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래요. 왜 주변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왕자님의 주변에 남은 사람들이라고는 나와 하인들뿐이었는데, 우리는 왕자님을 위해 나설 처지가 못 되었어요.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법이 그랬어요. 메나도 왕국에서는 평민 이하의 계층이 귀족이나 왕족을 비방하거나 고발하는 것, 재판에서 그들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고, 그 법을 어겼다가는 중형에 처해지거나 재산을 몰수당할 위험이 있죠. 그도 그렇지만 누군가 왕자님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생각을 품었었다 해도, 왕세자 전하께서 가족을 볼모 삼아 그들을 겁박하고 폭행했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을 거예요. 학대를 면했던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요. 왕세자 전하께서 다른 이유로 하인들을 매질하실 때도 있었는데, 왕자님께서 독주 마시기를 거부하시는 날이면 그 벌로 하인들이 대신해서 매를 맞아야 했어요. 당연히 그 매질은 왕자님을 향한 것보다도 더 가혹하고 참담했고요. 못되기도 참 못됐죠. 아랫사람을 욕보이는 것은 그 주인을 욕보이는 것인데, 주인이 보는 앞에서 하인들을 보란 듯이 능욕했으니. 결국 왕자님께서는 하인들이 당하는 핍박을 보시다 못해 차라리 당신이 곤욕을 치르실지언정 하인들이 죽어 나가는 꼴은 못 보겠다 하시며 언젠가부터 왕세자께서 내미시는 독주를 주는 대로 순순히 받아 드시기 시작했어요. 때문에 궁에 돌아오신지 몇 개월 만에 왕자 전하의 건강은 다시 악화되었어요. 피부병 증세는 말로 다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였죠. 그대로 두었다간 언젠가 비명에 떠나실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강한 술기운을 해독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다짐을 그때 하게 됐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또, 왕자님 때문이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엄청난 양의 자료 조사와 연구와 실험, 치료를 시행해 온 거예요.
그러던 중에, 왕자님을 사지로 내몬 결정적인 사건이 터져 버렸어요. 폐하께서 그토록 아끼시던 시종장, 죽은 나의 벗 오거스틴의 아버지께서 왕자님께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게 되신 거예요. 그분은 금령을 어기면서까지 왕세자 전하의 악행을 고발할 마음을 먹으셨어요. 하지만 그전에 왕세자 전하께서 눈치채고 마셨죠. 불안에 휩싸인 왕세자께서는 극악무도하게도, 감히 왕의 시종장을 거의 반송장으로 만들어 놓고는 그의 가족들에게까지 몹쓸 짓을 한 뒤 그 죄를 전부 왕자님께 뒤집어씌우셨어요. 극에 달한 폭력성을 주체하지 못하신 왕자님께서 결국 시종장에게까지 화를 입힌 것으로 사건의 진실이 왜곡되어 버린 거예요. 실의에 빠지신 시종장 어르신께서는 직무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칩거하셨고, 다시는 궁으로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당연히 왕자님께도 크나큰 시련이 닥쳤죠. 말했듯이, 하인을 능멸하는 것은 그 주인을 능멸하는 것. 그것도 폐하의 시종장을 상해했다는 것은 폐하를 해친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요. 심각한 누명을 쓰신 왕자 전하께서는 폐하의 불같은 분노를 사게 되어 또다시 유배령에 처해지셨고, 이번엔 자유농민도 아닌 극빈한 농노의 집으로 귀양을 떠나시게 되었어요. 국왕을 능멸한 죄의 대가였죠. 유배지로 떠나시기 전 왕자님께서 내게 거의 빌다시피 간청하시길, 제발 아무것도 시도하지 말아 달라고 하시더군요. 비밀을 폭로하려 하는 날에는 나와 내 아버지가 시종장 어르신처럼 어떤 험한 꼴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자신도 벗을 잃고 폐하께서도 가장 신임하는 관리를 모두 잃게 되실 거라고요.
그럼 왜 왕자님께서는 그 치욕을 다 당하고만 계셨냐고요? 전하께서도 아주 손놓고 계시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몇 번쯤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겨 가면서 왕세자 전하의 눈을 피해 폐하와의 독대를 요청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번번이 거부 당하셨고요. 야속했죠.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데, 폐하께 진실을 고할 수 있는 사람은 왕자님 한 분뿐인데, 그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니.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그 역시도 최선의 방법이라 할 수는 없었어요. 실상 최선이란 것도, 방법이란 것도 없었다고 하는 게 맞죠. 그건 그분 혼자 손쓸 수 있는 일이 아니었거든요. 말했다시피, 왕자님 곁엔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주변에 권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에요. 이미 왕족들 가운데서 암적인 존재로 전락해 버린 왕자님께서 감히 모두의 존경을 받는 왕세자 전하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것, 그것도 유폐된 궁 안에서 외부인은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내세울 증거도 증인도 없이 그런 도전을 한다는 것은 파멸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에 불과했어요. 잘못하면 외려 왕세자 전하에 대한 무고의 죄를 덮어쓸 가능성이 높고, 왕세자 전하를 무고하는 것은 반역을 꾀하는 죄로 치부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행동이니까요. 귀족들 역시 개떼처럼 달려들었겠죠. 에드윈 왕자님이 누명을 벗고 힘을 얻으실 경우, 그동안 그분을 모욕하고 폄훼한 행위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 에드윈이라는 무효한 패를 버린 지 이미 오래인 귀족들은 오거스틴이라는 패에 판돈을 다 걸었거든요. 그들은 에드윈 왕자님의 재기를 바라지 않아요. 왕세자 전하의 건재함을 바라죠.
