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2. 사랑에 관한 오해

by 허병상

아직도 가야할 길 2부 사랑


정신과 의사가 경험을 통해서 알려주는 자녀 훈육에 대해 알아봅니다.

출처: "아직도 가야할 길" 스캇 펙 지음, 최미양 옮김


2. 사랑에 관한 오해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신화는 끔찍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에 빠지는 행위에 그럴듯한 타당성을 부여하고 독려하여 결국 결혼에 빠지게 함으로써 인류의 존속을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필요한 거짓말이다.

사랑의 도취에서 깨어난 어느 부부는 그러한 사실을 인정한 후 심하게 바람을 피우고는 서로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결혼의 끝이 아니라 노력의 시작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달콤한 신혼이 끝났다고 인정했을 때조차, 다시 말해 더 이상 낭만적으로 사랑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들 관계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조차 그들은 여전히 신화에 집착하고 신화에 맞춰서 살려고 했다. 부부는 자신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상대방이 서로의 개성을 지닌 별개의 개체임을 인정하며 이런 기반 위에서만이 성숙한 결혼 생활이 가능하고 참사랑도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앞에서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참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이라고 단언했다.

한편 사랑에 빠지는 것은 참사랑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경험이기도 하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은 그릇된 인식이지만, 바로 그것이 진실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참사랑의 경험은 인간 한계의 확장을 가져온다.

사랑을 통해 한계를 확장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성장을 돕기를 소망하면서 그 대상을 향해 다가가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하는 대상에게 사랑을 느껴야 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러한 끌림과 투자와 헌신하는 현상을 '애착'이라 부른다. 자신 밖에 있는 대상에 애착할 때 우리는 심리적으로 그 대상의 상징을 자신과 일치시킨다.

사랑에 빠져 성행위를 할 때 수반되는 일시적인 자아 경계의 붕괴는, 참사랑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헌신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일생 동안 사랑한 후에야 맛볼 수 있는 보다 지속적이고 신비한 황홀감을 (장려하는 차원에서) 미리 조금 맛보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참사랑을 향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는 사랑은 아니지만 그것은 크고 신비로운 사랑이라는 세계의 일부다.

사랑에 관한 흔한 오해 중 두 번째는 의존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의존성이란, 상대방이 자신을 열심히 보살펴 준다는 확신이 없으면 적절한 역할을 못하거나 완전함을 경험할 수 없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이 의존성의 결과는 아주 극적인 것이어서 자살을 시도한다거나 자살하는 시늉을 하거나 자살하겠다는 말로 사람을 위협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의존하고 싶은 욕구나 느낌을 갖고 있다. 자기보다 더 강한 사람이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아기처럼 보살펴주기를, 가만히 있어도 돌봐주기를, 애정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러한 욕망이나 느낌이 생활을 지배하지 않는다. 즉, 그것이 우리 존재의 압도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그것이 삶을 지배하고 존재의 질을 좌우할 때, 그 때는 의존하고 싶은 욕구나 느낌 이상의 것을 갖는다. 다시말해 의존적인 상태가 된 것이다. 특별히 의존 욕구가 삶을 지배하고 좌우할 때, 그 사람은 의학적 용어로 '수동성 의존적 성격장애'라고 칭하는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장애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사랑받는데 급급한 나머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항상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외로움도 잘 견디지 못한다. 진정한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단지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규정한다.

이런 현상을 진단할 때 '수동적'이라는 말을 '의존적'이란 말과 함께 사용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동적인 의존은 사랑의 결핍에서 시작된다. 수동적 의존성이 있는 사람들이 겪는 내적 공허감은 유년기에 필요로 했던 부모의 애정 및 관심과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결과다. 유년기를 통해서 비교적 일관성 있게 사랑과 보살핌을 받은 아이들은 마음속 깊이 자신이 사랑받을 만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진실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을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성년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랑이 결핍되고 보살핌을 잘 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러한 내적 안정감을 갖지 못하고 성년기에 들어선다. 오히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하고 소중한지 의심하면서 "나는 갖지 못했다"는 내적 불안과 세상은 예측할 수 없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랑과 관심과 보살핌이 있는 곳을 발견하기만 하면 아무 생각없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발견하면 결사적으로 꼭 달라붙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변해 결국은 자신이 유지했던 그 관계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

사랑과 훈육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고 아이를 잘 돌보지 않는 부모는 훈육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동적 의존성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훈육이 결핍되어 있다. 또 그들은 흔히 약물과 술에 대한 의존성을 보인다. 그들은 '중독적 성격'을 갖고 있다. 사람에게 중독돼 사람을 빨아먹고, 그럴 사람이 없을 때는 사람 대신 술에 탐닉하거나 마약 같은 약물에 중독된다.

요컨대 의존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방에게 치열하게 애착하도록 하는 힘이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의존성은 관계를 쌓기보다는 파괴하고 사람들을 성장시키기보다는 망가뜨린다.

사랑의 유일한 목적은 영적 성장이나 인간의 발전에 있다.

취미나 권력이나 돈같은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수단일 수는 있어도 목적일 수는 없다. 사랑은 '분별있게' 주고 또 분별있게 주지 않는 것.

사랑은 자기 희생이 아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은 똑같이 이기적이지만, 그 구별은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달려있다. 진정한 사랑의 경우, 그 목적은 항상 영적 성장에 있지만 사랑이 아닌 경우에는 그 목적이 항상 다른 것에 있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느낌을 가지고선 그에 반응하여 무자비하고 파괴적인 태도로 행동한다. 사랑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 시도하는 노력과 용기이므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사랑을 위해서는 자신을 '괄호로 묶는' 훈육이 필요하다. 자신의 편견, 판단 기준, 욕구들을 괄호로 묶어서 일시적으로 포기하거나 제쳐둘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온전하게 집중하고, 상대방의 내면세계를 그 사람의 입장이 돼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나 자신 안에 그를 위한 공간을 만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자리를 만드는 것이 바로 '괄호로 묶기'라는 훈육이며 그를 위해서는 자신의 확대와 결국에는 자기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좋은 부모가 되는 데 따르는 괴로움과 변화를 자기 희생이나 순교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부모가 아이보다 그 과정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다. 변화하고 성장하는 고통을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없고, 성장하는 아이에게서 배울 의사가 없는 부모는 부지불식간에 노쇠의 길을 택한 것이다. 아이에게서 배운다는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의미 있는 노년을 준비하는 데 가장 좋은 기회다. 슬프게도 대부분은 이러한 기회를 잡지 않는다.

진정으로 사랑할 때 나 자신은 확장하며, 나 자신을 확장할 때 성장하는 것이다. 또, 더 많이 사랑할 수록 더 오래 사랑할 수록 나는 커진다.

요약: 장유(長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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