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 전생? 흔한 클리셰.

트럭에 치이고 모르는 세상에서 눈을 떴다. 돌아갈 길은 없다.

by 마타


나는 언제나처럼 귀에 이어폰을 꽂고 시선은 핸드폰에 고정한 채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전생했더니 리본 돼지가 되었다]라는 애니메이션으로 현대 사회에서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오던 주인공이 특정한 이유로 죽어 이 세계로 가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각양각색의 치트 스킬을 얻은 대신, 사람이 아닌 몬스터로 전생해 이 세계를 뒤흔든다는 이야기였다.


최근에는 이런 류의 애니메이션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이 세계 농촌 생활]


[학급에선 외톨이인 내가 치트 스킬을 받아 이 세계 무쌍]


트럭에 치이고, 심장마비에 걸리고, 또는 우연한 사고에 휘말려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뜬다는 스토리, 공통적인 점은 그들이 떠난 이 세계는 이곳과는 다른 마법이라는 신비한 힘이 존재하는 세상이고 그곳으로 가는 과정에서 이곳은 물론, 저쪽 세상에서도 치트라고 불릴만한 엄청난 힘을 얻게 된다는 점이었다.


누군가는 허망한 이야기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런 류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세상을 둘러보라! 삭막하고 꿈도 희망도 없는 이 세상이 얼마나 허망한가!


인류는 이미 지구상의 모든 땅은 물론, 하늘의 천체에 이르기까지 발자국을 찍어 놓았고 과학의 발전은 세상의 모든 비밀을 다 알아내어 미시 세계로부터 거시 세계에 이르기까지 세상 모든 법칙을 다 정립해 놓았다.


한마디로 꿈 많은 청년이 꿈을 펼칠 모든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말이었다. 이름을 남기고자 해도 이미 누군가가 이뤄놓은 일뿐이었고, 그저 끊임없이 경쟁해야만 살아남는 야생과도 같은 세상에서 톱니바퀴처럼 구르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인생, 그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인류는 이미 예전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고 현대인의 삶을 보면 예전의 임금들도 부러워할 만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 여름에는 춥게 살았고 겨울에는 덥게 살았으며 원하는 때에 따뜻한 물로 마음껏 몸을 씻을 수도 있었다. 하늘과 물속을 누볐고 지구 반대편까지는 반나절이면 이동했으며 멀리 떨어진 사람과도 실시간으로 통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치 유토피아와 같은 세상에 이르러서도 인류의 배고픔은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심화했으니, 극심한 허기짐에 지친 현대인들이 부와 명예와 같이 채워지지 않는 것들로 갈증을 달래려 애쓰기보단, 이런 일명 ‘이 세계 물’이라는 장르에 열광하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게다가 뭐면 어떻단 말인가? 꿈은 자유였다. 만약 이 세계라는 곳에 내가 가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법도, 문명도, 사회도, 이곳과는 한참 뒤떨어진 세계에 치트 능력을 갖추고 간다고 생각해보라! 정말 말 그대로 뭐든지, 얼마든지 내 생각과 욕심과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것만큼 설레고 가슴 뛰는 일은 없겠지.


단조로운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이것만한 정신적인 도피처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눈앞의 네모난 화면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만약…. 이 세계라는 곳이 정말 있고…. 내가 그곳에 가게 된다면….”


빠----아아아앙----!!!!!!!!!


눈앞의 화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밝아지고 귀청을 때리는 차량의 경적소리가 이어폰을 뚫고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것은 붉은 보행자 신호와 어느덧 횡단보도 중간에 서 있는 나의 모습, 그리고 시야 한가운데를 채우고 있는 거대한 덤프트럭의 존재감까지.


‘죽었다….’


생각이 확신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내기도 전에,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내 의식은 형체조차 남지 않은 육체를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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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이 그만치도 끔찍했기에 비명을 지르며 일어난 나는 곧장 내 온몸을 살펴보았다. 분명 으스러졌을 터인 머리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뜯겨 나갔어야 할 팔과 다리는 온전히 붙어 있었다. 그보다 뭔가 가벼운 느낌마저 들고 있었고 난생처음 느껴보는 해방감이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병원인가…?’


