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가 문 뒤에 서 있었다.

by 해린C

덜컥 문을 열자 빗소리가 더욱 강력하게 귀청을 때렸다. 얼마나 세찬 비가 내리고 있는지를 눈으로 보고서야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아마도 에젤드의 앞에는 다급히 손목을 잡아끌던 에드윈의 아찔한 눈빛이 선명히 그려지고 있을 것이었다. 그 눈빛을 보고도 평온할 수는 없었다. 그의 불안은 이미 그녀의 깊은 곳까지 전달되었을 테니.


그녀는 공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돌아서자마자 급하게 달음질하기 시작했다. 이미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온몸이 흠뻑 젖고 말았으니 이제 와 몸을 사릴 이유도 없었다. 빠르게 달리니 곧장 대문에 다다랐다. 이제 두 발이 대문을 넘어서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쨍그랑! 하며 얇고 가벼운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 것이.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저 유리가 깨지는 소리만 들렸다면 멈추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고래고래 질러 대는 고함소리가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땅밑 어딘가에서 올라오는 듯한 그 소리는 내퍼붓는 빗소리에 섞여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람이 내는 소리임은 분명했다.


에젤드는 차마 과감해지지 못했다. 예사롭지 않은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울 만큼 쏟아붓는 비를 견디며, 고심하는 숨을 한없이 몰아쉬며, 에젤드는 몸을 대문 안쪽으로 돌렸다 바깥쪽으로 돌렸다 하며 몹시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에드윈이 성을 빠져나가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그 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지, 에젤드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몸을 대문 바깥쪽으로 향했다. 이제는 모든 감각을 다 차단해 버린 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의기를 품고 한 발짝을 성큼 디뎠다.


하지만 또 하나의 거친 소리가 그녀를 끝끝내 놓아 주지 않았다. 두 번째로 쨍! 하며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였다. 아니, 사실 그 소리가 아니었다. 무겁고 두꺼운 것이 깨지는 그 소리 하나 때문에 그녀가 발걸음을 돌린 것이 아니었다. 애써 차단해 둔 온몸의 감각을 격렬히 타격해 깨워 내고 그녀로 하여금 다시 몸을 돌려 대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게 한 소리는, 고통에 젖은 어떤 참담한 부르짖음이었다.


에젤드는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그 절박하고도 귀에 익은 목소리를 찾아 헤맸다. 그것은 주변 어딘가에서 그리고 땅보다 낮은 곳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껏 예민해진 감각들이 그녀를 이끌어 거센 빗소리를 헤치고 멈추어 서게 한 곳은 대문 가까이의 돌담을 마주하고 있는 성의 끄트머리 외벽이었다. 그녀는 자세를 낮추고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다가, 이윽고 건물 지층에 뚫린 몇 개의 네모난 창들을 발견했다. 틀림없었다. 절반은 지하에 파묻히고 절반은 지상 위로 드러난 창틈으로 그 참혹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에젤드는 땅바닥에 아주 납작 엎드린 채로 살금살금 기어 창문가로 가서, 고개를 살짝 빼고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거침없이 그녀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온 것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그녀의 몸이 경각간에 화들짝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뒤로 빼는 동시에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올 뻔한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급작스레 가빠진 호흡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듯 어깨가 매우 들썩거렸다. 화등잔처럼 커진 눈을 차마 깜빡거릴 여력조차 없이 충격에 사로잡힌 에젤드는 그대로 주저앉아 입을 막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때 또다시 고통에 몸부림치는 신음 소리가 좁게 열린 창틈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끝날 기미가 없이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너져 내리는 끔찍한 기분을 이겨 내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것이 있었다. 휙! 철써덕! 하는 소리. 허공을 가르고 살갗을 찢어 내는 소리. 에젤드는 몸을 움찔 움츠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것의 소리라는 것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지, 에젤드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몸을 창문 쪽으로 기울였다. 쿵쾅대는 가슴을 조금이라도 진정시켜 보려는 듯 옷깃을 손으로 꽉 움켜쥐고, 그녀는 지하실 안을 재차 확인했다. 그러나 결국엔, 결국은 그것이었다. 에젤드는 몹시 해악하여 다시 입을 틀어막고 화다닥 일으킨 몸을 벽에 기댔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지만, 그런 것은 느낄 수도 없을 만큼 정신이 혼미해졌다. 좀처럼 숨이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떨리는 숨을 어떻게 들이쉬고 어떻게 내쉬어야 하는지 방법조차 잊은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고통의 신음은 점점 더 격해졌고, 격분한 목소리는 더욱더 고조되었다. 분노에 가득 차 아무렇게나 윽박지르는 말들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진 목소리를 통해 터져 나와 아득해진 에젤드의 정신을 살처럼 꿰뚫고 지나갔다.