시종장 어르신 사건으로 인해 또 한 번 고된 남의집살이를 떠나셨던 왕자님께서는, 떠난 지 3년이 넘어서야 궁으로 돌아오셨어요. 하지만 왕자님께서 두 번째로 궁에 돌아오셨을 때에는 그분도 나도 하인들도, 환희와 안도보다는 공포에 빠지게 됐죠. 전하께 무슨 일이 닥칠지가 불 보듯 뻔했으니까요. 모두가 입 밖에 내지는 않았어도 돌아오시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고 여겼던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우려는 잔인하게도, 현실이 되었죠.
다시 돌아오신 지 한 다섯 달쯤 지났나, 거듭된 왕세자 전하의 거짓 발고로 폐하께서는 결국 다시 유배령을 내리셨어요. 생각하면 씁쓸한 일이지만, 유배령이 떨어지자마자 우리 모두가 얼마나 마음을 놓았는지 몰라요. 왕자님께서 왕세자 전하로부터 떨어져 지내실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게다가 이번에는 왕자님의 처지가 한결 나아지기까지 했어요. 폐하께서 벌을 내리신 게 아니라 오히려 면하게 해 주신 것만 같았죠. 이번에는 서부 산간 마을의 버려진 성에서, 유폐도 아니고 남의집살이도 아닌, 가까운 거리를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할 수도 있는 생활을 하시게 되었으니까요. 그뿐 아니라 내가 왕자님의 주치의로 함께할 수 있도록 승낙 받았고, 심지어 하인을 거느리시는 것까지 허용되었어요. 물론 그건 왕자님을 모시기 원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가능했지만요. 왕자님과 나는 생각했죠. 왕자님을 모실 때 너무 많은 고초를 겪었었기에 아무도 동행을 원하지 않을 거라고요. 그래서 우리 둘이서라도 어떻게든 생활을 꾸려 나가 보자 의기투합하고 있을 때에, 놀랍게도 왕자님을 모셨던 80여 명의 하인들 중 여섯 사람이 유배지까지 따라가 주인을 모시겠다고 자원한 거예요. 정말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죠.
하지만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공교로운 시점에 생긴 변수가 있었어요. 왕자님에 대한 자극적인 소문들이 어떤 발원지에서인가 급작스럽게 터져 나와 차마 수습할 새도 없이 빠르게 퍼져 나간 거예요. 왕자님께서 뭇 백성들로부터 ‘한심한 레인 왕자’, ‘망나니 레인’, ‘술주정뱅이’와 같은 별명을 얻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즈음부터였거든요. 더욱 이상했던 점은, 왕자님의 유배지로 지명된 이곳 아이니스에 퍼진 소문들이 유독 공포스러웠고 확산되는 속도도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빨랐다는 거예요. 마치 누군가 뿌리를 말려 버릴 작정을 하고 나무 밑동에 고약한 독극물을 부은 것처럼 말이죠.
의심 가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만, 그런 일을 벌인 것이 누구이든, 중요한 건 아직 희망은 있다는 거예요. 이건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기는 하지만, 폐하께서 아무리 노발대발하시며 아들과의 연을 끊겠다 호언하셨다 해도, 실제로는 단 한 번도 아드님을 포기하시지 않았다고 나는 믿어요. 흔히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형벌은 유배보다도 유폐령인데, 죄인들 중에 벽지에 유폐된 사람들만큼 외롭고 고독하게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없거든요. 지독한 외로움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허다하고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왕자님을 고립시켜 두신 것이 아니라 늘 누군가와 함께 지내도록 해 주셨잖아요. 나는 그것을 희망으로 여겨요. 게다가 이번 유배령은 조금 특별해요.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형벌을 느슨하게 해 주신 적은 없었어요. 심지어 무엇까지 해 주셨냐 하면, 왕자님께서 말타기를 잘하고 좋아하시던 것을 기억하시고는 잉그램을 하사해 주셨다니까요. 귀양 가는 죄인에게 하사품이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이번 유배를 마지막으로 모든 징벌을 끝내시려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물론 그렇게 되면 왕세자 전하께서 가만히 보고만 계시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