의식 한편에서는 아무리 의술이 발전했다고 한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 것이라는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떠한 이론도 달리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동굴과도 같은 통로였다. 은은한 하얀 빛이 나는 길이 통로를 비추고 있었고 나와 같은 처지인지 비명과 탄식을 내뱉으며 깨어난 많은 사람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어째서 길이 하나뿐인 거지…?’


“다시 돌아가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내가 주위를 둘러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위에는 없었던 미형의 소녀가 내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금빛의 웨이브 진 머리에 등 뒤에 달린 커다란 흰색 날개. 아마 흔한 말로 천사라고 하는 존재가 눈앞의 존재가 아닐까? 골든 리트리버가 사람이 된 듯한 귀여운 인상에 넋을 놓고 있으려니, 눈앞의 존재가 말을 이어 나갔다.


“돌아가는 길은 없습니다. 당신에게 허락된 삶은 여기까지입니다.”


‘뭐? 내 삶을 허락해? 누가? 누구 마음대로?’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신에게 삶을 주신 분 아니겠습니까?”


‘뭐야 지금 내 생각을 읽는 거야??’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이 알아듣기 편한 대로, 말로 설명하고 있지만, 원래 영혼은 말이 아닌 생각으로 대화합니다. 당신은 육체의 겉옷을 벗었으니, 이제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출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건 조금 싫은데.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누군가가 내 생각과 의식까지 알아본다는 것, 누군가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드러난다는 것은 분명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소녀에게 어쩐지 수치스러운 느낌을 받았던 나는 의식을 전환하기 위해 내 앞에 서 있는 존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온몸을 통으로 감싸고 있는 듯한 하얀색 원피스. 허리를 조이고 있는 금색 허리띠, 미형의 외모와 더불어 아름다운 체형까지 마치 교과서에서만 보던 비너스상이 떠오르는 듯한, 예술 작품과도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그녀였다.


분명, 이 땅에 있었으면 어떠한 연예인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외모겠지. 특이한 점이라면 그녀가 몸의 절반 길이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대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는 점과 마치 영혼의 깊숙한 곳을 들추는 듯한 불꽃과도 같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보면 매우 익숙하면서 신비로우며 이국적이면서도 호감 가는 인상이었다. 내가 읽었던 이 세계 소설에 따르면 이런 신비한 존재와도 인연이 맺어지기도 하던데, 혹시나 그런 익숙한 전개가 펼쳐지진 않을까?


그러자 이번에도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그녀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허리춤에 있던 칼을 흔들어 보였다.


“기분 나쁜 생각하지 마시고 앞으로나 가십시오. 당신에겐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생각을 읽는다는 건 치사하네. 네네. 그렇게 하지요. 저 동굴로 가면 되는 거죠?”


미인은 까탈스럽다고 하던가? 어지간히도 예민한 성격인가 보다 생각하며, 나는 그녀의 지시를 따라 언젠가 모든 사람이 걸어야 하는, 그 길을 걸었다.


‘미형의 소녀가 자기 장딴지만 한 대검을 차고 있다니, 이 무슨 언벨런스함. 그래도 천사의 외모가 보는 맛은 있네. 마지막으로 망자의 슬픔을 달래주려는 건가?’


“당신은 모독적인 생각을 도저히 멈출 줄 모르는 사람이군요?”


“남이사? 생각은 자유 아니야? 웬 참견이래?”


“생각이 자유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생각은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비춰주는…. 당신들 말로 뭐라고 합니까? 그 불빛이 나와 영상을 비춰주는 그 물건….”


“TV?”


“그래요. 그거. 생각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비춰주는 TV와도 같습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가죠. 많은 걸 볼 필요도 없이,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인 거 같아?”


“끊임없이 변명하고 남을 깎아내리며, 자신을 높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헛된 희망을 품으며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죠. 자신이 기준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눈을 가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여기까지 와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육체를 잃고서도 그 정욕을 감출 생각조차 못 하는 거겠죠. 당신이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다는 방증입니다.”


신랄하면서도 그 어떤 존중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 나를 처음 본 주제에 뭘 안다고 이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생각조차 알 수 있다는 상대의 말이 떠올라 쉽게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꼬투리를 잡고 볼멘소리로 상대에게 투덜거리는 것뿐이었다.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뭔가를 두려워해야 하나?”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몰라? 애초에 난 죽었는데 어떻게 말을 하고 생각을 하는 거지? 혼수상태에 꾸는 꿈이라는 건가? 분명 내 머리는 트럭과 부딪혀 으깨졌을 텐데.”