에젤드는 눈을 번쩍 떴다. 입을 틀어막았던 손이 스르르 내려왔다. 그녀는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벽에 기댔던 몸을 세워 앞으로 기울이고,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종내 결연해진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댔다. 땅밑에서 나는 소리가 살려 달라는 외침처럼 그녀를 옥죄어 미치도록 다급하게 만들었다. 에젤드는 조금 더 시야를 넓혀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시선을 대문간으로 가져갔을 때였다. 대문을 받쳐 놓은 벽돌 여러 장이 눈에 띄었다. 그래 저거다, 싶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에젤드가 날쌔게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잘못하다간 앞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급히 다가가 벽돌 하나를 집어 들고 창가로 돌아왔다. 일단 대범하게 벽돌을 들고 오기는 했으나, 생각한 것을 감행한다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에젤드는 긴 숨을 여러 번 내쉬어 호흡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물론 온전히 평온하게 진정하기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오른손으로 벽돌을 꽉 쥔 뒤 창문을 왼쪽에 두고 몸을 낮추었다. 창문을 한 번, 벽돌을 한 번, 그렇게 몇 번이고 양쪽을 번갈아 보면서 높이와 간격을 맞추었다. 마음속으로 수를 세는 듯 그녀의 고개가 은근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공포에 둘 셋은 허무하게 넘기고 넷 다섯까지 세었을 때, 그녀가 마침내 숨을 참고 벽돌을 쥔 오른손을 힘껏 휘둘렀다. 묵직한 벽돌은 유리를 정확히 조준하며 날아가 그것을 와장창 깨고 지하실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뭐야!” 하며 소리치는 음성과 함께 욕설이 날아와 박혔다. 다음을 계산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기에 후닥닥 벽에 붙어 몸을 숨긴 에젤드는 몹시 당황하여 두 손을 모아 쥔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고약한 욕설 끝에 홀연 정적이 이어졌다. 우르릉대는 천둥소리와 무거운 빗방울들이 하염없이 자기 몸을 땅에 부딪는 소리만이 귀가 지치도록 연속되었다. 에젤드는 더욱 두려움에 떨었다. 왜일까. 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까.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다시금 안을 들여다보아야 하나 그대로 있어야 하나를 고심했지만 답이 쉬이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그 고심이 무색하게도, 아니 벽돌을 던진 용기가 무색하게도, 에젤드의 과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내 혹독한 채찍 소리와 비명 같은 통성이 동시에 불현듯 터져 나왔다. 이럴 수가. 절망에 빠진 에젤드는 어안이 막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에젤드는 귀를 막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귀를 막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귀를 막으며 현실을 부정하려 해도 눈길만은 다시 대문 쪽으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 에젤드는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조금 전에 한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대차고 빠르게 뛰어가 벽돌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인지 서너 개를 한꺼번에 앞치마 자락에 담아 들고 창가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벽돌을 와르르 쏟아 놓고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미 깨져 있는 첫 번째 창문을 통해 자기 모습이 보일까 봐, 에젤드는 잔뜩 엎드린 자세로 벽돌을 손에 쥐고 흙탕물 위를 그야말로 포복하듯 참방참방 기어 두 번째 창문으로 향했다. 첫 번째 창문을 무사히 지나치고, 두 창문 사이에서 엎드린 채로 동작을 멈춘 후, 에젤드는 또 한 번 창문과 벽돌을 한 번씩 번갈아 보며 벽돌을 던질 공간을 눈어림으로 확보했다. 이번에는 둘 셋까지만 세고, 피가 날 것처럼 입술을 꽉 깨물면서 서슴없이 벽돌을 던졌다.


