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뿐사뿐히, 에젤드가 대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성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 대수롭지는 않은 표정으로,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별채를 향해 곧장 또박또박 걸어갔다.
성의 출입문이 열리며 하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때였다. 일전에 에젤드의 그림을 버리느냐 마느냐 하며 고민에 빠졌던 중년의 하녀는 커다란 함지박을 들고 문을 나서다가 에젤드를 발견하고는 함박미소를 지었다.
“에젤드, 오셨네요.”
에젤드도 환한 미소로 응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마틸다.”
“월요일부터 보니 반갑네요.”
마틸다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계속 말을 걸었다.
“날씨가 꽤나 쌀쌀해졌죠? 이젠 정말 겨울이 오려나 봐요. 아휴, 오늘은 날도 흐린데 왕자님께서는 기어이 나가신다고……. 참, 따뜻할 때 이거 한번 드셔 보세요.”
에젤드는 마틸다가 들이민 군밤 한 알을 받아 들었다.
“웬 밤이에요?”
“엊그제 왕자님이랑 콜튼 선생님이랑 다 같이 나가서 오후 내내 밤만 주웠어요. 한 번 줍기 시작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고요. 어찌나 많이 주웠는지 두 자루를 가득 채웠어요. 에젤드도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아주 즐거웠을 텐데요. 다음엔 꼭 같이 가요.”
“네, 좋아요.”
에젤드는 참새처럼 떠드는 하녀의 모습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군밤 껍질을 까며 에젤드가 물었다.
“왕자님은 어딜 가신 거예요?”
“도자기 제작에 쓸 흙을 캐러 가셨어요. ‘오늘 에젤드가 올지도 모르니 서둘러서 다녀와야겠어!’라고 하시면서 새벽이슬이 마르기도 전에 부리나케 나가시던걸요.”
마틸다가 가지런히 정돈되었으면서도 막힌 데 없이 자유로운 에드윈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하자 에젤드의 웃음주머니가 훗 하고 터졌다. 마틸다는 들고 있던 함지박을 뜰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선물해 주신 잔은 잘 쓰고 있어요. 에젤드, 어쩜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세요? 이건 비밀이지만요…….”
마틸다는 에젤드에게로 다시 다가와 아무도 듣는 이가 없는 뜰에서 굳이 소곤거리며 말했다.
“예전에 왕자님께서 만들어 주신 잔이 있긴 하지만, 요즘엔 에젤드 그림이 그려진 것만 사용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런 고급 도자기를 언제 구경이나 하겠어요. 우리 왕자님 같은 분을 주인으로 둔 홍복이지요. 그리고 당신 같은 복덩이가 우리 성에 와 준 덕분이고요.”
에젤드는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했다.
“그런 말 마세요. 저는 그림만 그리는걸요.”
“에젤드야말로 그런 말씀 마세요. 이곳 공방이 제대로 조건만 갖추어진 곳이었다면 두 분이 합심해서 만든 작품들은 웬만한 상류층 양반들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거예요. 집 한 채 값만큼 나간다는 값진 도자기들을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애정으로 만드시니, 그야말로 복이라 할 수밖에요. 어디 그것뿐인가요. 에젤드가 그림 그리러 다니면서부터 왕자님께 전에 없던 생기가 돌아요.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분위기 같은 것이 생겼달까요. 원체 구김살이 없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당신에게서 받는 남다른 기운이 있는가 봐요.”
뿌듯한 미소를 띠는 에젤드의 얼굴에는 미묘하고 어색한 수줍음도 연연히 피어올랐다.
“군밤은 여기 둘 테니 오며 가며 입이 심심할 때 드세요. 저는 채소 손질할 것이 남아서 이만 들어가 볼게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시고요.”
“정말 고마워요, 마틸다.”
쉬지 않고 재재거리던 마틸다가 홀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들어갔지만, 에젤드는 껍질을 깐 군밤을 손에 들고 그대로 서서 어떤 생각 속에 젖어들었다. 그러다가 더 깊이 스며들기 전에 냉큼 생각의 방문을 닫고 나와 일단은 손에 든 군밤을 입안에 쏙 집어넣고, 그날의 작업을 성실히 해 보자는 작심을 보이듯 머릿수건을 꺼내어 귀밑으로 내려 묶은 긴 머리칼을 익숙한 손길로 틀어 올려 감쌌다. 군밤을 오물오물 씹으며 막 공방으로 발길을 옮기려던 그 순간이었다.
“거기! 너.”
얼굴을 마주하기도 전에 애초부터 심사가 꼬인 투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에젤드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기분 나쁜 목소리는 곧이어 기분 나쁜 물음으로 이어졌다.
“넌 누구지?”
