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갑자원
내가 태어나서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살던 동네는 시청에서 버스로 10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마을 입구에는 시 경계를 표시하는 거대한 해태상이 장승처럼 박혀 있었다.
고향마을 유일한 신식 건축물인 아파트 상가 지하에는, 부부가 운영하는 중화요리 식당 갑자원甲子園 이 있었다. 1980년대 후반에 혼자서 자주 찾았던 음식점으로, 당시에는 자장면 한 그릇이 1000원을 조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막 국민학교에 입학했던 나는, 주말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홀로 그 갑자원을 찾곤 했었다. 그 당시 그만한 또래 아이들이 홀로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은 흔한 풍경이었다.
햇빛에 삭아 낭창거리는 간판 아래 뚫려있는 입구 속, 어둡게 니스칠한 목재로 장식된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역시나 벽면과 천장이 온통 목재로 이루어진 실내가 나왔다. 당시에 유행하던 인테리어로 얇은 합판에 기하학적 문양을 만들어 넣었던 천장에는 쥐 오줌 자국이 군데군데 보였다. 여객선 내부처럼 곧고 진한 목재로 둘러싸인 벽면에는, 아크릴 판으로 만든 차림표와 이발소 그림 한두 점이 걸려 있었다. 벽보다 더 어둡고 육중한 식탁 위에는 유리제 양념통 안에 고춧가루와 간장, 식초가 들어차 있고, 커다란 플라스틱 통 안에는 나무젓가락이 한 움큼 담겨 있었다. 그 옆에 보물섬이나 소년중앙 같은 잡지가 놓여 있었는데, 그 책들이 떡볶이나 돈가스 대신 자장면을 먹으러 이 칙칙한 중국 요릿집에 내려온 이유가 되기도 했다.
자리에 앉아 자장면을 주문하면, 주인아저씨가 등유난로 위에 올려진 주전자에서 엽차를 들어, 황토색 찻잔에 따라서 건네주었다. 그 엽차가 끓는 난로 너머에 주인아저씨의 공간에는 작은 바가 낮은 성처럼 둘러져있고, 그 뒤에는 중국술 몇 병과 63 빌딩 저금통, 붉은색 글씨로 이전 기념이라고 쓰여있는 투각 된 청자가 진열대에 장식돼 있었다. 바 테이블 끝에는 다이얼 식 컬러텔레비전이 위태롭게 올려져 있었는데,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산가족 상봉 소식이나 티브이 문학관 같은 게 항상 틀어져 있었다. 나 역시 그런 프로그램에는 흥미가 없었기에, 자장면을 기다리는 동안 보물섬을 열어 흑백 만화를 봤다. 한두 꼭지 만화를 보는 동안 주인아저씨는 챙이 짧고 둥근 나일론제 등산모에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등유난로 옆에서 신문을 읽었다. 식당이라기보다 만화방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식당 내부보다 다시 반 층이 낮은 조리실에서 면을 뽑는 기계가 찌그덕 거리는 소리를 몇 차례 내고,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듯 센 불이 켜지는 소리와 금속이 부딪치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읽던 만화를 그림만 대충 보더라도 어떻게든 끝까지 보기 위해 속독을 시작했다.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자장면 한 사발과 허연 단무지와 양파가 들어있는 접시, 춘장이 들어있는 종지 하나가 내 앞에 등장하면, 나는 만화책을 덮고 젓가락을 가른 후 엽차 몇 모금을 먼저 마셨다. 엽차는 내 조그만 몸뚱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오장육부를 덥히고, 중력의 안내를 받아 맹렬하게 하강한다. 위에서 뭔가 면 뽑는 기계가 작동하는 듯 한 소리가 들리면, 나는 젓가락을 들어 메추리알 하나를 먼저 먹었다. 나무젓가락을 꽂아 자장면을 섞으면 젓가락이 자장면의 저항과 무게를 못 이기고 휘청거렸다. 젓가락을 꽂은 채 높이 들어 올린 자장면 뭉치기 조금씩 흘러내리면, 그제야 나무젓가락은 다시 곧아졌다. 기계로 뽑아낸 면발은 탄성이 부족했지만, 부드럽고 굵기가 균일했다. 적당히 씻어낸 면에서는 구수한 밀가루 냄새가 배어 나왔다. 비빌 때마다 장화 안에 물이 들어갔을 때 나던 소리와 비슷하게 찌꺽 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가 재미있어서 필요 이상으로 자장면을 비벼댔다. 정신없이 자장면을 비비다가 돼지기름과 춘장이 작은 포말처럼 날려 얼굴 같은데 튀면, 돌기가 돋아있는 사각 냅킨을 철제 통에서 꺼내 닦아냈다.
맛은 모르겠다.
30년도 더 지난 맛이 또렷이 생각난다면, 아마 거짓말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 자장면의 총체는, 질감과 무게, 면의 형태와 향기, 요즘에는 맛보기 힘든 과하다 싶을 정도의 라드유 냄새 정도다.
자장면을 먹고 있는데 천장과 벽 사이에 높고 길게 나있는 창 밖에서 작은 다리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를 반복하더니,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 상가 주변 아이들이 벌써 점심식사를 마치고 모여서 사방치기를 하려고 모여든 것이었다. ‘우에시다리, 찌 딴 말 없기, 없기 없기, 짱껨뽀 아리고다쇼’ 하며 편을 가르고 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감자와 돼지고기 몇 점을 남겨두고 서둘러 젓가락을 내려놨다. 500원짜리 동전 세 개를 주인아저씨께 내밀었더니, 두 개만 받고 한 개는 돌려주셨다. 나는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인사를 하고 계단을 튀어 올라가서 아이들 틈에 합류했다. 조금 전까지 올려다보던 창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주인아저씨가 내가 먹던 그릇을 거두고 있었다.