두 번째 유리창은 더욱 가차 없이 박살이 나 지하실 안으로 좌르르 쏟아져 들어갔다. 벽돌이 떨어지며 떼굴떼굴 구르는 소리도 들렸다. 낯선 음성은 더 사나운 독설을 내뱉으며 고함을 질렀다.


“넌 잡히면 죽는다!”


그가 내던진 채찍 자루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떨어져 둔탁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가 땅! 하고 울렸다. 그리고 성난 발걸음이 쩌벅쩌벅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그의 저주 섞인 말과 자신에게로 전광석화처럼 다가오는 듯한 무시무시한 발소리에 에젤드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거렸다. 그녀는 하릴없이 주변을 두리번두리번하다가,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엎드렸다가, 우왕좌왕 되는대로 마구 몸을 움직였다.


성의 출입문이 열렸다가 꽝 닫히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이제 그가 대문간으로 성큼 다가와 모퉁이를 돌기만 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에젤드는 더 이상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가 성에서 나왔으니 대문으로 달려간다면 그의 시선과 정면으로 맞닥뜨릴 테고, 거기에서 그대로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에젤드는 대문을 구원책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자신이 향하고 있던 방향 그대로 나아가 모퉁이를 따라 왼쪽으로 돌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성과 담벼락 사이의 비좁은 통로 사이로 몸을 최대한 움츠리고 긴 외벽을 따라 달리다 보니 왼쪽으로 모퉁이가 또 한 번 나왔다. 벌써 성 둘레를 한 바퀴 빙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니 그 모퉁이를 돌면 눈앞에 공방이 보일 것이었다. 그렇게 계속 달리다가 더 이상 건물과 돌담이 자신을 숨겨 주지 않는 위치에 서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에젤드는 모퉁이에서 멈칫거렸다.


“이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나오라고!”


그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모퉁이 너머에 있지 않았다. 그가 일직선상의 방향에 있다는 것을 느낀 에젤드는 더 주저하지 못하고 모퉁이를 돌았다. 이제 정말로 눈앞에 공방이 보이고, 그 옆에는 지금 성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인 뒷문이 보였다. 하지만 뒷문으로 빠져나가 탁 트인 곳으로 나가게 되면 과연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지 그것은 미지수였다. 하지만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지금은 그의 손아귀에서 가장 먼 곳으로 벗어나는 것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에젤드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공방을 향해 달렸다.


“어디 있냐고!”


그사이 목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온몸의 피가 바싹 마르는 듯한 느낌이 들 만큼 무서워졌을 때, 똑똑똑, 난데없이 머리 위에서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에젤드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틸다였다. 마틸다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에 서서 창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에젤드와 눈이 마주치자 마틸다는 대각선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틸다가 가리키는 곳에는 에젤드가 한두 걸음만 더 가면 닿을 수 있는 나무 문이 있었다. 이제 의지할 곳은 마틸다의 손가락 끝밖에 없다는 것을 에젤드는 알았다.


