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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창 Oct 20. 2022

봄날의 돈까스

단편소설 II

 

오 톤 트럭


 지난겨울 읍내로 나가는 길에 로터리가 새로 생겼다. 봄이 되자 형광조끼를 입은 노인들이 로터리 중앙에 화초를 심기 시작했다. 면사무소에서 자주 봤던 청년이 트럭에 앉아 스마트폰 속을 헤매는 동안 노인들은 돌을 캐내고 화초를 심었다. 상표는 버섯농장에 가기 위해서 로터리를 돌고 있었다.  


 상표는 몇 해전 싼 전셋값과 일자리를 이유로 이 소읍 변두리에 들어온 이주민이었다. 상표가 태어난 도시나 자라난 서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방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주민이라는 꼬리표는 붙이지 않았지만, 지방 소읍에서는 못 보던 성인 남자는 티가나기 마련이었고, 어딜 가나 출신지와 신상을 신고 해야만 했다. 서울에서의 그 잘난 학위도 읍내 고등학교 졸업장에 비할바가 못 되는 그런 곳이었다. 상표는 대형트럭을 몰아 이곳에서 자라난 쌈채와 버섯을 서울 외곽의 농산물공판장으로 운송하는 트럭 운전사였다.


 새로 생긴 로터리는 상표가 모는 대형트럭이나 버스가 돌다 보면 가끔 흐름이 막혀서 옴짝달싹 못하게 정체가 되고는 했는데, 로터리 운행이 미숙한 도시 사람이 섞여 있으면 정체는 몇 분 동안 이어지기도 했다. 상표가 강변공원을 지나 구대교 방면으로 회전하고 있을 때, 차 지붕에 스키를 실은 승용차가 무리하게 로터리에 진입하는 바람에 회전하는 차량 다섯 대가 얽혔다. 사방에서 로터리로 향하던 차들이 꼬리를 물며 정차했다. 화초를 심던 노인들은 차벽에 갇혔고 그제야 면사무소 청년은 트럭에서 내려 공무를 집행했다.


 상표 역시 중학교 동창생의 도움으로 트럭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고향 친구인 규는 얼마 전 서울 외곽 농산물공판장에 경매사로 발령되어 왔는데, 그 덕에 여러 동창생들이 중매인이나 배송기사로 먹고살게 됐다. 처음 이 일을 제안받았을 때 상표는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대형 유통단지에서 지게차를 모는 시간제 일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산업디자인 관련 학업을 마치고 전공을 살려 홍보에 관련된 직장을 다니던 상표는 결혼과 함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이곳에 내려앉았다. 서울생활을 버티기 에는 상표의 월급은 터무니없이 적었고 집값은 도달하기 힘든 심해의 그것 같았다. 상표는 이곳에서 직장을 다시 구하고 신혼부부 우대 전세대출을 받아 신축빌라를 계약했다. 직장은 경력을 살려 디자인과 홍보에 관련된 직종을 찾아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봤지만,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대기업 수준의 업무 량을 강조하고 강요하면서도 회사와 사원의 공동 성장이라는 먹을 수 없는 말들을 붙여 빈약한 박봉을 강제하는 유치한 기업들이 대부분이었다.


 “A전자 직원들은 시키지 않아도 자기 업무를 완수할 때까지 야근과 철야를 불사 한다니까, 그래서 회사가 발전하는 거야”


 보통 그런 식의 주장이었는데 상표는 그때마다


 “A전자만큼 연봉을 줘보라지”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목 안으로 삼켰다. 상표는 전 회사 수준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전기부품을 유통 생산하는 중소기업 물류센터에 취직했다. 전공과는 무관 했으나 회사에서는 상표의 서울 사 년제 대학교 졸업장을 인정해서 빠른 대리 승진을 보장했다. 전 직장에 비해 잔업 량이 적고 년 월차를 써서 휴가를 내는 것에 자유로웠다. 상표는 그래픽 프로그램 대신 엑셀과 물류관리 프로그램, 송장출력 프린터와 피 디 에이 단말기를 다뤘고, 광고 관련 전문가들과 인쇄업체 직원들 대신 인력회사 직원과 화물기사들을 상대하며 입사 후 일 년 반 만에 대리로 승진했다. 대리로 진급할 때 회사에서는 경영악화를 근거로 상표의 연봉을 동결했다. 상표는 홈쇼핑, 온라인 샵, 대리점과 대형 쇼핑센터 납품을 담당했다. 업무 량이 많았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상표는 성실했고, 갓 태어난 아들과 아내에게도 헌신했지만 그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대리 삼 년 차에 상표는 읍내에서 차로 칠팔 분 거리에 있는 면단위 초등학교 옆에 작은 주택을 샀다. 연봉은 낮았지만 정규직이 갖는 신용은 컸기에 집값의 절반이 넘는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었다. 나머지는 전세보증금과 처갓집에서 보태준 돈으로 충당했다. 상표는 이사 육 개월 후에 퇴사했다. 주택 구매 대출 원리금과 생활비, 공과금을 내고 나면 월급은 동이 났다. 커가는 아들과 뱃속에 둘째에게 들어갈 교육비와 보육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상표는 물류센터일을 그만뒀다. 상표는 낮에는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대규모 물류센터에서 지게차를 몰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생활을 이어갔다.


