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뎅
해가 바뀌고 맞이한 두 번째 금요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진눈깨비로 변하더니 퇴근 무렵에는 커다란 눈송이로 바뀌었다. 양 부장이 눈을 핑계로 신년 술자리를 제안했지만, 나는 눈 때문에 심란해져서 대충 집안일이 있다고 둘러대고 퇴근을 서둘렀다. 지하철 입구를 지나쳐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모퉁이 편의점 건물 앞, 연말부터 보이던 떡볶이와 오뎅, 만두와 순대를 파는 분홍색 소형트럭 옆을 지날 때 층층이 쌓인 만두 찜기의 뚜껑을 열었는지 갑자기 거대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와 나를 덮쳤다. 그 증기에 안경에 김이 서려 하마터면 오뎅꼬치를 들고 있는 그녀와 엉켜 넘어질 뻔했다.
그녀는 늘 그런 식으로 내 앞에 불현듯 나타났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그녀와 나는 부서와 사무실 층수가 달라 업무적으로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작년 여름 출근시간 건물 회전문 안에서 휴대전화를 떨어뜨린 그녀를 도운 이후로 구내식당과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거나, 몇 번인가 우연을 가장해서 퇴근시간 건물 로비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기다린 적은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그녀와 내가 이런 식으로 마주치는 일은 종종 생겼다.
그녀는 내 코트에 묻은 간장을 닦아내고 겸연쩍은 듯 웃었다. 웃을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 입김이 뭉게뭉게 쏟아져 나왔다. 김 서린 안경과 그녀의 입김, 만두를 쪄내던 수증기의 온기와 내 몸에 닿았던 미미한 그녀의 체온이 종일 초주검이 되도록 일해 지쳐있는 내 육체 속에 숨어있던 수컷다운 기질을 불러일으켰다. 평소였다면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고 스치듯 지나쳤을 테지만, 나이를 막 한 살 더 먹어서였을까? 어디서 그런 뻔뻔한 용기가 솟아났는지 나는 그녀에게 함께 식사를 하자고 말을 뱉어버렸다. 갑작스러운 데이트 신청에 당황했는지 그녀는 먹고 있던 어묵을 크게 베어 물더니 한참 동안 말없이 입을 오물거렸다. 그녀는 대답을 결정했는지 목구멍 속으로 뜨듯한 오뎅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붉어진 콧방울 아래 있는 도톰한 입술로 “좋아요 대리님”이라고 말했다. 대리로 진급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내 직함을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옅은 호감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만한 나이였기에 새삼스럽지는 안았지만, 내심 기뻤다.
우리는 두 뼘 정도 거리를 두고 걸었다. 서대문 방향에서 한참이 지나도록 버스가 오질 않아서 광화문 까지, 그러다가 그대로 종로 3가까지 걸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도 벌써 보름 가까이 되었지만, 상점과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캐럴풍의 팝송이 흘러나왔고, 그녀와 둘이 걷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회사 정문을 나설 때 만 해도 천근만근 같았던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녀와 나는 염화칼슘에 눈이 녹아 검은 웅덩이가 생긴 횡단보도를 사뿐히 건너, 도로에 묶여있는 차들을 뒤로하고 주점가로 향했다. 그곳은 오사카와 경성, 뉴욕과 연길의 사이 어디쯤 인 듯 보였다. 대한제국과 해방기, 새마을운동과 IMF 시간 대가 버무려져서, 그것들 때문에 사라진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술을 팔고 있었다.
평소 부서사람들과 자주 들르던 가게는 어째선지 피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은 그저 밥 한 끼 먹는 사이였기 때문이랄까. 회사라는 곳은 점이었던 일이 선이 되고 순식간에 면을 넘어 부피를 갖는 그 무엇이 되는 곳이었기에, 가능하면 회사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이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몇 개의 가게 앞을 그녀와 간격을 벌린 채 빠르게 지나쳤다. 내가 몇 미터 정도 앞서나가자, 그녀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나와의 거리를 줄이려고 영문도 모른 채 종종걸음을 쳤다.
“오뎅집 갈까요?”
갑작스러운 데이트 요청에 끝나버린 그녀의 만찬이 신경 쓰였던 것일까? 나는 그녀에게 또 오뎅을 먹자고 권했다. 그녀는 밝은 황토색 모직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페이즐리 패턴이 자수된 어두운 밤색 스카프 속에 숨긴 그 입술로, “어묵 좋아요 대리님.”이라고 말했다.
지어진 지 40년은 넘은 듯 한 낡은 건물 1층에 있는 오뎅집은 부서 사람들과 한 달에 예닐곱 번 정도 들르는 단골집이었지만, 주인아저씨는 말수가 적었고 우리 팀은 자정을 넘기기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없었으므로 동료들의 이목을 피해 그녀와의 만남을 즐기기에 그럭저럭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가게 안은 거의 만석이었다. 출입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자 안경에 김이 서려 잠시 동안 그대로 서있었는데 그녀가 먼저 빈 테이블에 앉아 안경을 닦고 있는 나를 불렀다. 그녀는 이전에도 이곳에 여러 차례 와봤었는지 익숙한 듯 의자의 뚜껑을 열어 가방과 코트를 넣고 주방 입구에서 기본반찬과 물을 챙겨 왔다. 역시나 그녀는 메뉴판은 열어보지도 않고 1번 세트와 도루묵구이를 주문했다. 그녀가 1번 세트의 구성을 알고 있듯이 나 역시 그녀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새삼스레 내게 이름과 부서명 직책을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사고 치고 전출 온 상병이 관등성명을 대는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녀는 관등성명을 마치고 내게 술을 마시겠냐고 물었다.