“본인이 느끼기에 이곳이 꿈과 같은 비현실적인 세상인 것 같습니까?”


“... 글쎄 그건 아닌 거 같아.”


분명 육체의 감각은 사라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떠한 감각이 느껴지고 있었다. 통로를 통해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과 바람에 실린 향기, 눈앞의 소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 그녀의 날개가 옷깃에 스치는 소리까지. 너무나 분명한 오감이 이전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비현실이라면, 내 지식과 경험 이상의 감각이 느껴지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본인의 지성을 버리고 이젠 현실을 받아들이십쇼. 당신의 육체는 죽었고 당신의 영혼은 지금 이곳에 있으며, 이건 분명한 현실입니다.”


“그런가…. 현실인가….”


죽었다는 사실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생각 이상으로 덤덤한 마음이 들었다. 의존하던 가족들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좋아하던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며, 이 땅에서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대충 벌어 그것으로 놀고먹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그런 야망 없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이전의 삶도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기에 미련조차 없었다. 그보다는 지금 직접 겪고 있는 이쪽 현실이라는 녀석이 조금 더 신경 쓰였다.


“보아하니. 당신은 매일 매일 특별할 것도 없이, 이 땅에 있어도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군요. 오히려 이 땅에 두고 오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미련을 가지고 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인데, 당신은 미련이 없을 법합니다.”


“그럼. 난 현실 순응이 빠른 편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몸. 아니 영혼이라고 했나? 느껴지기엔 수명이라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어때?”


“... 그 말대로입니다. 영혼은 불멸이죠.”


“그래. 그런 거 같았어. 육체는 남아 있지 않고 영혼이 불멸이라면, 이전 삶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지.”


내 말에 눈 앞의 천사는 놀랍다는 듯, 그러나 어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쯧…. 그걸 당신이 살아 있을 때 깨달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다만, 당신이 뭔가 착각하는 거 같아서 말씀드리자면, 불멸이라는 뜻이 죽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


그게 무슨 말일까. 불멸이지만 죽음이 있다니? 이미 한 번 죽었는데 또 죽는다는 말일까? 그게 무슨 뜻일까?


그러나 분명 생각까지 읽을 수 있다는 눈앞의 존재는 더 이상 설명해줄 의향이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끊기게 된 대화.


그 뒤로 얼마나 걸었을까? 신기하게도 분명 꽤 걸었을 텐데 이 영혼이라는 육체는 도저히 지칠 줄도, 숨이 차오르지도 않았다. 다만, 정신적인 피로감과 호기심만은 그대로 느껴졌기에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미인 천사분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


“...마타라고 합니다.”


“그래? 신기한 어감이네? 혹시 사람처럼 어떤 의미가 있어?”


“당신이 감히 바랄만한 의미는 아닙니다.”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일까? 마타라고 자신을 소개한 천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아마 상위의 존재라는 것은 이런 것이겠지.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압박감에 걸음을 멈추자 상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일단 계속 걸으시죠. 당신이 판정받기 전에는 제겐 어떤 권한도 없을뿐더러 당신을 괴롭히는 건 제 역할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당신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 안내하는 역할만 부여받았을 뿐입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영혼은 불멸이라고 했잖아. 그럼 그 칼은 무슨 용도인 거야?”


“불멸이라고 했지만, 고통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이 없다는 점 때문에 그 고통은 영원하죠. 혹시 어떤 느낌인지 체험해 보길 원하시는 겁니까?”


“괴롭히는 건 너의 역할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됐어! 그건 사양할게.”


마치 존재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녀의 눈빛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나는 그녀의 제의를 곧장 사양하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한참을 걸어왔잖아? 이 길의 끝에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거야? 혹시 그건가? 이 세계로 전생한다거나 그런 거야? 어떤 스킬을 부여받고?”


“이 세계? 스킬? 전생?”


기대에 찬 내 목소리를 듣고 천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의 눈을 바라봤다. 아마 이해가 되지 않는 맥락에, 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의식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겠지.


“...풉!! 그런 거였습니까? 당신은 마지막까지도 애니매이션만 보다가 죽은 겁니까?”


무엇이 그리도 우스웠을까? 천사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웃음을, 아니 일반적인 웃음과는 조금 다른, 아마도 통렬한 비웃음을 날렸다.