나는 아파트 상가와 바로 옆 주택의 블록 담벼락 사이에 있는 폭 2미터 정도의 시멘트 골목 바닥에 돌과 분필로 선을 그어 아이들과 사방치기를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목청껏 외쳤다.
한참을 놀다가 슬슬 질려가고 있을 때, 상가 뒤켠에 있는 문방구집 아들 방문이 삐걱 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들려, 우리 패거리는 우르르 그 집으로 향했다.
포격으로 파인 듯 움푹 들어간 상가 뒤편에서는, 갑자원 여주인이 플라스틱 채반 위에 배추를 널고 있었다. 세탁소 뒷문에 삐죽 튀어나온 작은 관에서는, 기름 냄새가 섞인 증기가 피어올랐고, 증기 너머로 모가지가 뽑힌 닭이 푸드덕거렸다. 우리는 그 장면을 깔깔 거리며 바라봤다. 정육점 아주머니가 한참 동안 목이 빠진 닭을 쫓다가 겨우 붙잡아 털 뽑는 기게 안에 밀어 넣고, 뜨거운 물 한 바가지와 함께 모터를 켰다. 목이 없는 닭은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통속에서 털을 몽땅 잃었다. 우리는 울긋불긋한 닭 내장이 담겨있는 바구니 옆을 코를 쥐어잡은 채 지나쳐서, 문방구집 아들 방으로 쳐들어갔다. 우리 패거리는 그 방에 모여 앉아 공기놀이를 하고 트럼프 카드놀이를 했다. 아직 숫자를 모르는 조무래기들이 섞여있어서 카드놀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냇가에 갈래?”
아파트에 사는 계집이 입을 떼자마자, 아이들이 일제히 연탄보일러 바닥에 붙인 배를 떼고 신발장으로 달려 나갔다.
나도 질세라 운동화를 구겨 신고 그 틈에 껴서 뛰쳐나갔다. 하지만, 사방치기를 하던 골목을 지나자 결계가 작동했다. 멈춰 선 나를 향해서 아이들이 뭐라고 말했으나 대꾸하기 어려웠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만 냇가로 갔다. 멀어지는 아이들이 나를 ‘배신자’, ‘겁쟁이’라 비웃었다.
그러나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갑자원 까지였다.
그 경계를 벗어나는 짓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문방구와 정육점, 세탁소와 갑자원이 있는 상가 옆에, 새로 지어진 2층 상가건물 맨 끝에는 과일가게가 있었다. 제철과일과 채소들을 늘어놓고 파는 스무 평 남짓한 가게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 여자아이가 살고 이었는데, 그 아이에게는 오빠가 없었다. 나보다 한 살 위에 그 는 내가 세 살, 그가 네 살이 되던 해에 둘이서 함께 냇가로 놀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홀로 돌아온 나를 나무랄 수 없었다.
나는 고작 만 세 살이었으므로.
그는 다섯 살을 맞이하지 못하고 죽었다.
내가 갑자원을 너머 냇가로 못 가게 된 이유를 듣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성적에 관련된 얘기를 하던 도중 부모님은 내게 그 얘기를 꺼냈다. 그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게 된 이후로 20여 년 간 악몽에 사로잡히게 됐다.
꿈속에는 냇가에서 어린 나와 네댓 명의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고장 난 냉장고의 단열 스티로폼을 뗏목 삼아 뱃놀이를 하는 여섯 살 정도 되는 아이가 있었고, 평평한 스티로폼 위에 서서 휘청거리는 네댓 살 짜리 아이들 둘도 있었다. 추웠는지 비닐로 된 솜 잠바를 걸치고 있는 아이들도 있고, 러닝셔츠에 슬리퍼만 신은 아이들도 있어서 계절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새카만 잠자리가 수면을 차면서 날아다녔다. 생활하수가 섞여 들었는지 물때와 거품이 많고 냄새가 나는 듯하다. 나는 징검다리에 서 있었다. 과일가게 아들은 물속에 있었는데, 나는 그가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그의 머리를 나뭇가지로 누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고통스러웠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물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꿈속에서 나는 호돌이가 그려진 민트색 러닝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천진하게 웃고 있었는데, 그 러닝셔츠는 내가 일곱 살 때 고모가 시내 백화점에서 사다준 생일선물이었다.
그 찜찜한 꿈은 고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일 년에 몇 번씩, 주기적으로 반복됐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던 과일가게와 우리 집은 왕래가 잦았었다. 국민학생 시절 나는 그 집 딸아이와 과일가게 한편에 있는 쪽방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라면을 먹곤 했었다. 내 아버지와 죽은 그의 아버지는 이따금씩, 초저녁부터 참외나 복숭아를 깎아놓고 소주를 들이켜며 라디오 속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었다. 내 아버지는 이빨이 몇 개 빠져서 노랫소리가 오래된 대금소리 같았고, 죽은 그의 아버지는 라디오 속 가수처럼 멋지게 노래를 불렀다. 죽은 그의 아버지는 딱히 술을 마시지 않아도 언제나 과일 위에 파리떼를 총채로 쫓으며 노랫가락을 흥얼거렸었다.