찰나의 용기에서부터 시작된 만남은 맥주의 도움으로 가속도를 붙여갔다. 그녀와 나는 1번 세트에 포함된 음식의 채 절반이 나오기도 전에 병맥주 두 병을 비워냈다. 그녀는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것보다 더 쾌활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나에 대한 호감을 감추지 못해서 들켰냐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할 정도로 지나치게 변죽이 좋은 듯했지만, 괜히 머리를 쓸어 넘긴다든가 ‘저 남자에게 점수를 따야 해’라고 하는 듯 한 강박적 움직임이나 빈말 없이, 꼿꼿한 자세와 표정만으로도 자신의 자존감과 나에 대한 강렬한 호감을 동시에 뿜어낼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1번 세트에 포함된 오뎅탕과 황도 달걀말이가 모두 나오고 잘 구워진 도루묵이 알을 쏟아낸 접시가 반 정도 비어갈 때까지 우리는 세 병의 맥주와 한 병의 소주를 마셨다. 내가 두 병째 소주를 냉장고에서 집어오자 그녀는 가스버너에 불을 켜고 테이블 위에 휴지와 접시를 정리했다. 그것은 가정교육이 잘 된 모습이나 아르바이트 경력 같은 데서 나온 움직임이 아니었다. 어느 조직에나 있을법한 빠릿빠릿한 사원, 딱 사원다운 움직임이었다.
“서지혜 사원.”
“네 대리님.”
이름 뒤에 직급을 붙여 부르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이제부터 정리하지 마세요.”
내가 한 손으로 벨트 버클을 잡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명령조로 말했다.
“습관이 되어 있어서요.”
그녀는 혀끝을 깨물며 겸연쩍은 듯 웃었다. 마주 보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그녀의 허리선과 종아리를 내려다보자, 아득한 오늘 밤의 종착지가 못 견디게 궁금해졌다. 천장에서 바닥을 향해 내리 꽂히는 백열전구 조명 때문에 그녀의 가슴아래 짙은 그림자가 생겼다. 얼음 꽃이 피어난 듯 보이는 스웨터 조직들이 그 그림자의 경계에서 부드럽게 일렁거렸다. 소주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소주병을 손에 쥐고 다시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서 맥주 한 병을 더 꺼내왔다.
그녀는 도루묵 구이를 처음 먹어본다고 말했다. 알의 미끌미끌한 식감이 신기해서 자꾸만 손이 간다고 말하면서 정작 입에 가져가는 것은 살코기뿐이었다. 그녀의 부서 사람들은 회식 때를 제외하고는 따로 술자리를 갖지 않는다고 했다. 팀장과 차장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탓도 있고 과장과 대리들이 이제 막 한 두 살 난 아이의 아빠였기에 가능한 저녁회의를 겸한 짧은 식사모임만 했었고, 회사 사람과 따로 술을 마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내가 속한 상품기획팀과는 정반대였다. 우리 부서 사람들은 술을 즐기는 부장의 강권으로 시도 때도 없이 술자리에 가야만 했다. 몇몇 거래처와의 미팅을 호프집에서 했던 적도 있었다. 나 또한 술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일이 들어간 술자리는 일의 연속일 뿐 이어서 부서 사람들과의 술자리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부서 사람들 외에 회사 사람과 술을 마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도 처음이에요 이렇게 회사 사람과 단 둘이 술을 마시는 건.”
그녀는 흡족한 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회사 사람이요? 대리님 저랑 지금 회사 사람으로서 술을 마시는 거예요? 네? 대리님?”
그녀가 불만에 가득 찬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나는 속으로는 웃으면서 겉으로는 당황한 척 손사래를 치며 기쁜 변명을 늘어놨다.
“지혜 씨라서, 지혜 씨랑 함께 있고 싶었으니까.”
라고, 풋내기 대학생처럼 어리바리 한 말투로 말했다.
“정말요 대리님?”
그녀가 표정을 풀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에이, 대리님 말고 그냥 상혁 씨라고 해요.”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는 내 이름을 쉽게 부르지 못했다. 내게 마음이 없다거나 선을 긋기 위해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회사라는 조직 때문에 본인도 모르는 새 혀 안에 심어진 일종의 발성규제 같은 것이 작동한 듯 보였다. 그녀는 나를 ‘상혁 대리님’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하지 말아야 할 장난을 쳐버린 어린아이처럼 혀를 살짝 내밀고 웃었다.