 트럭일을 권유받은 것은 지난해의 일이다. 고향 친구들과의 친목계 술자리에서 중학교 동창생 규가 상표를 따로 불러내 말했다.


 “야 내가 이번에 너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발령이 났거든 거기 업체 중에 꽤 괜찮은 곳이 몇 군데 있어, 너 사는 동네에서 경매장으로 하루에 두세 번 물건만 배송하면 전에 받던 월급에 두배 정도는 될 거야 차도 회사 꺼 쓰면 되고…… 어때?”



 상표는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서 규에게 이력서를 이메일로 보냈다. 보름 만에 지게차를 몰던 곳에서 일당을 모두 챙겨 나와서 농산물공판장 화물차 주차장에서 면접을 봤다. 캔커피와 담배 두 개비를 나누고 채용된 상표는 그날부터 운전석으로 출근했다. 트럭 짐칸에는 언젠가 상표가 참여했던 유산균 건강식품 광고가 붙여져 있었다.


 운전기사 상표의 하루는 오후 두 시 반에 시작했다.

집에서 도보로 오분 거리에 있는 고속도로 고가 밑에서 트럭의 시동을 걸고 십 분 정도 예열하면서 타이어와 전조등, 사이드 미러와 와이퍼를 점검한 다음 오 킬로미터 가량 달려서 버섯농장에 도착, 새송이버섯과 팽이버섯, 백만송이버섯을 여덟 파렛트 정도 싣고 읍내 방향으로 십 킬로미터를 이동해서 쌈채 비닐하우스에 들러 치커리와 비타민, 케일을 두세 파렛트 더 싣고 경매장이 있는 공판장으로 출발한다. 주중에는 강을 따라 뻗어있는 국도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내달리면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버섯과 쌈채를 내리고 전 날 내렸던 파렛트와 박스를 다시 짐칸에 싣는데 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기에,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과 아내의 얼굴을 잠시 마주하고 다시 버섯농장에 들러 느타리버섯과 표고버섯을 싣고 쌈채 비닐하우스에 빈 파렛트를 내려놓은 뒤 경매장으로 향한다. 그렇게 왕복 두 번의 운송을 마치면 보통은 새벽 두세 시에 집에 돌아왔다. 휴가철이나  공휴일에는 아침이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지만 두둑한 월급은 밤낮이 바뀐 생활과 커가는 아들을 보지 못하는 서운함과 불평을 거두어 갔다.


 상표는 운송일의 장점을 돈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크게 다가온 장점은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일한다는 부분이었다. 도로 위에서 생기는 시비라고 해봤자 어차피 한번 보고 다시는 마주 일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트럭 운전석은 높았기에 낮은 곳에서 뭐라고 쏘아붙여봐야 얼굴 없는 된소리는 차문을 넘지 못했다. 농장과 공판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제 할 일이 바빠서 그런지 부딪히기는커녕 얼굴 마주 보고 이야기할 시간도 모자랐기에 서로의 뒤통수에 대고 ‘안녕히 계세요’, ‘수고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끔 지게차가 고장이 나서 박스를 일일이 화물칸에 손으로 들어 날라야 했지만 전 직장에서 하루에 열대 이상을 상차했던 상표에겐 준비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가벼운 체력 단련은 되려 즐거운 것이었다. 트럭에는 보온병과 컵라면, 빈 물병과 꽉 찬 물병, 캔커피와 껌, 사탕과 은단을 항상 싣고 다녔다. 평일이라면 농장과 경매장을 오가는 구간 어디에서나 급한 용무를 보거나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도로포장공사나 예기치 못한 사고, 주말과 가혹한 연휴에는 서울과 강원의 관문 격인 그 길 위에서 상표는 버섯과 쌈채를 싣고 운전대에 앉아 소변을 보고 밥을 먹어야 했다. 상표는 여름에는 러닝셔츠에 팔토시를 끼고, 겨울에는 오리털 잠바에 털부츠를 신고 운전했다. 에어컨과 히터는 완벽하게 작동했지만 날씨를 거스르는 것에는 비용이 발생하기 마련이기에, 되도록 창문의 높이와 옷차림으로 운전석과 본인의 온도를 조절했다.


