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삐 서두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응접실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귓가에까지 와 닿자 엎드려 있던 에드윈이 눈동자를 슬쩍 굴려 다가오는 드와이트를 흘끔 보았다. 드와이트는 그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곧장 그의 몸통에 감아 놓은 붕대를 들추어 보며 말했다.
“채찍이라니요. 무엇이 그리 분해 채찍까지 쓰셨답니까?”
이골이 날 만큼 익숙한 일에 굳이 야단을 떨 것도 없으니, 에드윈은 그저 아무 말 않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드와이트에게는 익숙해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지라, 붕대를 풀자 드러난 시뻘건 상처들을 보고 그는 입술을 꽉 맞다물었다. 드와이트는 두 입술에 더욱 힘을 주어 터져 나오려는 부아를 억지로 막아 보려 했지만, 결국에는 개탄을 금치 못해 볼멘 말을 툭 내뱉고야 말았다.
“고작 벽돌 몇 개에 졸아드는 겁부가 그동안 무슨 배짱으로 대범한 짓들을 벌이고 사셨는지…….”
그의 말에 에드윈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드와이트를 보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나?”
붕대를 풀던 드와이트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대답 대신 자신의 한쪽 어깨를 비켜 에드윈이 뒤를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제야 에드윈의 시야에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걸어 들어오는 에젤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에드윈의 눈은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팔꿈치를 고여 한쪽 몸을 힘겹게 일으키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에젤드, 왜 아직……?”
핏기 없이 창백해진 얼굴과 함초롬히 젖어 있는 에젤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이내 마음 한편이 애틋해진 에드윈은 근심 섞인 말들을 소낙비처럼 쏟아냈다.
“어서 돌아가 쉬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비를 맞아 놓고……. 놀라기는 또 얼마나 놀랐을 거야. 이러다 진짜 병난다니까요. 어쩌려고 이래요, 정말.”
그러나 에드윈이 무어라 하든, 에젤드는 그저 말없이 다가와 드와이트의 뒤에 가만히 몸을 낮추어 앉았다. 그녀는 에드윈이 몸을 누이고 있는 안락의자의 천을 꽉 잡아 쥐었으면서도 말로는 꽤나 태연한 척 답했다.
“병, 나고 말죠, 뭐.”
처음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에젤드의 또렷한 눈빛에 에드윈은 당혹해했으나, 이내 그 눈동자 깊은 곳 어딘가에 애통의 그림자가 어리어 있는 것을 알아본 듯 미심쩍게 눈살을 모았다. 예사롭지 않은 낌새를 챈 그는 드와이트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그러나 드와이트는 그 눈길을 의식도 하지 못한 척, 그저 묵묵하게 붕대를 푸는 손을 부지런히 움직일 뿐이었다. 아무 설명도 해 주지 않는 두 사람에게 갑갑함을 느낀 에드윈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그제야 비로소 드와이트가 스르륵 풀어 낸 붕대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에드윈의 눈을 보고 담담한 듯, 그러면서도 어딘지 시원스러운 구석도 있어 퍽 당당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지금 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비밀은 없습니다, 전하.”
그 말을 듣고 멀겋게 드와이트를 보던 에드윈의 눈은 자연스럽게 뒤에 앉아 있는 에젤드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에젤드의 얼굴이 미처 다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드와이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녀를 가렸다.
에드윈은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꺾어 드와이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그랬나? 나에게 혼날 각오는 하고 그런 건가?”
드와이트는 오래 아껴 온 벗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지키는 침묵의 반은 파란 많은 친우의 고달픈 인생에 느끼는 서러움이요, 나머지 반은 긴 시간 죄책감에 절여진 혼자만의 시름을 나눌 대상이 생긴 것에 대한 안도일 것이었다. 드와이트는 에드윈의 물렁한 질책에 슬쩍 웃어 보이며 답했다.
“혼나고 말죠, 뭐.”
“아니, 지금 두 사람 무슨…….”