내 국민학교 졸업식날,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생업 때문에 그 자리에 올 수 없었다. 졸업장을 받아 들고 친구들과 노닥거리고 있을 때, 교실 뒷문에서 죽은 그의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근처에 배달을 왔다가 들렀는데, 나를 집에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짐받이가 용접된 그 125cc 감마 오토바이에 올라, 죽은 그와, 산 그의 여동생의 아버지 등에 몸을 붙였다. 그날은 겨울 치고는 비교적 춥지 않았지만, 오토바이가 내달리자 건조하고 찬 공기가 세차게 다가와서, 나와 죽은 그의 아버지를 휘감았다. 집 까지는 5킬로미터 내외였는데, 나는 출발하자마자 죽은 그의 아버지의 가죽잠바를 움켜잡고 목을 움츠렸다. 바람 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필 노래인지 나훈아 노래인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슬프지 않은 가사가 슬픈 목소리로 불려지고 있었다. 바람이 자꾸 눈을 때려서 내 눈에서는 눈물이 조금씩 새 나왔다. 죽은 그의 아버지는 이런 바람에 익숙할 텐데도 노래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가족은 그 동네에서 살았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길 어딘가에서 소주를 밥 삼아 넘긴 내 아버지가, 상가 어귀에서 쓰러져 연장 가방을 베개 삼아 잠에 빠지면, 과일가게에서 전화가 왔다.
중학교 3학년 무렵 어울려 놀던 패거리들과 시내 콜라텍에 갔을 때, 죽은 그의 여동생이 와 있었다. 나는 마치 그녀의 오빠라도 되는 양, 아랫니를 내보이며 그녀의 이른 귀가를 부추기기도 했었다.
우리 가족이 그 동네에서 두 정거장 거리의 마을로 이사를 한 후, 내가 그의 죽음에 관련된 유일한 목격자이자 그 사건에 생존자라는 말을 듣게 됐을 때, 나는 비로소 내 국민학교 졸업식에 오토바이를 몰고 왔던, 죽은 그의 아버지, 과일가게 아저씨의 사정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2. 야영의 밤과 결혼식 육회
나는 잘 컸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여느 아이들처럼 정신없이 진학하고 졸업했다.
악몽은 가끔 나를 찾아왔으나, 나는 그것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감기 같은 것이라 여겼다.
물에 빠져 죽은 얼굴 없는 그의 모습은 커가는 내 모습을 올려다봤지만, 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끔 꾸는 그 꿈은 서늘했지만, 여운이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꿈속에 나타난 그는 너무나도 빠르게 생활의 속도에 떠밀려 갔다. 어렴풋한 자책과 무서움, 미안함이나 일말의 짜증조차도 학업과 일상의 속도에 엉겨 붙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의 죽음이 나를 삼키기 시작했다.
시작은 이른 여름 캠핑장에서부터였다.
아직 여자 친구였던 지금의 처와 고향집에 세 번째 인사를 갔던 날, 나는 정혼자에게 이른 시집살이에 대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집 앞 캠핑장에 텐트를 쳐두고 1박을 하기로 했다. 당시 부모님이 살던 영세민 아파트에 노는 방이 하나 있었지만, 그저 누구도 불편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이른 장마가 지나간 후라 날도 적당했다.
정오에 집 근처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나와 여자 친구는, 아파트에 들러 부모님을 모시고 근처 고깃집으로 향했다. 장작불로 초벌 한 고기는 확실히 맛있었지만 초여름 습도에 장작의 열기까지 더해져서 나는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통풍으로 고생하신다면서 고기는 무슨 고기예요, 묵밥 집에나 가시자니까.”
나는 불판 위 고기를 가위로 자르면서, 아버지의 식성을 나무랐다.
“다 너희들 먹이려고 그런 거지.”
어머니가 두둔에 나섰으나, 이미 아버지 손에는 소주잔까지 들려 있었다.
“술도 좀 적당히 드셔요, ‘일생 음주 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있대요, 평생 마실 수 있는 술의 양이 정해져 있다고, 근데 아버지 보면 그런 거 없는 것 같아.”
내 타박에도 아버지는 묵묵히 삼겹살 구이에 소주를 홀짝이며, 곧 며느리가 될 내 여자를 어색하리 만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식장 주차장 한편에 야외 가마솥 앞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웠다. 가마솥 안에는 젖국이 펄펄 끓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타들어가는 불구덩이에 담배꽁초를 던져 넣었다. 그날은 더워서 그랬는지 그 모습까지도 보기가 영 거북했다.
부모님을 집에 모셔다 드리고, 우리는 캠핑장으로 갔다.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천변공원에 위치한 캠핑장은 시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폐수가 흐르고 온갖 생활폐기물이 널브러져 있던 기억 속 냇가는, 폭을 넓히고 주변을 단장해서 그런지 낯 설 정도로 깔끔하게 가꿔져 있었다.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가 이어진 캠핑장 근처에는, 개를 산책시키는 동네 주민들과 물놀이를 하러 나온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꽤 있었다. 내 자리는 관리사무실 옆 물놀이 안전 감시소 바로 앞이었다. 푸른색 간이 천막 안에는 구명정과 구명조끼가 가지런히 행거에 걸려있었고, 그 옆에 노인 두 명이 형광색 조끼를 입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여자 친구와 부모님이 만나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사실 고향을 찾은 이유는 친구들과의 모임에, 곧 결혼할 여자 친구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는데, 집에 얼굴도 비추지 않고 모텔방에서 머물다가 다시 올라가는 게 여자 친구에게 뭔가 못 보일 꼴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꾸역꾸역 캠핑도구를 차에 싣고 내려왔다.
부모님과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은 10년도 더 지난 얘기였지만, 여자 친구에 눈앞에 그 모습을 보이는 게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이참에 착한 아들인척, 모든 걸 잊고 다시 화목했던 과거로 돌아온 척, 애쓰고 있던 때였다.