 농장 사람들과 공판장 직원들은 상표를 아꼈다. 상표에게 이렇다 할 유머감각이나 붙임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눈치껏 먼저 해야 할 일을 했고 능숙한 지게차 조종사였기에 트럭에 상차하는 일도 농장주나 공판장 직원들이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상표의 화물트럭이 공판장에 들어오면 직원들은 커피를 뽑아 마시고 지게차로 하역을 마친 상표에게 그중 한잔을 건넸다.


 “기사님 땡큐요”


 이름을 부를 만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지게차 열쇠와 커피는 오갔다. 가끔 상표가 직원들의 식사시간에 공판장에 도착하면 앞과 뒤에 도착한 다른 차량의 짐까지 모두 지게차로 내려주고는 했는데,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상표는 공판장 도착 순서에 관계없이 가장 먼저 물건을 내릴 수 있는 특혜를 받게 다. 하역 순서가 빨라진 상표는 귀가가 빨라졌다. 상표는 자고있는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삼십 분 더 볼 수 있었다.




자살과 타살의 방정식


 상표의 트럭이 버섯농장과 쌈채 농장으로 내달릴 때마다 길가에 꽃잎들이 나부꼈다. 트럭들이 잎과 가지를 뜯어먹어 터널처럼 변해버린 수양버들길을 지나자, 버스정류장에서 재잘거리는 여중생들의 반팔 교복에 오월이 내려와 있었다. 축제기간인지 토요일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본 상표는 휴대전화를 들어 요일을 확인했다. 어버이날을 이틀 앞둔 주말이었다. 국도로 접어들자 상행선과 하행선 모두 정체되기 시작했다. 어버이날을 맞이해 여행을 가거나 근교 식당에서 외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량과, 어버이날과 관계없이 데이트를 나선 차들, 용달차와 트레일러, 버섯을 실은 상표의 트럭이 도로에 얽혀 늘어 붙었다. 길 한복판에서 목에 플래카드를 걸고 오징어와 커피, 술빵과 식혜를 파는 노점상, 운전자를 교대하는 부부, 오토바이 헬멧 미착용 단속에 나선 경찰관의 신발 소리가 구르지 않는 타이어 소리를 대신했다. 고작 오 킬로미터를 전진하는데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상표는 고속도로 진입로 오백 미터 전에 위치한 주차장이 큰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바다와 내륙을 잇는 길에 세워진 유서 깊은 휴게소 주차장에는 사람이 만든 것들과 땅과 바다에서 거둬들인 것들을 가득 싣고 각자의 하역장으로 향하는 트레일러와 카고트럭, 냉동탑차와 일톤 용달, 탱크로리와 레미콘이 가득했다. 상표는 언제 올지 모르는 식사시간을 앞당겨 공중화장실과 향토특산물 가판대 사이에 위치한 기사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는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거친 뱃속을 채워줄 메뉴로는 육천 오백 원짜리 뷔페식 백반과 라면, 돼지 두루치기, 선지 해장국, 동태탕, 우렁된장, 돼지고기 김치찌개, 육개장, 해물순두부, 돈까스, 후식으로 나오는 자판기 커피와 식혜가 마련돼 있었다. 상표는 뷔페식 백반과 돈까스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같은 가격에 즉석에서 조리해주는 바삭한 돈까스도 좋고, 다양한 찬을 조금씩 여러 번 즐길 수 있는 뷔페식도 나쁘지 않았다. 상표는 막히는 도로 위에서 행여 탈이 날까 염려되어 바싹 튀겨진 돈까스를 주문했다. 뷔페에는 밀가루에 뒹굴려서 종을 가늠하기 어려운 생선 튀김과 고추장 제육볶음을 중심으로, 된장 가지무침과 동그랑땡, 콩자반, 떡볶이, 꽈리고추 멸치조림, 오이지, 무말랭이, 열무김치와 호박 된장국이 올라와 있었다.  


 돈까스는 소형 자동차의 운전대만 한 접시에 담겨 나왔다. 넓고 얇은 고기튀김 두 장에는 튀김 색깔보다 옅은 빛깔의 소스가 올려져 있었고, 케첩을 뿌린 양배추채와 단무지 서너 장, 풋고추와 생마늘이 그 옆을채웠다. 상표는 먼저 돈까스를 한 입 크기로 잘라 입안에 넣었다. 돈까스를 씹어 문 상표는 잠시나마 어른의 무게를 내려놓은 듯 한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 뉘어진 풋고추와 생마늘을 바라본 상표는 순식간에 폭삭 늙어버렸지만, 돈까스의 맛은 상표를 잠시나마 청년의 기분으로 되돌려 놓았다. 상표는 식당 안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은 수십 명의 남녀 기사들, 그들 역시 다시 운전대를 잡아야 했기에 풋고추와 생마늘을 씹어먹고 면허증 상의 나이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기사일이 막장이라고들 하는데 이만큼 정직하게 돈 버는 일이 또 없어, 성실하게 하다 보면 금방들 자리도 잡고 장가도 가고 다 잘 될 거야.”  


