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것이 시작이었어요."

by 해린C

“국왕 폐하께는 국정에 참여하는 신하들 외에 매우 신애하는 궁중 관리 두 사람이 있었어요. 한 사람은 폐하를 늘 측근에서 모시던 시종장, 또 한 사람은 왕실 수석 주치의인 내 아버지셨죠. 폐하께서는 또한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하셔서, 시종장 어르신의 아들과 나를 어릴 때부터 궁에 자주 들이시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셨어요. 시종장 어르신의 아들은 오거스틴, 왕세자 전하와 이름이 같은 아이였고, 나의 죽마고우였죠. 우리는 틈만 나면 궁정에서 만나 그곳을 놀이터 삼아 함께 놀았어요. 폐하께서는 우리 둘을 워낙 예뻐하셔서 식사를 하실 때면 케이크나 과일을 나누어 주시고, 심지어는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게 해 주시기도 했어요. 우리가 귀족 집안의 자제인 것도 아니고, 물론 오거스틴의 경우 귀족 가문의 후손이긴 하나 그의 아버지부터도 세습 받은 작위가 없어 시종으로서는 드물게 신분상 평민이셨으니, 어쨌든 우리로서는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게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죠. 그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우리는 늘 즐거움에 들떠 있었지만, 왕의 식탁에 함께 앉을 권한을 처음부터 지니고 있던 한 사람, 애당초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한 사람만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의 진심을 알게 된 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작별을 겪었을 때였어요. 동갑내기 벗이었던 오거스틴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열병에 걸려 사망했어요. 오거스틴의 장례를 치른 후 시종장 어르신이 궁에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며 그분을 위로했고, 더없이 안타까워했던 사람들 중엔 왕세자 전하도 계셨죠.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너무나 슬퍼진 나는 궁정 안으로 뛰어들어가 복도의 커튼 뒤에 숨어 혼자 훌쩍훌쩍 울었어요. 한참을 울다가 잠이 들었는데, 어떤 웃음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 거예요.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죠. 왕세자 전하였어요. 그분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드디어 천박한 오거스틴이 이 고결한 오거스틴의 양식에 함부로 더러운 손을 대는 일이 없겠구나!”라고요. 잠결에 들었던 그 말에 그렇게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플 수가 없었어요. 내 소중한 친구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한낱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거예요. 게다가 그 일을 계기로 그분이 나를 어떻게 여기시는지도 알게 되었으니, 나는 그분을 무서워하게 되었어요. 나를 보고 미소를 짓고 친절을 베푼다 해도, 그분의 겉과 속은 낮과 밤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오거스틴을 잃고 나서 한동안, 아버지께서 나를 궁에 데려가실 때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때처럼 커튼 뒤에 숨어 있기만 했어요. 그 아이와의 추억이 궁 안 곳곳에 깃들어 있었기에 그곳에서는 어떤 것도 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던 거죠. 그때, 그런 나를 눈치채고 계셨던 분이 바로 에드윈 왕자 전하셨어요. 어느 날 나에게 다가와 슬쩍 말을 건네신 왕자 전하께서는 그날 이후로 조금씩 하루씩, 더 많은 시간을 곁에서 함께 있어 주셨어요. 내가 죽은 오거스틴에 대한 이야기를 불편함 없이 꺼낼 수 있을 때까지, 더 이상 눈물 없이 추억을 되새길 수 있을 때까지 함께해 주셨죠. 우리는 하루 종일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사소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그날그날 공부한 지식을 나누거나 밖에서 뒹굴고 뛰어놀기도 하며 가까워졌어요. 사실 그전까지는 그저 쾌활하신 둘째 왕자님 정도로만 알고 있던 분이었는데, 벗을 잃은 상실감을 채워 주는 또 다른 절친한 벗이 되어 주신 거예요.


하지만 마냥 천진하게 웃을 수 있었던 평화의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어요. 왕자님께 변고가 생겨 버렸으니까요. 그즈음부터 왕자님께서는 경미한 피부염을 앓기 시작하셨어요. 왕비마마께서 그 병을 고칠 만한 치료 약을 백방으로 알아보시던 중에, 동방에서만 난다는 희귀한 분홍색 과일에 대해 듣게 되셨어요. 무역이 원활했던 당시에 과일의 원액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어 왕자님께 약으로 처방해 드렸는데, 바로 그 시럽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죠. 아니, 계략의 도구가 되어 주었죠. 그 누군가에게.


