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으며 한 생각

타인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오묘한 쾌감

by Vera Ryu

혼자 점심을 먹고 있었다.

사람 많은 가게에서 어떤 일행의 대화 소리가 유독 잘 들렸다.


대화는 최근 뉴스화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산 파주 부사관 아내 방치 살해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방치라는 사건의 양태와 그 자세한 내용의 잔혹함(그리고 그것에 대한 인간적인 혐오감)으로 인해 대략적인 내용 외에는 더 알아보지 못한 사건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유독 멀리 떨어진 그 테이블에 있던 대화에 굳지 집중했던 것은 역시 소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 대화가 거슬렸다. 거슬렸던 것은 대화의 초점이었다. 그들은 사건의 잔혹함과 가해자의 책임 회피에 대해 (내가 원하는 것만큼) 분노하고 있지 않았거든.


일행 중 한 사람은 자신이 가해자를 간접적으로 안다며, 자신이 그 사건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를 거듭 강조했다. 주변인들은 가해자가 정신적 질환이 있었는지, 실제로 그를 본 바 있는지 등을 잠시 물어보긴 했지만, 사건에 대해 더 알려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러고 대화는 일반적인 군 생활, 부사관이 되기로 결심한 계기 등에 관한 것으로 돌아갔다.


나는 피해자와 그녀의 유족을 대신해 서운했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유감을 표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화는 정말이지 그녀의 불행을 소재로 사용하고 버린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불행이 소재가 되면 왜 안 되냐고? 불행이 소재가 되면 누가 얼마나 더 불행한지, 불행의 잔혹성만이 마치 경쟁을 하듯 부각된다. 그리고 그 불행을 지켜보고있자면 이런 사연을 당사자는 정말 이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알리고 싶었을지 의문이 든다. 그리고 눈물을 머금으며 정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치부를 세상에 드러냈을 피해자들이 생각나 기분이 거북해진다.


최근에는 영화 <얼굴>을 보다 말았다. 나는 두 번째 인터뷰까지를 겨우 볼 수 있었다. 저널리즘의 얼굴을 하고 ‘이건 재미가 있다’며 어머니의 삶을 파보는 PD를 보는 것이 불편했다. 그러나 피복공장의 직원들이 영희를 ‘똥걸레’라 부르며 그녀의 가장 치욕스러웠을 경험 중 하나를 그녀를 알지 못하는(그러나 사실은 그녀의 아들인) 사람들에게 마치 신이 난 듯 이야기해대며 웃는 걸 보았을 땐 불쾌하기까지했다.


그날 내가 엿들은 대화에서는 조금 과장하자면 '똥걸레 이야기' 같은 느낌이 났다. 왜 남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미묘한 쾌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왜 나는 오늘 들은 누군가의 불행을 남에게 공유하지 못해 안달이 나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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