에젤드는 그녀가 가리키는 나무 문을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문이 열렸고, 더욱 다행스럽게도 문을 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지 않았다. 에젤드는 그 안으로 달려들어가 얼른 문을 닫았다. 빗장을 발견하자마자 빗장도 걸어 잠갔다. 그러는 사이 소리를 지르는 그의 목소리가 지근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분에 못 이겨 거칠게 내지르는 소리가 바로 뒤,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후다닥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문 뒤에 서 있었다. 에젤드가 등지고 앉아 있는 문을 쾅쾅 두드려 대며 그가 마구 고함을 쳤다. 문을 두드릴 때마다 에젤드의 몸이 몹시 진동하며 들썩들썩 흔들렸다. 아직도 어디에 있느냐고 소리를 치는 것을 보니 누군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하는 행동은 아닌 듯 보였다. 그러나 최대한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 에젤드는 고개를 꺾어 위쪽을 살펴보았다. 문 바로 옆에 난 창문이 눈에 띄자 그녀는 그 창문 밑으로 냉큼 자리를 옮겨 몸을 도사리고 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녀가 자리를 옮기자마자 살기 어린 남자의 부릅뜬 눈이 창문으로 쓰윽 다가왔다. 그는 눈알을 이쪽저쪽으로 굴리며 안을 살폈다. 그는 오른쪽과 왼쪽, 위아래를 모두 살폈으나 시각을 굴절하여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이 아닌 이상 구석에 몸을 바싹 붙여 앉은 에젤드가 보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대로 떠날 것인가. 행여 문을 부숴 버리지는 않을까. 세상의 모든 소리가 거센 빗소리에 가로막혀 있는데도, 에젤드는 숨소리 하나라도 튀어나올까 두려워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숨을 죽였다.


살벌한 위기를 느끼며 절체절명의 순간을 견디고 있던 그때, 그나마 몇 번 들어 본 목소리 하나가 창문 너머 머리 위에서 불쑥 끼어들었다.


“이젠 정말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 출발하셔야 내일 저녁에라도 궁에 당도하실 수 있습니다.”


레스터였다. 그가 저 난폭한 인간을 설득하고 있다니. 밉상에 불과했던 그가 이런 위기에 도움이 되다니. 에젤드는 두 손을 꼭 모아 쥐었다. 그녀는 조마조마하게 남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남자는 또 침을 뱉듯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이 얼마나, 왜 격노해 있는지를 쉴 새 없이 뇌까렸다.


“그놈을 꼭 잡아야 해! 어떤 쥐새끼가 기어들어와 내 얼굴을 보고 갔는지 알아야겠다고!”


레스터가 남자를 달래며 말했다.


“좀도둑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도둑놈이 어찌 옥안을 알아보겠습니까? 혹여 알아보았다 한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는 그 말에 흥분이 점차 가라앉는지, 여전히 씩씩대고는 있었지만 노여움에 가득 차 쩌렁쩌렁하던 목소리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레스터는 계속 그를 안심시켰다. 어린아이의 입에 사탕을 물리듯 입에 발린 소리도 아끼지 않고 끊임없이 내어 주자, 마침내 남자는 수긍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듯 말했다.


“그래. 좀도둑놈이 망가뜨린 창문이나 수리하고 있으라지.”


그러고는 저벅저벅, 한참을 문 뒤에서 떠들던 두 사람이 드디어 걸음을 옮기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멀어져 가자, 에젤드는 그제야 숨다운 숨을 헉하고 내쉬었다. 그 숨소리마저도 바들바들 요동을 쳤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를 에드윈에게서 떼어 냈다는 것만으로도 한시름을 놓은 듯, 에젤드는 물이 흥건한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채로 무릎 위에 얼굴을 푹 묻었다. 얌전히 묶어 두었던 머리도 어느새 다 풀어 헤쳐져, 흠뻑 젖어 축 늘어진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흐느끼는 듯한 숨을 여러 차례 몰아쉬다 보니 조금씩 정신이 차려지는 것 같았다. 에젤드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그새 푹 꺼진 눈을 힘겹게 깜빡였다.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니 눈앞의 것들이 점차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온갖 서적이 빼곡히 쌓인 방. 한구석에 놓인 책상과 의자를 빼놓고는 모든 공간이 다 책이었다. 아니, 실은 책상 위도 온통 책들의 차지였다. 조금 더 정신이 나자 책등에 박힌 글자들, ‘인체’, ‘질병’, ‘치료법’, ‘약재’ 따위의 단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에젤드는 그 수많은 책이 그곳에 존재하는 이유, 아마도 그 책들이 가장 실질적으로 소용될 한 곳, 그 한 사람을 떠올린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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