“뭐…. 뭐야? 너도 오타쿠니 뭐니 그런 걸 비웃는 거야? 그건 그저 글과 그림으로 우리를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그래서 실제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 없이,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건전한 취미라구! 세상에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나쁜 사람들도 많고 또 심지어는 그들이 사회의 고위층이라고 앉아 있잖아? 그것보단 훨씬 낫지!!”


세상이 오타쿠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괜스레 나서서 자신의 취미를 변호해 보는 나였으나, 천사의 비웃음은 나의 취미에 대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와중에서도 그런 허망한 것들을 붙잡고 있는 당신이 재밌어서 하는 말입니다. 글과 그림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들을 보고 즐긴다고 해도 나쁠 건 없죠. 하지만 당신 스스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같은 욕망의 대리만족이라고. 아까부터 당신이 알아듣지를 못해서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지만, 당신이 그것으로 대리만족을 하는 그 순간 당신은 결국, 자신이 그들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뭐?”


“그러니까. 당신이 만약 그런 나쁜 사람들과 정말로 다른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들과는 완전히 달랐어야 합니다. 즉 그들이 채우기를 원하는 그 추잡한 욕망 자체가 당신에게는 전혀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신은 방법만 다를 뿐, 결국은 그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았습니다. 결국은 그 욕망을 채우는 수단만 달랐을 뿐.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눈앞의 천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착한 사람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다는 자각을 가지고 살아오던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남에게 피해 끼치진 말자는 원칙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또 답답한 상황에서도 남들과는 다르게 내가 꾹 인내하며 버틸 수 있게 해주던 근간과도 같은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는 이익이 된다면 불법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법에 테두리 안에서라면 뭐든지 해도 된다며 온갖 추잡스러운 일을 자랑스럽게 행하는 사람도 많았다. 적어도 나는 자신을 억제하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글과 영상에 몰두하여 혼자서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었는데. 그게 어째서 남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건가?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끼치진 않았지 않은가?


“당신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니, 제가 다시 한번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계속해서 치사하게 생각을 읽은 마타라는 여 천사는 홀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어떤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대형 트럭을 몰다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스쿨버스를 들이받아 10명이 넘는 어린아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술을 마시기만 하면 주위에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한 직장 상사에 대한 원한을 품고 계획적이고 잔혹하게 그를 살해했습니다. 당신이 보기에 누가 더 악인입니까?”


“...그야 계획적으로 살인한 사람 아니야?”


“한 사람만을 죽였는데도? 앞의 사람은 무려 10명을 죽였습니다. 똑같은 살인이라는 죄 아닙니까?”


“그렇지만 계획 살인과 실수로 한 살인은 다르잖아. 동기가 다르니 죄의 경중도 다르지.”


“잘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질이 다르다는 점이죠. 인간 세상에서도, 그리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도 살인이라는 결과는 같아도 그 동기에 따라 죄의 경중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과실치사와 계획 살인을 다르게 처벌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간음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원하지 않지만, 위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여러 차례 간음을 저지른 사람과 늘 음란한 생각을 품다가 계획적으로 여성에게 접근하여 1회 간음을 저지른 사람. 둘 중에 누가 더 나쁩니까? 아마 후자가 더 나쁘지 않겠습니까?”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즉 그런 겁니다. 살인이라는 결과, 간음이라는 결과는 같아도 죄의 경중은 다릅니다. 또 사람마다 각자가 처한 환경이 다르고 자라며 듣고 배운 가치관이 다르기에 어떤 사람에겐 아주 당연한 도덕적 사실이라도 누군가에겐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모든 걸 공정하게 판단하고 또 심판하기 위해선 그 사람의 마음속 동기와 생각까지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사람의 마음과 동기까지 다 들여다볼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당신 앞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지독히도 미워해서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내뱉어 상대를 자살로 몰아간 사람과 똑같이 누군가를 미워해서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 둘 중 누가 더 나쁩니까? 음란한 생각을 늘 품으며 그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지만, 수시로 영상물을 통해 그 욕구를 대리만족을 하는 사람과 실제로 마음 맞는 사람을 찾아 그 생각을 한 번 행동으로 옮긴 사람, 둘 중에 누가 더 나쁩니까?”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야?”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결국 전자와 후자 둘 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만약 당신이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고도 실제로 간음을 저지를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면, 당신은 당신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과 똑같은 행동을 저질렀겠죠. 당신이 허망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이 이 세계로 넘어가 그 치트라는 스킬을 받았다고 칩시다. 그럼 당신은 그곳에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당신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하는 짓을 똑같이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들이나 당신이나 똑같은 사람이고 그렇기에 똑같은 최후가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마음에 품은 욕심을 각자의 처한 환경에 맞게 행동으로 옮깁니다. 눈으로 보이는 결과는 달라도 그 죄 된 마음은 같은 것이기에 그들 모두가 똑같은 죄인이라는 겁니다. 아까 제가 생각이 자유라 생각하냐고 물어봤죠? 이젠 그 답을 아시겠습니까? 생각은 자유가 아닙니다. 당신이 자유라고 생각하며 즐기고 있던 바로 그 더러운 생각들이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겁니다.”