무엇이 그리도 맘에 들지 않는지, 남자는 미간을 잔뜩 일그리고 입꼬리는 아래턱에 닿겠다 싶을 만큼 축 내려뜨리고서는 어슬렁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누구긴. 에젤드는 틀림없이 그를 알아보는 눈치로 왠지 모르지만 비장하게 그를 향해 몸을 바로 하고 섰다. 처음 마주친 이후로 시간이 겨우 두 달여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그렇지 않아도 자글자글했던 그의 낯살은 그사이 한층 더 늘어난 듯 보였다. 에젤드가 그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레스터는 그렇지가 못해서, 가까이 다가오면서도 그녀가 누구인지를 영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거들먹거리려는 의도로 쓸데없이 두 팔을 크게 휘적거리며 걸으면서 조롱 섞인 물음을 물어 왔다.
“왕자께서 새 하녀를 들이신 모양이지? 그간의 보필들이 얼마나 시원찮았으면 이 좁아터진 성에서 여섯도 모자라 하인을 일곱이나 거느리려 하실꼬.”
그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러더니 곧 저 혼자만 뭐가 그리 우스운지 히죽히죽 웃으며 이물스럽게 말했다.
“아님 젊은 하녀가 필요하셨든지.”
눈동자의 움직임을 멈추면 죽는 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몇 번이나 눈으로 에젤드를 위에서 한 번 쓸고 아래에서 한 번 쓸며 다가오는 그가 불쾌한 듯 에젤드는 그가 다가오는 만큼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에젤드가 못마땅했는지 다가오던 걸음을 멈춘 레스터가 입을 샐룩거리며 말했다.
“이런 망할……. 왕자께서 부리는 너 따위 안종에게 관심 둘 일 없으니 고고한 척 그만하고 이거나 받거라.”
레스터는 허리끈에 달린 가죽 가방에서 손뼉만 한 유리병을 꺼내어 에젤드에게 내밀었고, 그러면서 단단히 당부했다.
“신입 하녀이니 어리바리하여 헤매지 말고 내가 알려 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도록 해라. 이것을 매 저녁 식사 시간에 레인 왕자께 한 잔씩 올리는 것이 규칙이다. 모르고 한 잔을 더 드리는 건 괜찮지만, 모르고 한 잔이라도 빼먹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영 미덥지 않은 그의 태도에, 에젤드는 떨떠름하게 유리병을 건네받았다.
반면 레스터는 자기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구태여 턱을 들어 올려 눈꺼풀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내리깔고 에젤드를 낮추어 보며 그다지 알 필요가 없는 정보를 덧붙여 낯을 냈다.
“너의 일거일동을 감시함이 마땅하나, 내 궁에서 중책을 맡아 이까짓 사소한 일에 정신을 쏟을 수가 없다. 내가 빨리 떠난다고 해서 안심하여 긴장을 늦추는 일이 없도록 해라. 다음에 와서 기필코 확인할 테니.”
그는 끝까지 입꼬리를 잔뜩 내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젤드를 한 번 쏘아보고는, 제 허세를 행동으로 증명하려는 양 무척이나 바쁜 사람처럼 재빨리 몸을 돌렸다. 대문을 향해 잰걸음을 걸으면서도 테이블 위의 군밤을 쳐다보고 그 뛰어난 눈썰미로 꼬투리 잡을 구실을 찾아낸 그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뾰족한 한 마디를 표창처럼 내꽂았다.
“먹는 거 하고는.”
그러나 애를 써서 트집거리를 찾아낸 수고가 아깝게도, 그의 아니꼬운 한 마디는 에젤드의 귓가에 맴돌지조차 않았다.
에젤드는 다만 덧없이 사라져 가는 그의 형상 뒤에서 그가 한 말을 되뇌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규칙…….”
그녀는 자기 손에 들린 유리병을 보았다. 병 속에서 졸랑졸랑 흔들리는 분홍색 액체가 그녀의 눈을 반뜩이게 했다. 그것은 확실히 기억 속에 존재하는 색깔이었다. 에젤드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그 머뭇거림이 의아해질 만큼 대담하게 병의 마개를 열고 주둥이에 코를 가까이 갖다 대었다. 순간 머릿속까지 아찔하게 퍼지는 독한 향에 흠칫 놀란 그녀는 얼른 마개를 쑤셔 넣고는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삐죽, 그리고 또 삐죽. 제멋대로 움직이는 연필심이 연달아 사달을 냈다. 접시 위에는 비뚤게 그려져 나간 선들만이 빼곡했다. 머릿속에 구현한 선을 원하는 대로 표현해 내지 못한 에젤드는 연필을 꽉 움켜쥔 채 작업대 위에 풀썩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연필을 꾹 눌러 잡은 손에 더 힘을 주다가는 굵은 연필심이 금방 동강나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덜컥 문이 열렸다. 곡괭이인지 삽인지, 묵직한 쇠붙이를 땅바닥에 털썩 쩔커덩 던지듯 내려놓는 소리와 약간 달뜬 발소리가 이미 창문 너머에서부터 들려오고 있기는 했었다. 마침내는 그 발소리보다 조금 더 조급한 문소리가 불쑥 공기를 가르며 들어왔고, 그 소리의 여운이 아직 공중에 떠돌고 있을 때 정제될 틈이 없이 고르지 못하게 내지른 에드윈의 목소리가 소리의 여음 안에 빠르게 섞여 들었다.