아버지의 폭음과 폭력, 이어지는 어머니의 가출과 비행, 다시 쳇바퀴 돌듯 이어지는 그 악다구니 속에서, 가세는 기울어갔고 나는 찌들어 있었다. 유일한 탈출구였던 서울 소재 대학 입학장을 부모님께 들이밀었을 때, “그냥 시에 있는 학교나 다니지.”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난 후부터, 나는 집에 대한 모든 정을 떼 버리고 서울로 떠났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내가 떠나면 보호막을 잃는다고 여겼던 것 같다.
다시는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사이 아버지의 병환과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 나는 번번이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러는 동안 집은 더 진저리 쳐지는 공간으로 변했다. 친구의 결혼식 때문에 집에 들렀던 3년 전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내 앞에서 칼을 휘둘렀다. 내가 아버지보다 충분히 힘이 세진 후였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기까지 나는 아버지는 말리지 못하고, 겨우 칼을 쥐어든 어머니를 막아섰었다. 다행이랄까?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집안 식칼들은 모두 칼 끝이 절단돼 있었다. 어머니의 칼부림 이후 나는 3년 가까이 집에 발길을 끊었다. 분명 원인과 과실을 따진다면, 아버지 쪽이 100에 가깝지만, 나는 전화기 너머 어머니의 하소연과 악에 받친 말들에 충분히 지쳐있었으므로, 나에 대한 부모님의 과실은 아버지가 100, 어머니도 100이었다. 부모님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 건 여차친구와의 결혼을 결심한 후였다. 여자 친구에게 대충의 가정사는 얘기했었지만, 결혼은 아직까지도 집안끼리의 일이었으므로, 내 가정사 때문에 여자 친구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더 깊게 말하자면, 부모를 저버린 못된 놈으로 장인 장모에게 보이는 게 싫었다.
여자 친구와 부모님이 처음 만난 것은 외할머니 장례식 때였다. 외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아버지의 휴대전화 메시지를 받고, 나는 여자 친구와 함께 시골 요양원에 가기로 했다. 당시 일하던 직장에 업무 교대자가 늦게 출근하는 바람에 출발이 늦어졌는데, 그 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새 문자가 왔다. 나와 여자 친구는 목적지를 바꿔 빈소를 찾아가야 했다. 외갓집 식구들이 가득했는데, 처음 보는 사촌누이의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장례식장 구석에서 삼촌들과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 눈을 감은 외할머니의 막내딸인 내 어머니는 형제들과의 다툼으로 홀로 집으로 떠난 후였기에, 발인 때까지 나와 여자 친구 그리고 아버지는 외갓집 식구들 틈에서 사흘을 지냈다. 신장질환과 위절제술, 고혈압에 난청까지 있던 아버지는 쇠약해진 몸에 사흘 내내 술을 들이 붰는데, 술 앞에서 만큼은 아직 장사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폭력적 술주정은 육체의 쇠약과 함께 사라진 듯 보였다.
여자 친구와 부모님의 두 번째 만남이었던 상견례 자리에서, 장인어른의 짓궂은 농담에도 정색하지 않고 웃어 넘기기에, 그 성질머리 역시 육체의 힘과 함께 소멸한 줄 알았는데, 마침 그때 보청기가 고장 났었다는 얘기를 한참 후에 들었다.
그때 나는 안도와 씁쓸함에 한참을 소리 없이 웃었다.
여자 친구와 교외 아웃렛에서 새로 산 텐트는 여행용이라 설치하기 쉽고 낮았는데, 자리 옆으로 큰 나무가 있어 텐트를 치는 동안 땀은 흐르지 않았다.
나는 텐트 입구에 돗자리를 펴고, 작은 간이 테이블과 랜턴, 여자 친구가 인터넷으로 산 캠핑 장식품 몇 개를 늘어놨다. 저녁식사를 겸한 술자리 모임이라 친구들과의 약속은 7시였고, 그 새 이른 저녁식사를 마친 부모님이 우리 텐트를 맡아, 잠시 자리를 지켜주기로 했다. 저녁 6시가 조금 못돼서 어머니가 동네 마트에서 사은품으로 받아온 작은 바퀴가 달린 손수레에, 과일과 막걸리 몇 병을 담아서 먼저 도착했다. 곧이어 아버지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천변공원 돌계단을 공들여 내려왔다. 저물어가는 하늘처럼 내려앉은 아버지의 육체를 나는 소리 없이 지켜봤다. 어쩌면 저렇게 되기를 오래전부터 바라왔을 텐데, 막상 눈앞에 놓인 그 모습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몰고 왔다. 잠옷인지 외출복인지 구별하기 힘든 체크무늬 마바지에, 두치수는 큰 것 같은 낡은 셔츠 가슴 주머니에 고정된 보청기, 외줄 리시버를 왼쪽 귀에 꽂은 채 아버지는 돗자리에 살포시 앉았다.
20년 만 이라고 했다. 텐트에 들어와 보는 게 꼬박 20년 만이라고.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은 가끔 캠핑을 다녔었다. 캠핑이라는 말은 어쩐지 생소하고, 그때는 야영장, 야영객이라고 불렀다. 보이스카우트 용품을 파는 시내 종합상가 매장에서, 거금을 들여서 샀던 보라색 쟈칼 텐트와 거대한 색동 파라솔을 들고, 우리 가족은 서해바다 해변 솔숲과 깊은 계곡 자갈밭 위에서 야영을 했었다. 집 근처에 살고 있었던 어머니의 먼 친척이나, 아버지의 고등학교 동창 가족들과 함께 다녔는데, 그때 나는 한참 사춘기였다. 나는 새로 산 그 보라색에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심드렁한 나는 야영지 옆 공터나 주차장에서 엑셀 자동차 뒷자리에 몸을 구겨 넣고 차박을 하기 일쑤였다. 야영지에서 어른들은 내일 당장 지구가 박살 날 것처럼 술을 마셔댔다. 밤이 오면 야영장 곳곳은 싸움판, 술판, 도박장, 카바레로 변했다. 그때 나는 아버지 호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빼내, 자동차 뒷자리에 누워 워크맨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빌어먹을 캠핑, 그 광란의 야영이 끝나기 만을 지루하게 기다렸었다.