우리는 남은 도루묵 안주에 소주 한 병과 맥주 두 병을 더 꺼내서 마셨다. 처음 만남에 이런 과음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걱정 반 기대 반이었지만, 그녀는 제법 술에 강한지 혀가 꼬인다거나 얼굴이 달아오르지는 않았다. 그저 처음 가게에 들어왔을 때 보다 조금 더 웃었고 앉은 자세가 부드러워졌을 뿐이었다. 그녀는 술을 잘 마시는 것이 집안 내력이라고 설명했다. 중소기업 임원인 그녀의 아버지가 평소 술을 즐기기에 그녀는 평소에도 퇴근 후 아버지와 함께 저녁식사 자리에서 종종 반주를 즐긴다고 말했다. 부서사람들과 술자리를 하지 않는 것에는 적잖이 안도하고 있지만, 가끔씩 술이 당길 때면 회사 얘기를 터놓고 말하면서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아쉽다고도 말해다. 나는 ‘내가 그 술친구 해드릴게요’ 같은 초를 치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도 그녀도 그저 술친구 그 이상을 위해 지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잠자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이따금씩 맞장구를 쳐줬다. 우리는 공통점을 찾기 위해 서로에 대해 물었다. 그렇게 한 동안 취향과 일과, 그 밖의 것들을 취조하고 진술했다. 그녀는 토요일마다 구립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다고 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선수용 수영복을 입은 맨 얼굴의 그녀를 그려봤다. 내가 머릿속을 곁눈질하며 음흉한 생각을 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젓가락으로 식탁을 탁탁 치면서 상상 속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는 나를 나무랐다. 그녀는 입사 전 다녀왔다는 타이완과 캄보디아 여행에 대해 말하면서 휴대전화 속 지금보다 몇 살 젊었던 그녀의 모습을 내게 보여줬다.
“여행사에 취직하는데 해외여행 한번 못 가봤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카드로 쓱 긁었죠.”
그녀는 맞벌이 부모님의 바쁜 일과 때문에 변변한 국내여행도 못해봤다고 했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과 대학교 MT정도가 여행의 전부인 본인의 삶이 못마땅해서 여행사에 취직했는데, 하필 그녀가 속한 디자인 팀은 해외는 물론이고 그 흔한 지방출장 따위도 없었다. 그녀가 다녀온 우리 회사의 타이완 문화답사 패키지여행상품의 카드 무이자 할부는 지난달 끝났는데, 캄보디아 올빼미 여행상품의 카드할부는 아직 5개월이나 남았다고 했다. 그녀는 본인이 직접 체험한 회사 상품에 대한 후기를 술안주로 꺼냈다.
그녀가 다녀왔다던 타이완 문화답사 5박 6일 패키지 상품은 내가 입사 초 동남아 담당으로 근무하던 때에 기획에 참여했던 상품이었다. 그녀는 해안열차와 차밭 체험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호텔조식과 현지식도 비용대비 아주 훌륭해서 타이완 여행을 떠올리면 아직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고궁박물관 일정이라고 했다. 사나흘은 봐야 겨우 대표작 정도를 볼 수 있는 거대한 박물관을 겨우 두 시간 만에 봐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한데 왜 굳이 일정을 잡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차라리 일정에서 들어내고 어시장 투어나 소규모 박물관 관람을 넣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녀가 타이완을 여행했던 2년 전 여름은 남한에서도 연일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던 혹독한 계절이었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타이완의 여름은 서울과는 비교조차 불가한 것으로, 습식사우나 안에서 스키복을 입고 만두를 쪄먹는 것 같았는데, 고궁박물관 주차장에서 입구로 향하는 야외에서는 그 더위에 태양열과 바닥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이 더해졌기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만두를 찌는 물이 폐 안으로 들어오는 듯했다고 말했다. 이미 입구에서부터 지쳐있던 그녀는 초조한 마음에 거의 뛰어다니면서 유명전시물의 일부만을 겨우 보고 나서 약속된 시간에 맞춰 급하게 일행에게 돌아가느라 탈진해서, 남은 일정 내내 숙소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야시장 구경도 못하고 수족관 관람도 못 한 그녀는 속상해서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곧 입사할 회사에 그럴 수는 없었기에 관뒀다고 말했다.
“그 상품 사실 내가 기획했어요.”
나는 울분을 토하며 도루묵의 머리와 몸통을 갈라놓고 있던 그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이전 고객들이 고궁박물관을 못 가서 서운하다는 후기가 많아서 급하게 끼워 넣었는데, 사실 몇 시간 만에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 관광객들은 전시물 관람보다는 자기 얼굴과 박물관 건물이 함께 나오는 사진기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일반적인 성향이랄까?”
내가 난감해하며 말하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상혁대리님 이셨군요! 제 땀과 샌들을 앗아간 사람이.”
“샌들?”
“그날 어찌나 더웠는지 박물관에서 내려오는 계단에서 샌들 끝을 고정하던 부분에 본드 칠이 다 녹아내려서 뜨거운 돌계단을 한참 동안 맨발로 내려왔다니까요. 다 대리님 때문이에요. 아끼던 신발이었는데, 상혁대리님이 새로 사줘요. 그때 신었던 것과 같은 샌들”
“네네 고객님 제가 책임지고 샌들 사드리겠습니다.”
나는 팔자에도 없는 고객응대라도 하는 양, 고개를 조아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일요일에 가요.”
“이번 주?”
“네, 파주 아울렛에 그 샌들 판매하는 매장이 있거든요.”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다음 데이트 일정을 통보했다.
우리는 한 병의 소주를 더 가져다 놓고 이 화기 애애한 분위기를 끊지 않으려고 서로의 학창 시절 얘기를 하고 회사 근처 맛 집과 카페정보, 즐겨 읽는 책과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서로에 대한 추가적인 매력을 발굴하기 위해 애썼다. 내가 오뎅국물을 추가로 주문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1차는 좋은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어 근처 분위기 있는 와인 바나 포장마차, 어쩌면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들고 모텔 방에 들어가서 2차를 즐기며 서로의 온기를 본격적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둘 사이에 정해진 애정속도를 늦춘 것은 한낱 오뎅 이었다.