왕실 가족분들이 인척 관계에 있는 외국의 귀빈들과 고위층 귀족들을 모시고 저녁 식사를 하시던 어느 날이었어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유명한 일화가 되어 한동안 궁중에 소문이 파다하게 된 일이 바로 그날 벌어졌죠. 몸이 아프시다며 식사를 거르고 휴식하시던 왕자님께서 별안간 식당에 나타나 귀빈들은 물론이고 폐하와 왕비마마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우기 시작하신 거예요. 왕자님은 미친 듯이 화를 내다가, 숨이 넘어갈 듯 울다가, 또 깔깔거리며 정신없이 웃다가, 그러다가 푹 쓰러져 잠이 드셨대요. 쓰러진 왕자님을 일으키려 다가가 보니 독한 술 냄새가 진동을 했고요. 평소에 예의 바르고 유쾌한 성품으로 모두의 호감을 사던 분이 그런 경거망동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두가 대혼란에 빠지기에 충분했지만, 더욱 경악스러웠던 것은, 그때 왕자님이 겨우 열 살배기 소년이었다는 거예요. 그 일로 폐하께서는 왕자님을 방에 가두고 진상을 조사할 것을 명하셨는데, 이후 밝혀진 사건의 전말로 인해 더욱 격노하시게 되었죠. 사건의 경위인즉슨, 평상시에 두루두루 친구를 잘 사귀시고 가까운 궁 밖으로도 자유롭게 드나드시던 왕자님께서 독버섯처럼 해로운 친구들을 가까이하시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절대로 소유해서는 안 될 물건을 손에 넣게 되셨는데, 그 물건이 바로 토딤이라는 이름의 독주였다는 거예요. 문제는, 토딤은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위법 행위가 된다는 거였어요. 여느 술보다도 중독을 쉽게 일으키고 치사성도 강해서 나라에서 음주와 유통을 금지시킨 술이거든요. 만백성의 귀감이 되어야 할 왕가의 일원이 그토록 중한 법령을 어기고 만행을 범한 것은 심각한 죄였죠. 왕자님께서 처음으로 궁에 유폐되는 형벌을 받게 된 첫 번째 죄목은 바로 그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그 일이 다루어지던 진행 과정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어요. 왜 다른 이도 아닌 왕세자 전하께서 그토록 적극적으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겠다며 발 벗고 나서고, 왜 그다지도 열성적으로 폐하께 왕자님의 죄를 낱낱이 발고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분의 위선적인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던 나로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의심을 막을 수가 없었어요. 당시 왕세자 전하의 연치는 열다섯. 왕세자께서는 나이에 비해 매우 원숙하고 의젓하신 분이었고 매사에 뛰어나게 총명하셔서 무엇을 하든 만인의 감탄을 자아내셨어요. 단 하나 승마 기술에 있어서만큼은 에드윈 왕자님이 더 탁월하셨을 뿐, 누구도 왕세자 전하의 기품과 기량을 따라잡지 못했죠. 그런 분께서 가슴을 치며 아우의 허물을 밝힌 후 사랑하는 동생의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자신에게 달라고 간청하니, 폐하께서는 모든 것을 믿고 왕세자 전하께 왕자님을 보호하고 감독할 전권을 맡기시게 된 거예요.


하지만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여러 달이 지나도 왕자님의 비행은 나아질 줄을 몰랐죠. 폐하께서 불시에 방문을 하셔도 술에 절어 이상 행동을 하시고 환각까지 보시니 폐하의 분노는 극에 달했어요. 왕세자 전하께서도 도저히 아우를 통제할 수가 없다며 호소해 대는 탓에 지칠 대로 지치신 폐하께서는 결국, 둘째 아들을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선언하시고는 왕자 전하를 나라 북단의 바닷가 마을로 귀양을 보내 버리셨어요. 그렇게 약 1년간의 유폐 끝에, 고작 열한 살의 나이에, 전하께서는 졸지에 죄인의 신분이 되어 부모님과 생이별을 하고 낯선 곳에 떨어지시게 된 거죠.


왕자님께서 유배지로 떠나신 이후 7년 동안, 아니 정확히 따지면 왕자 궁에 유폐되셨을 때부터 8년 동안, 나는 그분의 얼굴을 한 번도 뵙지 못했어요. 그저 왕자님에 대한 무성한 소문들만 귀에 담으면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실 의원이 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고, 이후에는 궁에서 수습 의원으로 일하게 됐죠. 그러던 어느 날 아주 갑자기,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왕자님께서 궁으로 돌아오셨어요. 열여덟 청년이 되어서, 전처럼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요. 몹시 수척해지셨거나 우울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실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여전히 호쾌한 인상을 간직하고 계셨고 어딘지 모를 의연함까지 갖추고 계셨죠. 강건해 보이셨어요. 참으로 다행이었죠. 왕자님께서 돌아오신 것은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셨기 때문이었는데, 작은 아드님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남아 있으셨는지,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왕자님의 생활 전반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후 왕자님께서 잘못을 뉘우치고 행실을 바로잡았다고 판단하신 거예요. 뉘우칠 잘못 같은 것도 없으셨지만.