기분이 나빴다. 반발심과 그에 따른 분노가 거친 언사가 되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너무나 싫게도 머릿속으로는 눈앞의 천사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하고 말았다. 그저, 격양된 감정 탓에 그녀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그것은 지금 이 천사가 하는 말이 앞으로의 내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할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한 가지 처절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 너 말이 맞다고 쳐. 사람의 생각이 그 사람을 나타내는 모니터와도 같고 마음으로 품은 죄나 행동으로 지은 죄나 마음을 보는 존재 앞에선 똑같은 죄라고 하자. 그렇지만 생각마저 깨끗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장담하건대 세상을 다 돌아다녀도 그런 사람 한 사람도 찾지 못할 거야. 그렇기에 그 욕심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게 컨트롤하는 사람을 우리는 착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또 그렇기에 도덕과 사회 규범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니겠어?!”


“당신 말이 맞습니다. 인간의 죄성이란 참으로 절망적인 것이어서 마음속 한편에선 다들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을 가지고 살면서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그 일을 하고야 말죠. 그 일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나중에는 결국 그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됩니다. 양심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때부턴 가책이 느껴졌던 그 일을 즐기는 데에 최소한의 거리낌조차 사라집니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게 되고, 점점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미움에 대해서, 욕설에 대해서, 음란에 대해서, 시기에 대해서, 탐심에 대해서, 방탕에 대해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든 인류는 계속해서 양심의 소리를 죽이며 살아가는 데에 열중합니다.”


“그래…! 너 말대로라면 그들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이야?”


“당신은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까? 양심이라는 법을 어긴 범법자인 겁니다. 살인만 죄고 과실치사는 죄가 아니란 말입니까? 인류 전체가 살인자라고 살인이 죄가 아닙니까? 양심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지각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는 분명한 법입니다. 사람이 성장함에 따라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양심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또 규율과 법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그 누구도 무죄한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이 모든 이야기를 이해했음에도 자신이 무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도 양심의 소리를 무시한 탓에 양심이 죽어버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터무니없었다. 말도 안 됐다. 양심을 한 번도 거스르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그 말은 분명 사실일 테지만, 그것이 그렇게나 큰 의미가 있다고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양심을 거스르고 가책을 느끼는 건 모든 인류가 밥 먹듯이 행하고 있는 짓이었다. 그걸 즐기는 용어로 배덕감이라는 말도 있지 않았던가? 실제로 배덕감을 즐기며 더욱 자극적인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이 사실상 모든 사람의 현주소였다. 그러나 양심이 법이라는 이야기를 깨닫고 보면 그것만큼 무서운 말도 없었다.


법을 어기면서 쾌락을 느낀다. 그것만큼 인류의 실상을 처절하게 나타내는 말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인간의 마음은 비록 악하지만, 선을 바라기 마련입니다. 자신을 알게 모르게 괴롭히는 양심의 가책과 만족할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굶주려 하는 탐심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늘 전쟁터죠. 그것에서 해방되고 의를 추구해야지만 행복해질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은 창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의를 구하지만, 그걸 이룰 능력은 없기에, 끝내 자신보다 의로운 사람을 깎아내리고, 자신을 변호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이 법과 기준이 되어 의의 기준을 낮추어서라도 이룰 수 없는 의를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죄를 더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누구도 선한 사람이 없고 너 말대로 우리는 무능한데. 어쩌라는 말이지?”