그녀가 소주잔을 비워내고 마른 냄비 바닥을 긁어 국물을 마시려 했을 때. 나는 항상 그래왔듯이 종업원을 불러 국물 추가를 요청했다.
“여기 죄송한데 오뎅국물 조금 더 주세요.”
내가 주문을 마치고 종업원이 주방을 향해 등을 돌리자 그녀가 식은 국물처럼 차갑게 말했다.
“오뎅 아니에요.”
“네?”
“오뎅이 아니잖아요.”
나는 눈치도 없이 계속 오뎅가게에 엉덩이를 붙이려 했던 것인가?
“아, 취소하고 나갈까요?”
나는 황급히 자리를 정리하며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가까운 와인 바의 위치와 모텔의 약도를 떠올렸다.
“오뎅이 아니라 어묵이잖아요 어-묵.”
그녀는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내 잔에 소주를 채우더니 내게 앉으라는 듯 눈짓했다.
172번 버스를 타야 했는데 127번이나 173번 버스를 탄 사람처럼 나는 망연자실해져서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묵 해봐요 상혁대리님.”
확실히 조금 전 보타 취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음... 어-묵.”
“그래요 어묵- 어휴 상혁대리님 우리말을 사랑해야죠 사-랑.”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혀가 조금 말려있어서 랑-이라는 소리가 길게 굴렀다.
그런 그녀가 오뎅을 곱창이고 부르라고 했을지라도 나는 그녀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그녀는 취해가는 모습조차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오뎅을 어묵으로 부른다고 시나몬이 계피가 되는 것처럼 종 자체가 언어의 혼란 속에서 뒤바뀌는 것은 아니었지만, 함께 취해가던 나는 괜한 장난기가 발동해서 말장난을 시작했다.
“근데 서지혜 사원 후쿠오카 온천 홍보물에도 어묵이라고 쓸 거예요?”
“네? 그게 또 그런가...”
“그게 그런 거 아닐까요?”
“으음... 근데 상혁대리님 어차피 한글로 작성된 홍보물은 한국 고객들만 읽는 거잖아요.”
“그런데요?”
나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과장처럼 최대한 얄미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한글이니까요, 한글이잖아요 상혁 대리니-임”
말꼬리가 잡힌 그녀의 목소리가 높고 길어졌다.
“그럼 왜 파리여행 상품에 소개된 꼬꼬뱅은 포도주 닭고기 조림이라고 쓰지 않은 거죠?”
“아휴 상혁대리님 어묵은 사전에도 있고 워드를 쓸 때도 오뎅 이라고 입력하면 빨간 줄 생기면서 어묵이라고 자동으로 고쳐 써진다니까요오- 마트에도 다 부산어묵, 사각어묵, 모둠어묵, 꼬치용 어묵, 어묵- 어-묵 어묵! 이라고 쓰여있다니까요!”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명치를 그 작고 하얀 주먹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또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조금 더 이 논쟁을 이어나가려고 그 음식의 국적논란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
“그러면 오코노미야끼는요? 타코야끼, 낫토, 피자, 파스타, 티본스테이크, 굴라쉬, 케밥, 팟타이, 치즈버거는?”
그녀는 내 입에서 나오는 그 음식 이름들을 튕겨내듯 팔짱을 끼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표정마저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점점 더 짓궂게 말했다.
“그래 어묵, 가락국수, 초밥 다 좋다 쳐요. 우리끼리는 충분히 소통이 가능한 단어니까요. 그런데 만약 우리 김치나 식혜, 구절판, 동치미나 추어탕 같은 음식을 일본어나 중국어로 번역해서 그대로 그네들이 쓴다면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일본과의 청산되지 않은 역사 문제로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다고 그들의 문화를 단어와 언어 안으로 강제 귀화시켜도 된다고 누가 정하기라도 했나요? 난 잘 모르겠어요. 워드에서 뉴욕스테이크하우스는 잘 써지는데 왜 간사이 오뎅을 쓰면 빨간 줄이 표시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ㄱㄴㄷㄹㅏㅑㅓㅕ 한글을 써서 표기했지만 의미를 번역해야 하는 외래어임에는 매 한 가지잖아요. 스테이크를 알파벳으로 표기하지 않았다고 영어가 아닌 것은 아니잖아. 너무 엄격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기준과 근거가 모호해요. 적대적 역사의식 때문에? 그것 만으로?”
그녀는 내 말을 들으며 조금 더 심각해진 표정을 내보이며 입을 오므렸다.
“아, 서지혜 사원, 재한 외국인용 영어, 일어, 중국어 판촉물에도 어묵이라고 적혀있나요? 말해봐요. 거 봐 아니잖아요.”
이제 그녀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내가 몰아붙여 말문이 막혀서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강한 적대감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그래도 어묵은 어묵이에요!”
그녀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것이 어묵이거나 오뎅이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듯 우리 앞에 놓인 냄비 속에는 새 육수와 몇 개의 그것이 채워진 채 끓어올랐다.
