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다리가 바삐 걷는다. 푸른색 망토의 끝자락이 힘찬 바람에 하염없이 휘날린다. 눈이 소복이 덮인 숲길 위에 서두는 발자국이 하나둘 찍힌다. 조금 뒤에서 덩달아 걸음을 재촉하는 말발굽이 뽀득뽀득 눈 밟는 소리를 더한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점점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진다. 다급한 사람의 걸음과는 달리 말의 걸음이 마음처럼 속도를 내주지 않자, 두 다리가 멈추어 말을 향해 돌아선다.
“어서 가야 해. 날이 저물면 오늘 안에 편지를 보내기 어려울 거야. 조금만 더 서두르자.”
에젤드는 잉그램의 콧등에 손을 올리고 아이처럼 보채며 말한다.
“그 사람에겐 지금 아무것도 없어. 그에겐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필요해. 너도 알잖아.”
그 짧은 몇 마디를 하는 도중 눈물이 핑 차오른다. 글썽이는 눈에서 행여 눈물이 흐를까, 에젤드는 초조하게 눈을 깜박이며 잉그램의 목을 끌어안는다. 서글픈 마음이 하얀 입김에 엉겨 훅 터져 나온다.
“너무 보고 싶어…….”
잠시나마 그리움을 달래려 감은 눈 아래로, 결국엔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에젤드는 마구간의 벽에 걸린 못에 장비를 하나씩 걸어 정리한다. 마구간의 문을 닫고 나오려는 순간, 하늘에서 콰르릉! 하고 천둥이 친다. 흠칫 놀란 에젤드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그중 무엇일까. ‘곧’이었는지, ‘비’였는지 ‘쏟아지다’였는지, 과연 그 분절된 낱낱의 단어였는지 아니면 문장 전체였는지 알 수가 없다. 말의 어떤 요소가 그녀의 깊은 곳을 자극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이 내뱉은 혼잣말에 스스로 당혹하여 갑자기 빠르게 확대되더니, 마치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처럼 급작스레 멍해진다. 에젤드는 눈앞에 보이는 회색 성의 건물 외벽과 그것에 거의 닿을 듯 가까이 맞붙은 노란색 돌담을 바라보며 슬픈 얼굴로 한 번 더 중얼거린다.
“비가…… 쏟아질 것 같네…….”
거듭된 독백은 어떤 날 어떤 시간 속으로 그녀를 매우 속히 데리고 들어간다.
“비가 쏟아질 것 같네요.”
에드윈이 공방의 창문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근심스럽게 말했다. 거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사방이 온통 어두웠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등잔에 불을 밝혀 벽감 안에 하나, 에젤드 가까이에 하나를 놓으며 그가 말했다.
“비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 쏟아붓고 나면 떠나는 게 어때요? 오늘 장 보러 가는 날인데 비 맞으며 고생하면 안 되잖아요.”
채색을 마치고 이미 머릿수건을 벗어 낸 에젤드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큰비가 내리지 않으면 더 이상할 만큼 짙은 어둠을 보고는 곧 수긍하여 답했다.
“네. 조금 기다려 보겠습니다.”
“그래요. 일단 좀 지켜봅시다.”
에젤드는 해찰을 부리며 시간을 때우기보다는 작업을 이어 가기로 결심한 듯 일단 채색을 끝낸 도자기를 진열대 위에 올려놓은 뒤, 곧바로 다른 진열대에서 바탕이 빈 도자기 하나를 선택하여 들고 와 자리에 앉았다. 에드윈도 역시 날씨를 살피는 일을 그만두고, 창을 등진 채 넓은 작업대에 올려놓은 유약 통에 도자기를 담그는 작업을 재개했다. 한 사람은 서서 한 사람은 앉아서, 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 자리하고서 각자의 일에 다시금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굴곡진 면 위에서도 유연하게 움직이는 에젤드의 손끝이 빈 도자기 위에서 여유로운 스케치를 해 나가고 있었고, 에드윈의 손길은 겉이 메마른 도자기 하나하나를 유약 속에 빠뜨렸다가 빼내는 반복적인 작업을 섬세하고도 부단하게 해 내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 외의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두 사람이 각자의 작업에 한창 몰두해 있던 어느 순간이었다. 인적도 드문 숲속에 난데없이 멀리서 말들이 낮게 히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윽고 들려온 낯선 남자의 목소리.