작은 교자상 만한 접이식 테이블 위에 금세 주안상이 차려졌다.
소분 포장된 견과류와 잘 익은 참외, 씨알이 작은 데라웨어 품종의 포도와 찐 옥수수가 비닐봉지를 접시 삼아 차려졌고, 동네 양조장에서 하루 만에 속성으로 만들어진 막걸리 맛 술이 20년도 넘은 캠핑용 술잔에 담겨 있었다. 그 술잔은 20년이 아니라 30년쯤 된 술잔이다. 몇 해 전 죽은 막내 외삼촌이 전자제품 대리점을 했던 1980년대 중반에, 냉장고나 컬러텔레비전을 사는 사람들에게 나눠 줬던 물건인데, 까도 까도 계속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마트료쉬카처럼, 맥주컵 만한 크기부터 작은 소주잔 크기까지 일곱 개의 노란색 잔이 들어있는 물건이었다. 아버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잔을 꺼내 막걸리를 부었다. ‘또 술이구나’ 했지만, 아버지의 상기된 표정과 20년 만에 술을 받아내는 그 노란 플라스틱 잔을 보고 있자니, 타박할 마음이 사라졌다.
‘저 썩지 않는 플라스틱 잔처럼, 지금보다 조금은 더 화목했던 예전 우리 가족의 모습이 계속 이어졌다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더니, 몹쓸 것이라도 본 듯 눈이 질끈 감겼다.
부모님은 나란히 막걸리 한잔씩을 앞에 두고, 물가에서 노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참외 한 개를 금세 다 먹어서, 어머니는 가방 안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천도복숭아 몇 개를 꺼내 칼로 조각냈다. 그 작은 과도에도 칼 끝은 펜치로 눌려 부러뜨린 듯, 거칠게 절단돼 있었다.
여자 친구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빈 플라스틱 술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파란 스티로폼 돗자리 위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막걸리를 따르는 여차진구를, 아버지는 감개무량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서 물길로 조금만 가면, 약수터가 나와.”
어머니가 막걸리를 받으며 여자 친구에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네? 약수터요?”
여자 친구가 가본 적 없는 그 약수터에 대해 물었다.
“저기 보이는 헬스기구들 너머 모퉁이를 돌면 금방 약수터가 나오거든, 쟤 어릴 때는 아침마다 지 아버지랑 배낭 메고 약수를 길어 왔었어.”
어머니가 금니와 성한 이빨 사이에 낀 옥수수를 손톱으로 긁어내며 말했다.
“저도 어릴 적에 아버지랑 약수 뜨러 다녔었어요 어머니.”
“서울에도 약수터가 있니?”
“네, 예전 저희 집 뒷산에도 약수터가 있어서, 아버지랑 동생들이랑 주말마다 다녀왔었던 걸요.”
여자 친구가 답지 않게 조신한 말투로 어머니의 말동무를 하고 있었다.
“거기 약수터 밑에서 그랬어.”
어머니가 막걸리로 잇새에서 빼는 옥수수 찌꺼기를 목으로 넘기며 말했다.
“뭘요 어머니?”
여자 친구가 무릎을 왼편으로 모아 고쳐 앉으며 물었다.
“동네에 쟤보다 한 살 위 남자애가 있었는데, 쟤랑 거기 물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죽었어.”
내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그 얘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캠핑용 테이블 위에 차려진 과일과 막걸리가 그의 제사상인 듯 보였다.
아버지는 보청기 리시버를 빼두고 느긋한 표정으로 막걸리를 들이켜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틀니를 했지만, 여전히 입에서는 오래된 대금처럼 바람 새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얘기는 뭐 하러 해요!”
나는 버럭 소리를 쳤다.
대학 졸업반 시절 이후로 꿈속에 그가 한동안 나타나지 않아서, 나는 그 일을 잠시나마 망각하고 있었다. 논문 심사와 취업, 계속되는 프로젝트와 야근의 나날 속에서, 숨만 쉬고 살기에도 빠듯한 일상의 틈에, 그의 꿈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꿈도 들어올 수 없었다.
어쩜 그렇게 깔끔하게 잊을 수 있었을까? 하필 그 냇가에 캠핑을 하러 오다니……
어머니는 내가 언성을 높이자 기분 나쁠 때면 나오는 그 특유의 내리까는 눈짓을 보이며,
“그냥,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라고, 무심한 듯 말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마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친구들과의 모임 장소로 차를 몰며, 나는 잠시 동안 잊었던 그 꿈의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쫓아내려고 차선을 바꾸고 속도를 높였다.
“내가 죽인 걸까?”
공설운동장 교차로 적색신호에 정차한 자동차 안에서 여자 친구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냥 사고였겠지.”
여자 친구는 우스갯소리를 받아넘기듯 말했다.
“겨우 서너 살짜리 아이들인데, 기억은 나? 나는 여섯 살 무렵 기억 이전은 전혀 생각나지 않던데.”
여자 친구는 다정한 듯 무심한 듯 보조석에서 엉덩이를 들썩여서 다리를 꼬며 말했다.
“기억은 안 나지만 꿈은 가끔 꿔……”
교차로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어 나는 바퀴를 굴리느라 입을 닫았다.