가게 안 테이블마다 올라와있는 그 어묵이거나 오뎅인 음식이 담긴 냄비에서 세차게 김이 피어올라, ‘오뎅’ ‘사케’라고 쓰여 있는 창문에 엉겨 안과 밖을 구분하고 있었다. 창 너머에는 제법 많은 눈이 쌓여서 행인들은 모두 취객 같아 보였고, 주황색 택시들은 한꺼번에 증발이라도 했는지 전차 무한궤도 소리 같은 쇳소리를 내는 버스 몇 대만이 겨우 도로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월남쌈, 사이공쌀국수는 어때요? 그거 베트남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녀는 이제 이 논쟁의 방향이 어디로 가도 관계없다는 듯, 혼자 소주와 대답을 삼켰다.
“월남은 공산진영에 의해 베트남으로 통일되고 사이공은 호찌민이 된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왜 우리는 아직도 사이공, 월남 그러는 거죠? 경성이라는 단어만 해도 그래요 여기 골목에만 경성주점, 경성감성포차 뭐 그런 가게들이 있던데, 경성이라는 단어가 수도라는 옛 말이기는 한데 그네들이 말하는 경성감성 그런 건 일제 강점기 때 서울이라는 말이잖아요. 우리 스스로 그 단어를 부끄러움 없이 꺼내 붙이고 있다고요. 이건 거의 제국주의와 냉전, 내전의 연속 아니겠어요? 내가 어묵을 오뎅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그 문제들에 비해 큰 문제일까요?” 나는 말과 단어들, 역사의 일그러진 변곡점 속을 헤쳐가기에는 조금 취해 있었으므로, 그저 우리가 하는 일과 앉아있는 술집 반경 100미터 안에 즐비한 언어의 모순과 명백한 역사적 모욕과 오독에 관해 되는대로 떠들 뿐이었다.
“적어도 어묵은 우리 화 되었잖아요. 신선로 같은 거 동남아 가면 다 그런 냄비에 국물요리 먹어요. 배추도 원래 중국에서 왔고, 국수도 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거잖아요. 뺏고 빼앗기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제 우리 화 된 거라고요. 실제로 일본 오뎅과 부산 어묵을 만드는 방법이 완전하게 똑같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 안에 들어가는 생선도 다 원양산이고... 아 몰라요. 어묵은 그냥 어묵이에요 상혁 대리님.”
그녀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틀렸다거나 때문에 내 뜻을 관철시키려 하는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단지 그녀가 당황해하는 표정을 즐기기 위한 말장난일 뿐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매출 회의에 지친 상무이사의 표정 같이 바뀌어 갔기에 나는 논쟁을 마무리 짓고 그녀의 표정을 되돌리기 위해 화재를 돌렸다.
“그럼 진짜 다른지 한번 가보자고요. 부산하고 오사카에 가서 어떻게 만드는지 한 번 봐요. KTX 타고 부산으로 가서 어묵공장 들렀다가 고속훼리 타고 일본으로 가서 오뎅공장 가면 되겠네, 어때요?”
“뭐가 어때요. 고작 어묵이나 먹자고 그 먼 길을 가자고요?”
“여행사 직원답지 않아요? ‘오뎅루트’ 좋네요. 새로운 식도락 역사 문화 여행상품.”
나는 수첩을 꺼내 ‘어묵과 오뎅의 여행상품’이라고 적고 수첩과 볼펜을 그녀에게 건넸다.
“자, 어때요?”
“별로예요. 저는 오뎅공장이든 어묵공장이든 별로 관심 없어요.”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휴가일정 수첩에 적어줘요 한번 일정 맞춰보게. 이거 잘하면 숙소비랑 교통비는 상품개발비로 청구할 수도 있겠는데요.”
“네? 진짜 가자는 거였어요?”
그녀의 표정이 현관문 동작감지 조명이 켜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녀는 수첩을 받아 들고 숫자를 써 내려갔다.
“난 또 그냥 상품으로써 어떤지 물어보는 걸로 알았지 뭐예요.”
그녀는 어쩌면 우리의 첫 여행이 될지도 모를 휴가 날자가 적힌 수첩을 내게 건넸다.
“그런데 상혁 대리님 정말 이럴 거예요?”
나는 몇 초 만에 다시 바뀐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어 난감했다.
“결국 일이 되어버렸잖아요. 일.”
그녀가 앉은 채로 발을 구르고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나는 이 판을 뒤엎을 결정적인 단어를 머릿속에서 급하게 뒤적거렸다.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맥주와 소주가 점령해 버렸기에 이렇다 할 단어를 구출해 올 수 없었다. 나는 급한 대로 명치 조금 옆에 고여 있던 그 말을 꺼냈다.
“결국... 그런가요? 그럼 이제부터 우리 일 말고 연애해 볼래요?”
그런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서른이 되었기 때문에 갑자기 뻔뻔해진 것일까? 순간 내 입에서 나온 그 말에 스스로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렇게 낯 뜨거운 말을 내 입으로 내뱉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그녀도 그 말에 낯빛이 붉어졌고 나를 쏘아보던 눈빛에도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답 대신에 왼쪽 뺨에 보조개를 만들며 배시시 웃었다.
일 같은 데이트가 연애로 변하고 이제 저 냄비 속 어묵, 또는 오뎅 국물처럼 감정이 펄펄 끓어 하나 둘 작은 기포를 내던 그때, 습도 가득한 영하의 기온을 코트 속에 머금은 그들이 가게 안으로 들이닥쳤다.
“김대리 뭐야, 집에 간 거 아니었어? 어? 서지혜씨네? 뭐야? 어? 뭐야 김대리?”
