로 똑똑히 듣고 만 그 진실에, 에젤드는 온몸의 기운을 몽땅 다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탈해져 벙벙히 말을 잊고 서 있었다.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두 눈 사이의 눈살을 한껏 찌푸린 그녀가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왕세자 전하여도, 아무리 형님이라고 해도, 열 살짜리 아이도 아닌 건장한 청년인 전하께서 어째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당하고만 계신단 말입니까?”
드와이트의 얼굴이 침통함에 흐려졌다. 그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중얼 답했다.
“열 살……. 그래요. 열 살은 힘이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