오랜만에 찾은 구시가 번화가는, 아니 한때 번화했던 구시가는 점잖게 나이 든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10대와 20대가 주로 찾던 그 거리에는, 적당히 나이 든 어른들이 즐길만한 참치회 전문점과 와인바, 위스키와 칵테일을 파는 가게, 막 유행하던 양꼬치 집들이 들어차 있었다. 모임 장소는 대로변 건물 2층에 있던 양꼬치집이었다. 메뉴와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인테리어의 그 가게에서 나는 친구들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하고 청첩장을 돌리면서 빼갈과 양꼬치를 먹였다.
‘그도 살았다면 결혼을 했을까?’
양꼬치를 먹다가도, 물속에 그가 다시 생각났다.
나는 두 달 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그랬는지, 물가 에서의 그 꿈은 단 한 번 밖에 꾸지 않았다.
3. 산방산 산타클로스
피로연이 끝나갈 즈음, 나와 내 신부는 남은 육회 몇 점과 김밥을 접시에 담아서, 신랑 신부석이라고 적힌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가까운 친척들과 처음 보는 처가 어른들께 인사를 하느라, 내내 미소 짓고 다녀서 그런지 볼 밑이 뻐근했다. 육회를 한입 씹으니 볼 근육이 땅겨왔다.
하객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집안 식구 몇 만 남아서, 남은 음식에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작은 아버지와 사촌매형이 축의금봉투와 방명록을 종이 쇼핑백에서 꺼내 정산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사돈집에서 권한 소주를 모두 받아 마시다가 앉은 채로 잠에 빠졌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내버려 두고, 한복 치맛자락을 쥐어잡은 채, 머리 아래로만 곱게 차려입은 이모들과, 며느리 자랑인지 흉인지 모를 이야기를 속닥거렸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자매들은 이따금씩 바람소리를 섞어 비밀인양 속닥거렸는데, 그 소리가 거슬리고 높아서 되려 더 또렷이 들렸다.
나와 내 신부가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 아버지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아버지는 말없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플라스틱 생수병의 목을 비틀어 아버지 앞에 건네었더니, 아버지는 벌게진 눈을 부릅뜨고 그 물을 종이 소주잔에 따라서 들이켰다. 이모들과 속닥거리기를 마친 어머니도 그 옆에 앉았다.
“아까 보니까, 양계장 김 씨도 왔더라, 문방구집 남매들도 다녀갔고, 너 바쁠까 봐 나한테만 인사하고 먼저 갔어.”
어머니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를 분홍색 비단 손가방에서 봉투 몇 개를 꺼내 식탁에 올려뒀다.
새신부가 그 봉투를 쓸어 담아, 셔츠 소매를 걷고 올 린 채 장부를 적고 있는 작은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과일가게에는 차마 말을 못 하겠더라, 너 결혼한다고.”
꽃무늬가 수 놓인 가죽신발을 벗으며 어머니가 그 말을 꺼냈을 때, 내 목구멍 속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육회들이 거꾸로 솟는 듯했다.
“왜!”
나는 단말마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작은아버지와 고모, 이모들이 나를 바라봤지만, 익숙하다는 듯 금방 시선을 거둬갔다.
“뭐가 미안해서? 내가 죽였어? 아니면, 엄마가 죽였어?”
나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나는 결혼식 피로연석에서 그 얘기를 꺼내는 어머니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나쁜 걸까?
내가 그를 죽인 건가?
그를 죽인 범인이 있다면, 먹고사는 일 때문에 이제 막 기저귀를 뗀 아이들을 방치한 어른들이 그 범인이 아니냐는 말이다.
먹고살려고? 누구를? 죽은 아이의 입에 숟가락을 물릴 수 있다고?
머릿속에서 원망과 비난이 빙빙 돌면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얘가 또 왜 이래, 누가 너보고 죽였대? 그냥 넌 결혼하는데, 미안하잖아.”
어머니가 단단한 숨소리를 섞은 목소리로, 더 이상 언성을 높이지 말라는 듯 쉭쉭 거리며 말했다.
예식장 직원이 계산 때문에 나와 신부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또다시 언성이 높아졌을 터였다.
나와 새신부는 예식장 사무실 한편에서 손에 침을 발라가며 식권을 세고, 지폐 세는 기계에 돈을 넣었다. 현금영수증을 발행하고 나니 갑자기 이 결혼이 공식적으로 실감 났다.
‘나는 살아서 결혼을 했다.’
그것을 미안해해야 하다니……
종이 쇼핑백 속 축의금 뭉치를 꺼내서, 어머니의 그 미안함을, 내 악몽을, 지치게 이어진 그 일들을 지워낼 수 있는 면죄부를 결재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방법은 없었다. 아니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애초에 죄는 없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인가. 죽은 그는 또 어떤 잘못을 했기에, 네 살 나이에 죽어야 했다는 말인가.
나와 이제 막 내 아내가 된 사람은, 두 개의 쇼핑백에 든 돈들을 부여잡고 결혼식장을 빠져나왔다. 결혼식장 대여료와 봉사료, 식대와 가족들 교통비 일부를 제외하고, 그 어떤 보상금 지불이나, 면죄부 구매는 없었다.
아내는 제주도에 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결혼식으로 거둬들인 돈을 조금 쪼개서, 제주도 신혼여행길에 올랐다.
둘 다 사치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어서, 번화가 한편에 있는 캐주얼 브랜드 매장에 들러 붉은색 줄무늬 티셔츠를 두 장 사서 입고, 최소한의 신혼부부 행색을 갖췄다. 처제에게 빌린 캐리어 가방을 하나 끌고, 당일 비행요금이 가장 저렴했던 청주공항까지 차로 이동한 후, 공터에 있는 사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비행기 출발을 기다리던 우리는 공항 식당에서 비빔밥과 돈가스를 시켜 먹고, 흔들리는 저가항공 여객기 안에서 종이컵에 든 제주감귤 주스로 입가심을 했다.