그녀와의 일과 연애에 너무 빠져 있어서 양 부장의 3차 시간에 가까워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내 불찰이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술을 마시는 양 부장이 3차 고정 장소인 이 오뎅가게에 오기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어야 했다. 오뎅이니 월남쌈이니 하는 흰소리는 자리를 옮긴 후에도 충분했을..... 아니, 그랬다면 연애하자는 용기백배한 말 같은 건 꺼내지 못했을지도... 어쨌든 일은 벌어졌다. 연애를 시작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은 그녀에게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 지혜 씨, 김대리랑 단 둘이 술 마시는 사이였어?
양 부장과 입사동기인 인사과 임 부장이 어째선지 친숙한 말투로 내 여자 친구를 향해 물었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그렇게 됐어요.”
그녀가 번쩍 일어나서 부장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수줍은 듯 말했다.
“야- 서운해 김대리, 청춘사업이 있으면 그렇다고 말하지. 에이 난 또 진짜 집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네...”
“야 야 다른데 가자 자리도 만석이고 젊은이들 생산적 활동 방해하지 말고 어서 가자고.”
인사과 임 부장이 양 부장의 소매 깃을 잡아끌었다.
“아이! 추워! 그리고 여긴 원래 내 단골집이야,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양 부장이 심술을 부리며 양다리를 벌리고 버텼다.
내가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멀뚱멀뚱 서있는 동안 그녀가 먼저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소주잔과 수저를 들고 내 옆자리로 와서는 두 부장들을 의자에 앉혔다.
“같이 마셔요 부장님, 여기 앉으세요.”
그녀가 덥석 내 손을 잡는 바람에 나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적당한 습기와 부드러운 촉감에 온기까지 더해져서 말문이 막혔다 랄까? 불편한 합석 따위는 신경 쓸 수 없었다.
“야 이거 꿈에도 몰랐는데, 김대리가 사내연애를 다 하고 말이야. 언제부터야 두 사람? 어? 나한테 보고도 없이.”
양 부장이 코를 훌쩍거리며 말했다.
“야 뭐 그런 거 까지 너한테 보고를 해야 하냐? 웃기는 자식이네 이거, 그나저나 두 사람 아주 보기 좋아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내가 주례해줄게.”
임 부장이 사귄 지 한 시간도 안 된 우리를 예비부부로 만들었다.
“야 인마, 네가 더 웃긴다 인마, 내 새끼 주례를 왜 네가 하겠다고 설치는 거야, 당연히 내가 해야지.”
“야 야 내가 김대리도 잘 알지만 서지혜 씨를 또 잘- 알아요, 너 서지혜 씨 잘 알아? 어? 서지혜 씨 아버님이 내 중학교 선배야 인마, 지혜 씨 개포동 무지개 3단지 살지?”
“네 부장님, 어떻게 아셨어요?
그녀가 크게 놀란 것처럼, 아니 놀라는 척 과장된 말투로 말했다.
“에이 내가 아버님이랑 동문회 임원도 같이하고 그랬었어, 기억 안 나지? 내가 지혜 씨 중학생 때 집에도 찾아가고 그랬었는데.”
“어머, 진-짜요 부장님?
“요즘에야 내가 바빠서 그런데, 그래도 꽤 자주 봤었다고 범관이 형이랑.”
임 부장이 말한 범관이 형은 그녀의 아버지 이름인 듯했다. 그녀는 다시 벌떡 일어나서 두 손으로 소주병을 감싸 쥐고 제법 깍듯하게 임 부장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럼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부장님.”
“에이 부장님은 무슨, 밖에서는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 동네 사람들끼리 격식 따지지 말고 그냥 편하게 해.”
일종의 시험일까? 인사과 부장이라는 직위가 편하게 대하라고 해서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닐 텐데... 그녀는 넉살이 좋은 건지 회사가 싫은 건지 ‘네 아저씨’라고 대답했다.
자리는 점점 더 불편해졌다. 사내연애에 대한 편견이나 부정정인 인식이 강한 조직문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게만 보는 것도 아닌 듯 임 부장은 사내연애 선배들의 결혼과 퇴사 얘기를 풀어놨다.
“뭐 세상이 많이 바뀌기는 했어도 여전히 결혼과 출산으로 퇴직하는 건 여성들이 대다수야, 물론 사내연애가 아니더라도 시집가면서 회사 내팽개치는 사람이 한 둘은 아니지만, 사내연애 하다가 퇴사하면 퇴사한 여편네 보다 남편 놈이 더 욕을 먹어 왜 그런지 알아? 여편네야 집에 있으니까 욕하든 말든 못 듣는데, 남편 놈은 회사에서 매일 장인 장모 처형 처남 매형 처제 같은 와이프가 일하던 부서 사람들을 봐야 하거든, 우리 부서 일 잘하는 여직원 훔쳐간 놈이 눈에 딱 보이는데 어쩌겠어?”
연애만 하던지, 결혼하되 둘 다 회사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취지의 말 같았는데,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나와 그녀에게 하는 조언 치고는 지나치게 앞서나가고 있었다.