얼마나 걸었을까? 어두웠던 통로가 점점 밝아졌고 통로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환하고 따뜻한, 아름다운 세상이 저 끝에 있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알아졌지만, 어째서인지 발걸음을 더 옮기기가 두려웠다.


“다시 한번 당신이 재판관이라 생각합시다! 똑같은 죄인 둘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나는 잘못이 없소! 내 주위 사람을 보시오! 저들에 비하면 나는 선한 사람이지! 만약 내가 유죄라면 당신을 불의한 재판관이오!’ 하는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의 판단은 공의롭고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약 한 번의 기회만 더 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제가 그동안 즐겨 행하던 모든 것을 역겨운 것으로 여기고 이 모든 일에서 멀리 떠나겠습니다. 죄를 이길 힘조차 없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통곡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재판관이 둘 중 누구를 구제해줄 거라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아직 기회가 남아있던 살아생전에 한 번이라도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 슬퍼한 적이 있습니까?”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통로의 끝에 위치한 건, 이 세계로 나를 보내는 게이트도 아니었고 어떤 치트 수여식이 준비된 것도 아니었다. 관중석에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 또 법 집행을 위해 마타와 같이 허리에 칼을 차고 무섭게 나를 노려보고 있는 천사들과, 그리고 재판석에 앉아 꿰뚫어버릴 듯한 불꽃 같은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는 흰옷 입은 한 재판관까지.


재판장 뒤쪽으로 이어지는 길 너머로는 저 멀리 아름다운 빛의 나라가 보였고 법 집행인들이 서 있는 유치장 쪽 방향에는 어둠 속, 시뻘건 불꽃이 일렁이는 어둠의 나라가 보였다.


이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내 마음속에선, 오랫동안 죽어 있던 양심이 깨어나, 내가 지었던 죄와 받아야 할 형벌에 대해 고발하기 시작했다.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된 내가 주저 앉자. 마타는 무서운 힘으로 주저 앉은 나를 질질 끌어 내어, 끝내 재판정 앞에 세워 놓았다.


“이 자는 짐승들과 다르게 존엄한 인간으로 태어나 영원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내세, 심판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으며 또 죄책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마음에 심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자는 마치 짐승과도 같이 눈앞의 쾌락과 즐거움에, 주어진 모든 삶을 탕진하였으며 영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한 번도 반성하지 않은채 게으르고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이 자는 보는 것과 듣는 것,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 그리고 행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유라 생각하며 스스로 법이 되어 마음에 새겨진 법을 어겼고 끝내 모든 기회를 잃어버려 이 자리에 불려 왔습니다!”


재판관의 눈이 번뜩이자 재판정에 놓인 커다란 모니터에서는 내가 고의로 저질렀던 죄뿐만 아니라 내가 길을 걸으며 여인들을 보고 했던 생각들, 누군가를 미워하여 품었던 증오의 감정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해 은밀한 장소에서 했던 행동들, 또 내가 살아서 올바르게 살아갈 기회를 거절했던 모든 순간이 재생되었다.


수많은 군중 앞에서 내 모든 수치가 드러나고 더 이상 변명할 힘도 없는 나를 두고 재판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천국은 완벽한 나라지만, 그것은 천사들의 음악 소리, 맛있는 음식, 질병이 없는 영원한 삶이 있어서 완벽한 나라가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나라. 매일 매일 이웃들을 초대해 대접하며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서로 온전히 믿어주는 아름다운 연합이 존재하기에 천국인 것이다. 만약 그대와 같이 법 없이 사는 사람들이 천국에 가득하다고 생각하면 그곳이 과연 천국이겠는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미움과 시기 질투를 품어 음모를 꾸미고 시기하며 영원히 음란하며 영원히 방탕하고 영원히 분쟁하는 그런 무법한 곳이 과연 천국이겠는가? 이 땅에서도 천국의 백성으로 그 나라의 법을 지키며 산 사람이 저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고 이 땅에서도 지옥의 백성으로 산 사람은 그들의 나라인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옳습니다! 당신의 심판은 공의로우십니다!””””


주위의 천사와 군중 모두가 한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이윽고 법 집행관들이 다가와 내 팔을 잡곤 나를 유치장, 어둠 속 일렁이는 불꽃을 향해 끌고 가기 시작했다.


끌려가는 내 뒤로 나를 영원한 절망에 빠뜨릴 판결이 선언됐다.


“피고에게 사형, 영원한 형벌을 선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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