‘나는 살아서 제주에 왔다.’
제주 공항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한 시간 남짓한 비행 끝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생각이나, 신혼의 단꿈 같은 게 아니라, 30년의 전의 그 냇가에서 혼자 살아 이곳까지 왔다는 생각이었다.
공항 주차장에서 렌터카를 점검할 때도, 산방산 아래 숙소에 도착해 짐을 내리던 순간, 고등어회와 갈칫국을 먹던 순간에도,
‘나는 살아서 이 것들을 보고, 만지고, 먹는다.’
라는, 일종의 신고 같은 생각이 먼저였다.
마치 세 사람이 신혼여행에 온 듯했다.
멀리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마라도 자장면집 식탁 밑에,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모기들을 보면서도 죽은 그가 떠올랐다. 한라산 등산길에서 타는 목을 해갈시키던 스포츠음료를 보면서도, 나는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그의 생각을 떨쳐내려고 일정 사이에 일정을 끼워 넣고, 제주와 서귀포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가며, 피곤으로 망각을 부추기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다리 위에서 우산을 쓰는 짓과 같았다.
새신부와의 격정적인 침대 위, 깊은 땅속 만장굴까지 그가 따라왔다.
내 행복해야만 할 신혼여행은, 섬광처럼 끼어드는 그의 모습에 균열이 나고 있었다.
넷째 날은 우도를 관광하고 나서, 점심식사로 맛집 블로그에 소개됐다는 고기국수를 먹기로 했지만, 결혼식의 긴장감과 제주에서 사흘간 이어진 강행군의 여파로 몸이 너무 무거웠다. 무엇보다도 모든 풍경과 함께하고 있는 그의 모습 때문에...... 내가 피곤하다고 하자 새신부는 여행경로를 바꿔, 숙소 주변에 있는 용머리해안에 가자고 했다. 우리는 차를 숙소에 두고 걸어서 해안으로 이동했다. 서울에서라면 상상도 못 할 바람이 우리의 등을 떠밀어서, 해안으로 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적당히 일렁이는 파도와 맑은 하늘, 지질학적 풍경의 바위 절벽, 그 절벽에 기대어 해삼과 성게를 파는 여인들, 우리와 비슷한 남녀 커플 몇이 바위와 바위 사이에서 사진을 찍고, 성게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새신부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이런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고루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지난겨울에 갔던 대둔산에서도, 그녀는 구름다리 너머 봉우리와 자신의 얼굴이 함께 나오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었다.
“옆으로 조금만.”
구도를 잡으려고 내가 소리쳤지만, 소리는 바람에 흩어져서 새신부의 귀까지 다다를 수 없었다.
나는 손짓으로 그녀를 풍경의 가운데로 옮기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돌바닥을 위태롭게 걸어서 다가온 그녀가, 카메라 액정화면을 확인하더니 같이 사진을 찍자고 권했다. 바닥에 카메라를 내려놓고 찍어보려 했지만, 구도가 영 엉망이었다. 조금 전까지 해삼과 성게를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던 중년부부가 곁을 지나기에,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자! 여기! 여기! 그래요! 여기 보시고 하나 둘 셋! 브라질!”
중년 남성이 뭐가 즐거운지 잔뜩 신이 나서, 목청껏 소리치며 우리의 사진을 찍었다.
그가 찍은 우리의 신혼여행 증명사진은 배경이 9, 인물이 1인 구식의 구도였는데, 그마저도 날리는 머리카락으로 신혼부부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액정화면 속 그 모습을 보자 새신부가 깔깔대며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나도 따라서 웃었다. 거센 해안의 바람과 그녀의 웃음소리에, 그의 환영이 조금씩 쓸려 나가는 것 같았다.
점심식사시간이 다가와서 우리는 예약해 둔 식당에 늦지 않으려고, 바위틈을 걸어 해안을 벗어났다. 분명히 좀 전에 들어왔던 길인데, 들어오면서는 보지 못했던 커다란 범선 한 척이 관광안내소 입구에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유원지 바이킹인 줄 알았다. 저런 게 왜 거기에 있는지, 어째서 좀 전에는 저렇게 큰 배가 보이지 않았는지, 의문 투성이었다. 범선에 다가가니, 싸구려 페인트로 칠한 가짜 돛대와 배 안으로 나있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옆에는 ‘하멜 상설전시관’이라고 적힌 간판이 있었다. 하멜이 여기에서 좌초됐던 모양이다. 배는 전시실이었는데, 당연히 그가 타고 온 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여기에 있었던 사실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 배를 보자 왠지 모든 일이 가짜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배를 보는데 바람에 날려간 줄 알았던 그의 생각이 다시 피어올랐다.
하멜이 좌초돼서 한양으로 압송당하고, 몇 해가 지나 여덟 명의 선원들과 일본으로 탈출했다는 기록, 그 기록이, 그가 나와 냇가에서 놀다가 혼자 물에 빠져 죽었다는 어머니의 말이라면, 그가 죽은 사실은 사라진 난파선인 듯 느껴졌다. 오래돼서 삭아 사라진 난파선, 또 내 꿈은 싸구려 페인트가 칠해진 저 가짜 ‘스페르붸르호’ 같다는 생각.
나중에 찾아보니 하멜의 표류 지점은 용머리 해안이 아니라는 기록들이 더 많았다.
나는 그 기록들을 읽으며 안도했다.
우리는 사흘을 더 제주에서 표류했다.
동문시장에서 생선을 먹고, 작은 어촌마을 버스정류장에 있는 김밥천국에서 해물뚝배기를 시켜 먹었다. 제주 사람인 라도 된 듯, 서점에도 가보고 영화관에서 영화도 봤다.