임 부장은 뭐가 신이 났는지 한참 동안 실명을 거론하며 사내연애로 결혼한 커플들의 이야기를 했다. 인도네시아 현지 지원을 나갔다가 현지지사 직원과 눈이 맞아 발리에 신접살림을 차린 해외영업팀 박 과장, 남미팀 이 차장의 전처가 항공사업부 한 부장이라 유독 남미 쪽 비행기만 새벽출발이 많다는 이야기, 테마 사업부 정 과장이 파리 지사 발령에 급하게 결혼을 하면서 끌고 간 일본사업부 조대리가 파리에서 일본 남자와 바람난 이야기... 하나같이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다. 우리가 그 결혼담 중 하나가 되리라는 것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잘 돼도 그리고 잘못돼도 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녀는 임 부장과 양 부장의 훈화말씀이 교대로 이어지는 동안 테이블 아래 나와 마주 잡은 손을 꼭 쥐었다. 그것이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자는 신호인 줄 알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나는 부장들의 말을 받아내면서 맞잡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아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야 김대리야 내일 주말당직 없지? 어? 지혜 씨도 당직 아니지?”
양 부장이 술에 취했는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일어나서 메뉴판을 펼치며 중얼댔다.
“아, 네 부장님.”
내가 한숨을 내뱉듯이 대답을 밀어냈다.
“야 여기 내가 살 테니까 뭐 좀 더 시켜봐라, 지혜 씨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아... 부장님이 추천해 주세요.”
“그럼 어묵 스페셜 하나랑 양미리 구이 시키자.”
양 부장은 짧은 선잠에 벌써 숙취가 올라왔는지 인상을 구기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여기 오뎅 스페셜 하나랑 양미리 하나요.”
축구중계를 보던 종업원이 내 주문에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자정이 다 되었지만 가게 안에는 아직 사람들이 가득했다.
“야 김대리야 오뎅이 뭐냐 오뎅이.”
양 과장이 신트림을 넘기는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바른말을 써야지, 너도 언젠가는 부장 달고 임원 달고 해야 할 거 아냐, 벌칙, 마셔.”
양 부장이 스테인리스 물 컵에 소주를 가득 부어서 내 앞으로 밀었다. 양 부장은 본인이 못 마실 정도로 취하면 괜한 부하 직원에게 술을 먹여 대리만족하는 가학적 취미를 갖고 있는 위인이었다. ‘또 시작이네’ 하는 생각으로 소주가 가득 든 물 컵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데, 내 왼손을 잡고 있던 그녀의 오른손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흑기사!”
그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치더니 조금 전까지 내 손을 잡고 있던 그 손으로 덥석 컵을 들어 순식간에 소주를 들이마셨다.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마셨을 소주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는 알코올 도수의 요즘 소주였지만, 거칠고 역한 맛이 순해졌다고 맛있어진 것은 아니었는지 그녀는 손을 파닥거리다가 내 팔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야! 뭐 하냐 김대리야- 어서 안주 하나 입에 넣어줘.”
양 부장이 도루묵 접시를 내 앞으로 밀며 낄낄 댔다. 나는 그녀의 입 속에 도루묵 살코기 한 점을 넣고 소주가 비워진 스테인리스 물 컵에 물을 따라 건넸다.
“야- 지혜 씨가 아버지 닮았나 봐, 술이 아주 세네.”
임 부장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에이! 누군 흑기사도 없이 서러워서 살겠나... 김대리는 좋-겠어 멋지다 멋져, 기분이다 야 내가 너희 둘이 결혼하면 축의금 양쪽에 다 낼게.”
양 부장이 또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야 양! 왜 이래 이거, 나는 지혜 씨 거만 낼 생각이었는데, 에이 따블 요금이네 이거.”
임 부장도 역시 부장인지라 부장다운 농담이 재미있는지 양 부장과 합을 맞추며 시시덕댔다.
“근데요 부장님 그거 아니에요.”
물 한 잔으로 소주를 씻어 내린 그녀가 양 부장을 향해 검지를 흔들며 말했다.
“응? 뭐가 지혜 씨? 축의금? 뭐 말하는 거야?”
“아니요 양 부장님, 오뎅이요 오-뎅-”
“오뎅이 뭐?”
“저기 창문에 뭐라고 쓰여 있어요? 오-뎅, 오뎅- 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벳푸온천 패키지에 현지음식 소개자료 보셨죠? 네? 거기에도 어묵- 이라고 쓰시겠어요? 거 봐요 오뎅이라니까요.”
그녀는 우리가 사귀기 직전에 했던 대화를 복기해 가며 양 부장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로브스터는 바닷가재라고 해도 되는데 오뎅은 아니죠, 그건 국내용 상품... 음... 부산여행 홍보물에나 어묵이라고 쓸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여기 봐요 이 가게만 해도 대놓고 오뎅집 이라고 간판 걸고 장사하잖아요- 오뎅탕! 봐봐요 부장님 이 냄비 안 좀 보세요- 이거 치쿠와(ちくわ_竹輪)예요 치쿠와- 치쿠와만 들어있거든요 이 오뎅탕에는- 그러니까 오뎅이 맞아요! 땡! 부장님 땡! 부장님이 틀렸으니까 부장님도 한- 잔-”
그녀는 내편을 드는 건지 어묵이라고 고수하던 신념을 뒤엎고 양 부장의 물 잔에 소주를 따랐다.
“하하, 야 지혜 씨가 일본어까지 들먹거리니까 내가 또 할 말이 없네, 치쿠와? 요 대롱 같은 어묵을 그렇게 부르는 거야? 내가 또 한 수 배웠네.”
양 부장은 물 잔을 들어 소주를 반쯤 들이켰다.