“레인!”
낯선 목소리가 에드윈의 낯선 이름을 불렀다.
에젤드는 붓질을 멈추고 예민한 토끼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에드윈의 고개도 반사적으로 반짝 치들렸다. 그의 손에 들렸던 도자기가 유약 속으로 꼬르륵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그다지도 짧은 순간에 금세 산란하게 어지러워진 에드윈의 눈빛은 지금까지 본 중 가장 다급하고 가장 위급했으며 가장 혼미하고 가장 아득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분명 그는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에드윈은 소리를 듣자마자 에젤드를 보았다. 찰나에 스친 그의 예리한 눈초리에서 에젤드는 번개처럼 강렬하고 치명적인 위험을 감지했다.
“에젤드, 이리 와요.”
에젤드가 에드윈의 어깨 너머를 보려고 몸을 기웃하는 순간, 에드윈이 유약 묻은 손을 뻗어 재빨리 에젤드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에드윈은 에젤드의 모습이 창 너머로 보이지 않게 가리려는 것처럼 그녀와 마주 본 채로 그녀가 자신이 움직이는 방향을 그대로 따라 이동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문 바로 옆의 한구석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 그곳에 세운 뒤 문 위쪽의 타공된 부분을 통해 바깥을 살펴보았다. 불안한 눈길로 밖을 살피던 에드윈이 고개를 돌려 에젤드를 바라보고 말했다.
“여기에 있다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밖을 내다봐요. 뜰에 아무도 없으면 그때 바로 성을 빠져나가요.”
조금 전 비를 맞을까 걱정하던 사람은 어디 가고, 이제 그는 어서 성 밖으로 나가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따질 경황조차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에젤드는 준비할 겨를도 없이 머리 위로 쏟아진 에드윈의 불안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그를 위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젤드의 답을 받아 낸 뒤 이제 공방을 나서려고 문을 열려다, 에드윈은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지 다시 한번 에젤드의 얼굴을 바로 보고 묵직하게 힘을 실어 당부했다.
“여기에 이대로 있어요.”
에젤드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주 명확하고 굳세게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제야 에드윈은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는 그가 손잡이를 할 수 있는 데까지 힘껏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침을 꼴깍 삼키며 굳게 닫힌 문의 손잡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에젤드는, 에드윈이 말했던 대로 구석에 그대로 서서 모든 감각을 끌어모아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주의를 집중했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귀를 기울이자 에드윈의 다른 이름을 부르던 낯선 목소리가 다시 또 어렴풋이 들려왔다. 에젤드는 ‘어디에서 뭘 하느라’나 ‘아침부터 싸돌아다니는 줄 알았네’ 따위의 타박하는 말들을 겨우겨우 붙잡아 귓가로 끌어왔다. 낯선 이의 음색은 기묘하리만큼 에드윈의 음색과 흡사했다. 그러나 말투는 그렇지가 않아서, 정돈되었으면서도 자유로운 에드윈의 그것과는 또 다르게, 그의 말씨는 철저하게 짜인 틀 잡힘과 여과 없이 흐트러져 날리는 분방함의 양극단을 혼란하게 오가고 있었다.
에드윈이 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문이 한 번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주위가 무척이나 조용해졌을 뿐이었다. 에젤드는 문 가까이로 귀를 갖다 대었다. 하지만 정말로 더 이상의 말소리는 없었다. 대신 참으로 공교롭게도, 때를 노리던 검은 구름이 사람의 음성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하나 둘, 하고 동시에 수문을 열어젖히기라도 한 것처럼 굵은 빗줄기가 땅 위로 쏴아 하고 퍼붓는 소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에젤드는 소란스러운 빗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에드윈이 남기고 간 말을 상기하며, 그가 한 것처럼 문 위쪽에 달린 유리창 너머로 밖을 내다보았다. 문에 바싹 붙어 주위를 살피는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고 꼼꼼하게 움직였다. 에젤드는 몇 번이나 눈동자를 굴려 뜰에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분명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이제 에드윈의 말을 따라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에드윈은 비가 지나갈 때를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지금 바로 공방 문을 열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