신혼여행 마지막 날 아침, 우리는 공항 근처 해녀들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러 전복죽을 먹었다. 전복은 신선 했고 쌀에서는 군내가 났다.
공항 주차장에서 렌터카를 반납하고, 마지막으로 주차장 한편에 심어져 있는 야자나무 앞에서 사진을 한 장 남긴 채, 나와 새신부는 제주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비행기표를 바꾸고 정해진 탑승구로 가는 동안, 새신부는 가족들에게 선물할 초콜릿과 가방 따위를 사기 위해, 기념품 가게와 면세점으로 나와 캐리어를 끌고 다녔다. 감귤초콜릿과 고릴라 인형이 붙어있는 천가방을 몇 개 사고, 장인어른께 선물할 양주를 골랐다. 새신부는 시아버지에게도 양주를 선물하려 했지만, 나는 굳은 표정으로 술병을 원래 자리로 돌려놨다. 장인어른께 선물할 사슴뿔이 그려진 양주 한 병과 면세담배를 계산하고 있을 때, 회사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신혼여행 기간 중에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가 달갑지는 않았으나, 바꿔 생각해 보면 보통 급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전화를 걸었을 테니, 나는 전화를 받기 위해 면세점 밖 벤치로 향했다. 수화기 너머 후임이 몇 가지 업무에 관한 다급한 질문을 했는데, 해결 불가능한 것은 없었다. 후임은 신혼여행 중에 전화해서 미안하게 됐다고 두 차례 사과했다. 통화를 끝내고 나는 벤치에 앉아 면세상품을 정리했다. 양주와 초콜릿, 가방과 담배를 캐리어에 구겨 넣기 위해, 신혼여행 내내 입었던 옷들을 꺼내서 다시 개고 포개서 공간을 만들었다.
“신혼여행 오셨나봐?”
언제 앉았는지 환갑 정도 돼 보이는 남자가, 야자수 사이로 썰매를 끄는 산타클로스가 그려진 요란한 하와이안 셔츠에 슬리퍼를 신고, 내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나야 나, 용머리에서 사진 찍어줬던.”
용케도 나를 알아본 그는, 며칠 전 내 신혼 증명사진을 찍어줬던 바로 그 중년 남자였다.
“아, 여기에서 다 만나네요, 네, 이제 신혼여행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에이, 길이 어디 있어.”
남자가 시끄러운 목청을 높였다.
“네?”
내가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해 물었다.
“하늘에 길이 어디에 있어요.”
남자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아, 네, 그렇죠.”
흔한 부장님 농담, 남들을 웃겨야만 본인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믿고 있는 듯한, 대한민국 보통 갱년기 남성 특유의 그 시시껄렁한 말장난에,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바닥에서 배를 보이고 누워있는 캐리어를 정리하느라 고개를 박았지만, 남자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하늘에는 길이 있어요, 아세요?”
또 무슨 농담을 하기 위한 포석인지 모를 일이지만, 응수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무한하리라 생각돼서, 나는 건성으로 말을 받았다.
“네, 잘 모르는데, 어떤 길이죠?”
“왕국으로 가는 길이지요. 하나님의 왕국.”
남자의 얼굴에 짓궂은 노인의 표정과, 종교인 다운 단단한 낯빛이 교차했다.
나는 다소 귀찮다는 듯, 보루담배를 뜯어 캐리어 옆구리에 꽂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 그렇군요, 하나님의 길.”
이런 유의 포교는 살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이 겪어냈기에, 나는 중학교 때 이후로는 발길을 준 적 없는 교회에 계속 다니고 있는 척, 말을 받았다.
“네, 오직 예수님 만이 우리를 천국에 이르게 하시죠.”
내 말이 끝나자 남자는 연필을 잡은 듯 손을 말아 쥐고 흔들며 말을 이었다.
“오직 예수님 만이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고,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그 예수님 만이…… 우리를 광야에서 죄사함은……”
남자는 발동이 걸려서 내 머리 위로 그 말씀과 침을 쏟아냈다.
캐리어 가방이 바로 닫히지 않아, 나는 속절없이 그 세례를 뒤통수로 받아내야만 했다.
“아시겠죠 새신랑 형제님?”
남자가 드디어 입을 닫으려는 것 같았다.
“네, 아무렴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캐리어 지퍼를 힘주어 닫았다.
“여보! 안 오고 뭐 해! 어유!”
용머리 해안에서 봤던 늙은 남성의 부인이 3번 탑승구 앞에서 소리쳤다.
남자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럼 조심히 가시고, 주말에는 꼭 교회에 나가 찬양하고, 회개하세요.”
남자가 면세점 비닐봉지에 든 싸구려 위스키를 짤랑거리며 걸음을 뗐다.
3번 탑승구를 향해 몇 걸음 걸어가던 남자는 빙글 돌아서더니, 벤치에 앉아있던 모든 이들에게 말하듯 목청을 높여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알고 계십니다.”
그때, 남자의 웃는 낯 아래 하와이안 셔츠 속 산타클로스가 썰매를 타고 날아올랐다.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다녀가신대’
환영과 환청이 들리더니,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죠?”
나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내가 죄를 지었나요?”
남자는 소리치는 나를 보고, 슬리퍼가 벗겨졌는데도 계속 뒷걸음을 쳤다.
“내가 뭘 어쨌는데요?”
나는 계속해서 울부짖으며 물었다.
공항 보안요원이 죄를 묻고 있는 내 팔을 잡았다.
아내는 아직 가격표도 떼지 않은 선글라스를 머리띠처럼 정수리에 얹고, 놀란 듯 한 눈으로 나를 바라만 봤다.
2022
장 창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