왕자님께서는 돌아오신 이후로도 당분간은 감찰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왕자 궁에 유폐되어 계셨는데, 8년 전에 유폐되어 계셨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왕자 궁에서 일하던 80여 명의 하인들은 반으로 줄어 있었고, 왕자님을 측근에서 모시던 시종도 더는 없었죠. 부왕으로부터 버림받은 골칫덩어리 왕자는 귀족들에게도 더 이상 우러러볼 대상이 아니었어요. 왕자이기보다는 사실상 도자기공으로 성장한 그분은 아무에게도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해 있었죠. 그처럼 왕자님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던 반면, 그사이 왕세자 전하께서는 그 누구도 자리를 넘보지 못할 늠름한 국본으로 성장해 계셨고, 그분 곁에는 그분을 지지하고 힘을 실어 드리는 귀족들이 넘쳐 났어요. 권세가 등등해지신 왕세자께서는 궁으로 돌아온 아우를 관찰하고 감독할 권한을 폐하로부터 다시 한번 부여받으셨죠.


한편 처음부터 왕자님의 일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 나는 수습으로 일하는 동안 왕자 궁에서 전하를 보살피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 요청이 수락되어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왕자님을 뵙고 건강 상태를 살필 수 있게 되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사건의 진위였죠. 정말 선량하시기만 했던 그 나어린 전하께서 하루아침에 비행을 일삼는 발김쟁이가 되어 매일을 고주망태로 살아가셨다는 것이 사실일까, 그것을 제일 먼저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당장에 시급했던 것은 왕자 전하의 피부염을 치료하는 것이었는데, 술에 중독되어 계시던 예전의 모습보다 훨씬 건강해지셨다고는 하나 피부염만큼은 더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사이 동방과의 무역로가 막혀 분홍색 과일 원액을 얻기가 어려워진 데다가, 한동안 변방에 유배되어 계셨던 왕자님께서 필요한 약품을 쉽게 구하셨을 리 만무했던 거죠. 그래서 지금도 지금이지만, 그땐 정말이지…… 살면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는 전부 다 구해서 조사하고, 할 수 있는 실험은 다 해 보고, 이러다간 내가 먼저 죽겠구나 싶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며 애쓰던 시간이었어요. 지나간 세월은 돌려 드릴 수 없다 해도, 지긋지긋한 몸의 고통만이라도 덜어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분홍색 과일 원액과 유사한 효능을 가진 식물과 다른 약초와의 배합으로 피부염을 완화시킬 수 있는 시럽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기쁘게도 그것으로 전하의 증상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서서히 호전되다가도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는 시기가 있었는데, 바로 왕세자 전하께서 왕자 궁을 찾아오실 때였죠. 그때 확신했어요. 정확히 밝혀진 의학적 증거는 아직 없지만, 마음으로 받는 고통이 신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요. 왕세자 전하께서 왕자 궁을 찾으시는 날이면 왕자님께서 그토록 괴로워하실 수가 없었거든요. 왕세자 전하께서 아주 강압적이고 가학적인 방법으로 그 독주, 토딤을 드시게 했기 때문이에요. 8년 전에는 토딤의 진한 분홍 빛깔이 피부염 시럽과 너무나 유사해서 치료제로 완벽히 둔갑시킬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새로 개발한 시럽의 색깔은 이젠 토딤과 같지 않았고 이제는 왕자님께서 수상한 음식물을 고분고분 받아먹을 만큼 어리숙한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회유와 속임수는 통하지 않을 것을 깨닫고 전략을 바꾸신 거였죠.


왕세자 전하의 공격적인 태세 전환으로 인해 왕자님께서는 그간 심증으로만 품고 있었던 의혹을 확실히 풀 수 있게 되셨어요. 왕자님께 염증 약이 올려지던 첫날, 바로 그날부터 왕세자께서 약과 토딤을 바꿔치기하셨고, 왕자님께서는 맛이 조금 강하고 특이하다 싶었으면서도 어머니께서 정성으로 마련해 주신 약을 거부할 수 없었기에 아무 의심 없이 드시기 시작했다가 걷잡을 수 없는 함정에 빠져 버렸다는 것을요. 하지만 의혹을 풀었다 해도 때는 너무 늦었죠. 누군가 철저히 모략하고 완벽히 뒤틀어 버린 것을 되돌리기엔 이미 오래전에 시기가 어긋나 버렸으니까요.


왕세자 전하의 학대와 폭력은 왕자 전하께서 궁에 돌아오신 첫날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리웠던 고향 집에 오랜만에 돌아오신 왕자님께서 감회에 젖을 틈도 주지 않으셨죠. 토딤을 강제로 먹이려던 왕세자께서는 왕자님이 그것을 거부하자 말 안 듣는 짐승을 부리듯 그분을 호되게 구타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부상을 입고 충격과 절망에 잠겨 쓰러져 계신 왕자님의 모습을 폐하께 보이시더니, 왕자님께서 몰래 궁을 빠져나가 불량배들과 어울려 놀다가 싸움에 휘말려 상처를 얻게 되신 거라며 거짓을 고하셨죠. 그것이 시작이었어요. 잔인하고도 비정한 고통의 나날들. 그 모진 세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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