“에젤드, 괜찮아요? 어디 안 좋아요?”
에드윈은 허리를 숙이고 머릿수건 밖으로 드러난 에젤드의 머리칼에만 온통 눈길을 쏟았다. 실상 엎드린 에젤드의 팔 안에 얼굴이 다 가려져 있어 그것밖에는 그가 눈길 줄 만한 것이 없었다. 어찌할 줄을 몰라 에젤드의 머리 위에서 휘적거리던 그의 손은, 끝내 예고도 없이 번쩍 치켜든 그녀의 머리에 퍽 부딪히고 말았다. 에드윈은 적잖이 당황하여 자기 손과 크게 충돌한 에젤드의 머리에 손도 대지 못하고 황망해했으나, 에젤드는 아픔을 느낄 경황도 없을 만큼 속이 상한지 축 늘어진 채 그를 올려다보며 맥 빠진 첫말을 던졌다.
“오늘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에드윈은 그제야 에젤드의 팔 안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던 도자기 위 말썽꾸러기 선들이 저질러 놓은 난장판을 보고는 안도와 안타까움이 뒤엉킨 숨을 푹 내쉬었다.
“어휴……. 그림이랑 엄청 싸웠네.”
그는 에젤드를 내려다보며 애잔하게 웃다가, 곧 어깨를 펴고 힘 있게 말했다.
“그냥 다 내버려두고 일단 일어나요. 이런 날은 억지로 붙잡고 있어 봐야 배만 고파요. 나가서 군밤이나 까먹읍시다.”
에드윈이 마주 앉은 에젤드에게 껍질을 깐 밤을 건넸다.
“자, 먹어 봐요.”
“아닙니다. 제가 까먹을 수 있습니다.”
에젤드는 거절했지만, 에드윈은 오히려 기분 좋게 웃었다.
“그 말 오랜만에 듣네요. 그러지 말고 받아요. 그렇게 코가 쑥 빠져서 무슨 밤을 까요. 우선 한 알이라도 먹어야 힘을 내든 말든 하죠.”
결국 밤을 받아 든 에젤드는 그것을 입에 넣고 아주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에드윈이 밤을 하나 더 집어 들어 까는 모습을 넋 없이 지켜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던 에젤드는 대뜸 그를 불렀다.
“전하.”
에드윈이 손을 멈추고 쳐다보자, 그녀는 하기 싫은 말을 꺼내는 듯 억지로 소리를 끌어올려 말했다.
“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요?”
그녀는 미적미적 두루주머니를 열었으나 그 안의 것을 내주지는 않고 혼자서만 만지작거리며 말을 흐렸다.
“실은 제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해 드리는 것인데…….”
우선 말을 던져 놓았기에 더 이상 주저하기는 무엇하여, 그녀는 천 근같이 무거운 손을 들어 올려 분홍색 액체가 담긴 병을 힘겹게 그의 눈앞에 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에드윈의 눈에 곧바로 힘이 들어갔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면 일자로 길어지는 눈꺼풀 때문에 눈두덩에 팬 쌍꺼풀이 더욱 깊어졌다.
그의 표정이 심각해진 것은 단지 그 유리병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물었다.
“별일 없었어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에젤드는 그가 레스터의 일을 우려하는 것을 짐작으로 알아들었다. 그녀는 무덤덤히 고개를 젓고, 이야기의 주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던 그의 질문에 관련이 없는 자신의 질문을 올곧게 던졌다.
“이것……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거겠죠?”
에드윈은 팔짱을 끼고 턱을 내렸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에젤드에게 되물었다.
“왜, 주지 않으려고 하는 건데요?”
에젤드가 선뜻 답하지 못하자 그가 또 물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서?”
“네.”
곧바로 물음에 답한 에젤드의 눈빛이 뜨거웠다. 여러 가지의 근심, 염려, 간곡함이 그 안에 다 담겨 있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침착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냉철한 태도에 에젤드의 눈빛이 일말의 낙심으로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요지부동하며 그가 내민 손에 유리병을 건네주지 않았다. 두 손으로 병을 꼭 쥔 채 가만히 앉아만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에드윈이 말했다.
“에젤드. 지난번에 우리가 했던 이야기, 나에겐 아주 의미 있게 남아 있어요. 당신은 의심했고, 나는 내 삶이 부끄럽지 않다는 답을 주었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이걸 전달받는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는 당신에게 충분히 설명이 될 거라고.”
그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주억이며 덧붙였다.
“걱정할 일이 생기지 않게, 최선을 다할게요.”
그제야 에젤드는 여태 거두지 않고 기다리는 그의 손바닥 위에 느릿느릿 병을 올려놓았다. 에드윈은 건네받은 병을 한 번 쓱 쳐다보고는 다시 에젤드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곤 웃었다. 그저 생긋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