“치료에 필요한 것들을 좀 챙겨 오겠습니다. 그리고 걱정 마십시오. 에젤드를 위한 차와 약도 준비하겠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던지는 에드윈의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드와이트는 그렇게 몇 마디를 남기고는 몸을 돌려 응접실의 아치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드와이트가 사라진 자리를 멀거니 보고 있던 에드윈은 이제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젤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에드윈의 시선이 닿자 에젤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윈 가까이로, 엎드린 그의 얼굴 앞으로 다가가 꿇어앉고 그를 마주 보았다. 에드윈도 돌렸던 고개를 바로 하여 접은 두 팔 위에 턱을 괴고, 할 말을 찾기보다는 들을 말을 기다리는 듯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쩐지 수심이 가득한 그녀의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전하.”
상처 입은 에드윈의 얼굴을 마주하고서 더욱 울상이 된 에젤드가 물었다.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제가 술 드시는 걸 염려한 탓에, 저에게 했던 말을 지키시려고……. 맞지요? 그러다가 이리 몸이 상하신 것이지요?”
이미 감정의 근저에 점직함을 깔아 두고 하는 물음이었다. 굳이 답을 한다면 그녀가 스스로를 책망하는 일에 느낌표를 찍어 주는 것 외에 다른 결말은 없을 터, 에드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덩달아 붉어진 눈시울로 그는 가련히 그녀를 보기만 했다. 하지만 무언의 답도 답인지라 그녀를 괴롭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후회와 자책에 헤매는 마음을 어느 한 곳으로도 붙잡아 놓지 못해, 에젤드는 푹 하고 고개를 숙이며 한탄했다.
“어떡합니까…….”
에드윈이 안락의자의 팔걸이 너머로 그녀를 애처롭게 내려다보았다. 마치 잘못을 빌듯 자기 앞에 꿇어앉아 같은 말만 되뇌는 그녀가 측은한지, 그는 부드러운 말로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요.”
그럼에도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에드윈은 오히려 웃었다. 그는 넉넉히 웃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어딘지 모를 곳을 떠돌고 있는 가엽고 여린 마음을 잡아 주려, 천천히 한쪽 손을 뻗었다. 에드윈은 에젤드의 머리 위에 손을, 이제는 피와 유약이 닦여 말끔해진 손을 얹고, 물기 머금은 머리칼을 살며시 쓸었다.
“에젤드. 다 괜찮아요.”
찬 머리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서슬 퍼런 칼처럼 심장을 베던 극한의 공포도, 추위와 피로도, 스스로에게 돌을 던지는 냉정한 자책도 그 손의 온기에 서서히 풀어져 내리는 듯, 에젤드는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젖은 눈으로 에드윈을 보았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에드윈은 끄덕, 그렇게 그녀를 위안했다.
그리고 또 한 번, 꽃잎 같은 말 한마디가 그녀의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와 앉았다.
“괜찮아.”
붉은 가루 한 스푼이 물속으로 폭 하고 떨구어져 소르르 퍼졌다. 드와이트가 적당한 농도를 맞춰 가며 가루가 덩이지지 않게 막대로 꼼꼼히 저을 동안, 두툼한 담요에 폭 감싸여 앉아 있는 에젤드는 김이 솔솔 나는 찻잔을 손으로 감싸 쥐고 물감처럼 풀어지는 붉은 가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을 개던 드와이트는 붉은 가루를 유심히 보고 있는 에젤드를 보고 슬쩍 한 번 웃으며, 소리 없는 그녀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금잔화예요.”
에젤드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금잔화요?”
“네. 꽃잎을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둔 거예요. 상처 치료에 꽤 효과가 있거든요.”
드와이트는 가루가 잘 섞인 용액에 얇은 헝겊을 적셔 에드윈의 등에 하나씩 올려놓기 시작했다.
상처에 액체가 스미자 에드윈의 입에서 통증을 채 견뎌 내지 못한 소리가 또다시 흘러나왔다. 신음성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쓰며 눈을 찡긋거리는 에드윈을 보며 에젤드가 말을 걸었다.
“전하.”
에드윈이 찡그린 눈을 들어 에젤드를 보았다.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려 고통을 덜어 주려는 것이었을까. 무슨 생각인지 에젤드는 난데없는 물음을 물었다.
“레이츠에서의 어린 시절, 전하께 좋은 추억입니까?”
다행히도 그녀가 던진 엉뚱한 화제가 에드윈의 기분을 가볍게 만들어 준 것이 분명했다. 잔뜩 찌푸린 얼굴에서 밝아진 눈빛과 경쾌한 미소가 슬몃슬몃 새어 나온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