“어-어? 부장님 원 샷 하셔야죠-”
그녀가 콧소리와 짜증을 버무려 말했다.
“야 지혜 씨야, 반만 맞으니까 반만 마실 거야, 오뎅이 오뎅인 줄은 알지만 어묵인 것도 맞잖아 어? 야 워드에 오뎅 이라고 쳐봐라 빨간 줄 뜨고 어묵으로 휙 바뀌지.”
양 부장이 그녀와 똑같은 근거를 대며 반박했다.
“에이... 오케이, 그럼 이번만 넘어갈게요 부장님.”
그녀는 제법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란히 붙어 앉은 그녀에게서 옅은 화장품 냄새와 알코올 냄새가 부드럽게 풍겼다. 테이블 아래 맞잡은 그녀의 손에서 손가락이 비죽 튀어나오더니 내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이 자리가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였을 터였다. 게다가 그녀와 나만의 밤이 이제 막 찬란하게 피어오르던 차 아닌가... 나는 막 테이블 위에 도착한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양미리 구이를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제법 잘 구워져서 특유의 비릿한 맛은 적었으나, 선호하는 맛은 아닌지라 억지로 소주를 연거푸 들이키며 양미리 네 마리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이야 김대리, 양미리 좋아하나 봐? 한 접시 더 시킬까?”
양 부장이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눈치가 너무 좋은 건지 또 낄낄대며 말했다.
“에이 양! 너는 눈치가 그렇게 없는데 어떻게 부장을 달았냐! 미스터리야 미스터리... 김대리가 빨리 자리를 끝내고 싶어서 그러는 거 모르겠어?”
임 부장은 역시 사람을 보는 일이 천직인 듯했다.
“야야 이만 시마이 하고 집에 가자.”
임 부장의 입에서 고대했던 말이 나왔다. 드디어 그녀와의 따듯한 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와 기대감에 입 안에서 곤죽이 된 양미리의 비릿한 맛이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시마이 라니요 부장님, 마무리-! 우리말! 예쁜 말! 하셔야죠-”
드디어 그녀가 내 허벅지 찌르기를 그만두고 마지막 건배를 하자는 듯 부장들에게 술잔을 들이밀었다.
“그래 이만 마치자, 다행히 눈도 다 녹아서 집에 갈 만하겠다.”
양 부장도 어쩐 일로 순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근데 서지혜 씨는 집이 어디라고?”
양 부장이 지갑에서 법인카드를 꺼내 등 뒤로 휙휙 휘두르며 물었다. 오뎅가게 종업원이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2-3초 정도 바라보다가 양 부장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법인카드를 빼갔다.
“에이 개포동 무지개 3단지 라고 했잖아, 양! 취했냐? 지혜 씨는 나랑 같이 택시 타면 돼.”
임 부장이 말을 마치자 그녀가 다시 내 손등과 허벅지를 무자비하게 꼬집었다.
그녀에게 고백하는데 내 30년 인생 동안 할당된 용기를 다 써버린 건지, 단둘이 가겠다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아 그랬지 그럼 같이 가면 되겠네, 김대리는 내가 상봉에서 내려줄게 오케이? 자 막잔하고 나가자.”
양 부장이 말릴 틈도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택시를 호출하면서 술잔을 비웠다.
그녀가 어찌나 세게 꼬집었는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대로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아니다, 다음이라는 것은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양 부장이 떠난 후 상봉에서 다시 개포동 무지개 3단지로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 그 계획을 알렸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는 꼬집기를 멈추고 손목에 있던 머리끈으로 풍성한 황갈색 머리카락을 질끈 묶었다.
거리에는 제설차들이 염화칼슘을 흩뿌리고 있었다. 눈도 녹고 심야할증이 붙어서 그런지 주황색 택시들도 몇 대 보였다. 택시 두 대가 우리 일행을 지나치고 나서 양 부장이 호출한 콜택시가 도착했다. 임 부장과 함께 택시에 오르던 그녀의 모습이 꼭 가출에 실패해서 외삼촌 손에 끌려가는 여중생 같이 보였다. 그녀가 탄 택시는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눈이 반쯤 녹아 질척이는 도로를 달려 한강다리 너머 무지개 3단지로 멀어져 갔다.
곧이어 양 부장과 내가 타고 갈 택시가 도착했다. 택시좌석에 몸을 기대고 서류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냈을 때,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마트폰 안에는 그녀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우리는 전화번호 교환 따위는 건너 띄고 연애를 시작한 성급한 커플이었던 것이다. 회사 인트라넷에 접속해서 연락망을 뒤져봤으나 그녀의 내선번호 옆 칸은 공란이었다. 도로 위에 눈은 검게 녹아내렸지만 내 눈앞은 하얗게 변해갔다.
택시가 수도학원 근처를 지날 때 망연자실한 내 어깨 위에 양 부장의 손이 올라왔다.
“야 김대리야 이문동 들렀다 갈까? 거기 2층에 바에 죽이는 아가씨 새로 왔다더라.”
양 부장은 어린아이 같이 해맑게 웃으며 내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지독한 숙취로도 가려지지 않는 패배감과 상실감에 신음하며 토요일을 흘려보냈다.
생수병과 일회용 용기를 정리하고 있던 일요일 오전 8시 그녀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샌들 사러 가야죠~ 상혁대리님!!!’
나는 허벅지에 생긴 멍 자국을 어루만지면서 그녀가 있는 남쪽, 무지개 3단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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