환갑 정도의 남자가 국그릇으로 식혜를 마시면서 서른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 둘에게 훈화 말씀을 늘어놓고 있었다. 상표가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에도  몇몇 선후배들이 그 막장에 서있는 상표에게 만류에 가까운 훈화 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형 돈도 좋지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게 운전일이야, 죽으면 차라리 다행이지 어디 불구라도 돼 봐, 가족들은 어쩔 거야”


상표는 돈까스를 우물거리며 식당 안에서 밥과 국을 먹고 있는 운전기사들의 기대수명에 관해 생각했다.


“상표야 운전일 만만하게 보다가는 큰코다친다. 밤낮 바꿔가면서 길 위에서 풍찬노숙 하는 건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나 견딜만한 일이야, 정철이가 회사를 차려서 사람 구하고 있다던데 한 번 연락해봐라,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인마”


상표는 커다란 돈까스 접시를 퇴식대에 올려두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었다. 흡연실 벤치에 앉아서 상표는 신정철 이름 세 글자를 생각했다. 그 이름은 상표의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장 해두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워버린 이름이었다.  상표는 신정철의 전화번호를 머릿속과 손가락에 저장하고 있었다. 마치 구구단을 외듯 그 이름 석자만 생각하면 전화번호가 반사적으로 떠오르고 욕이 입 밖으로 따라 나왔다.


“씨발 개눔에 새끼”


상표는 담배필터를 어금니로 씹어 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정철은 상표의 대학 선배였다. 재수를 해서 대학에 붙은 상표와 나이는 동갑이었다. 둘은 대학을 졸업한 후 차례로 같은 회사에 취직했고 같은 디자인 부서에서 사수와 부사수로 일했다. 한 해 먼저 입사한 정철은 뒤이어 입사한 대학 후배 상표에게 한동안은 전에 없이 친절하고 너그러웠으나, 정철이 대리 진급에서 제외된 이후부터 상표는 날마다 정철의 잡무를 도맡아야 했으며,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면 치욕스러운 말들을 들어야 했다. 상표가 부조리를 견디다 못해 정색을 하며 따져 묻자 철은 본인의 권력이 극에 달했을 때의 추억을 꺼내며 말했다.


“너 같은 녀석이 나랑 같이 군생활했으면 자살하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지방 경찰서에서 의경으로 복무했던 정철의 그 한마디 말은, 이후로 어떤 모욕이나 부당한 업무 떠넘기기가 없었다고 할 지라도 충분히 상표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주술적 힘이 있었다. 돈과 결혼을 핑계로 직장과 서울생활을 정리했지만, 어쨌거나 그것은 표면상의 이유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 정규직 일자리를 그만둘 만한 이유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재수 없는 새끼”


상표는 담배를 남은 커피에 비벼 끄고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밥 잘 먹고 왜 그 재수 없는 이름이 떠올랐는지, 불쾌하고 거북해서 운전석에 오를 때까지 상표는 연신 바닥에 침을 뱉어 입에서 이름 석자를 도려냈다. 상표는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고 차를 처음 받았을 때부터 카세트 오디오에 꽂혀있던 테이프를 밀어 넣고 볼륨을 높였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오네에……”


원곡과는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리듬과 목소리가 봄볕으로 데워진 운전석에 채워졌다. 울렁거릴 만큼 널뛰는 박자와 두배 속도로 재생되는 듯 한 경박한 가수의 음색에도 불구하고, 돈까스는 소화되면서 식곤증을 몰고 왔다. 상표는 시속 오 킬로미터의 속도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왼발과 오른발로 페달을 밟았다. 오후에 봄바람이 매연과 섞여 열어둔 차창 사이로 들어왔다. 상표는 졸음을 쫓아내려고 껌을 하나 꺼내 씹었다.


“식곤증 때문에 죽은 운전기사는 자살일까? 타살일까?”


껌을 씹던 입으로 상표는 스스로에게 문제를 냈다.


“정철이 새끼가 한 말 때문에 내가 자살했다면 자살일까? 타살일까? 산재는 되려나?”


어려운 수학 문제 같은 질문에 저절로 눈꺼풀이 무거워졌기에 상표는 그 너절한 질문을 잊으려고 볼륨을 더 높였다.


“이 렇게 좋은 날에 이히렇게 기쁜날에에 내니미 오시인다아면 얼마나 조오으을 까아아 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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